부처님

[스크랩] 금강경 오가해 중심으로

똥하 2016. 6. 25. 19:03

 

명상하며 금강경 읽기

 

 

금강경 오가해 중심으로

 

1. 육조혜능(六祖惠能: 638~ 713) 홍인(弘忍, 601-674)을 찾아가 8개월 동안 곡식 찧는 소임을 한 후에 그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은둔하다가 676년에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삭발하고 수계(受戒)하여 정식으로 출가함. 그 후 소주(韶州)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 소주(韶州) 대범사(大梵寺광과사(廣果寺),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 시호(諡號)는 대감선사(大鑑禪師). 쌍계사에 가면 육조대사 비가 있다.

 

2. 야보도천(冶父道川: 생몰 년대 미상). 지금의 산동성 諸城縣 사람이다. 속성은 씨이며 이름을 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를 狄三이다. 宋代의 스님. 저서는 금강반야경송이 있다. 스님을 약칭으로 선사라 부른다. 출가 전에는 현에서 하급 관리인 범인을 잡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설법을 듣기를 좋아했는데 그는 겸수좌라는 스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결심하자 스님은 그를 도천이라 법명을 지어 주었다. 는 그가 가야할 길이며, 을 세운 것이니 그가 세속에서의 살았던 인생을 를 위하여 세웠다는 의미라고 한다. 1127년에 비구계를 받고, 天封鏋庵선사 밑에서 정진하였다. 깨침 후에는 송나라 전역에서 스님을 칭송하고 그에게 금강경 강의 해줄 것을 요청하여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3.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중국 당나라시대 스님이다. 도원선사의 설법을 듣고 落髮하였다. 화엄경을 연구하고 화엄사상과 선사상에 심취하였다. 그는 젊어서는 유학을 하고 과거를 보러 가던 중에 수주(遂州)道圓禪師를 만나 낙발하고 스님이 되었다. 어느 날 신도의 49재에서 원각경을 독송하다가 깨쳤다. 화엄종의 종주가 5조가 되었다. 종남산에서 오래 살았으며 종남산 규봉선사라 칭했다.

4. 豫章宗鏡 (생몰년대미상): 종경록을 지었음.

 

5. 부대사 (傅大士; 497~569) 양나라 말기의 거사. 거침없는 설법으로 승속을 막론하고 존경받고 그를 따랐다고 한다. 절강성의 사람으로 성은 씨이고 이름은 흡() 쌍림대사(雙林大士) 동양대사(東陽大士) 부대사 라 불렀다. 16세 혼인하고 두 아들을 얻고 서역에서 온 승려 두타 승에게 감화되어 동양 松山에서 은거하여 수행하였다. 후에 雙林寺를 창건하고 대법회를 여니 승속이 운집하였다. 입궐하여서는 양무제에게 설법하여 양무제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불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어록은 선혜대사어록(善慧大士語錄)이 있다. 아래에 시 한 수 소개함. 善慧란 이름은 수보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나네.

 

앉으나 서나 늘 따라 다니고

말할 때 묵묵할 때에도 늘 함께 한다네.

 

6.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 스님은 무학대사의 제자로 법명은 기화(己和), 법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다. 처음 법명은 수이(守伊)이다. 속성은 유(). 어려서 경서를 배우고 21세 때 관악산 의상암에서 출가했다. 이듬해 양주 회암사로 들어가 무학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명산을 두루 편력하였다. 금강경 오가해를 보다가 설의說誼와 제강(提綱)을 첨()하였다.

 

금강반야바라밀경

 

法會因由分 第一 (법회가 열린 인연)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爾時世尊食時着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여

하실새 於其城中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여 飯食訖

하시고 收衣鉢하시며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다

 

이와 같이 듣사오니

한 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의 정사(精舍)

여러 큰 비구 1,250인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공양하시기 위하여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지니시고 사위국 대성으로 들어가시어 그 성 가운데에 차례로 탁발을 하시어 마치시고 다시 정사로 돌아오시어 공양을 마치신 후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시었다.

 

법회인유분 해()

 

규봉종밀

 

. 建立(動機)를 밝힘이니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무렵에 阿難가지를 물으신데 대하여 부처님께서 낱낱이 답하시되 내가 멸도한 후에 四念處에 의지하여 할 것이요, . 로써 스승을 삼음이요. . 나쁜 比丘는 침묵으로 물리칠 것이요, . 일체 경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이 모처(某處)에 계시사 大衆 약간명 00등과 더불어 함께 하셨다.“할 것이니라.

 

육성취 六成就

. 신성취(信成就): 만약 아문(我聞)’을 해석한 즉 을 가리킨 말이니, 이와 같은 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음이요, ‘如是는 지도론(智度論)에 이르되 믿음이 성취(成就)된 것이라 하다

 

. 문성취(聞成就)이니 阿難의 자신을 이름이요. ‘은 이근(耳根), 알음알이()를 낸 것을 말함이다.

 

. 시성취(時成就)이니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설함과 듣는 때를 말함이다. 一時(한때)라고 한다. 또 법을 설하고 을 알아듣는 그때에 마음과 경계가 없어지고 이()와 지()가 융통하고 범부(凡夫)와 성인이 같고 근본()과 시작()이 함께 모이니 이 두 법이 다 한때(一時)인 것이다.

 

. 주성취(主成就)이니 갖추어 말하면 불타인데 깨달은 이라고도 한다. 기신론(起信論)에 이르되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과 체()가 생각을 떠난 것이니 생각을 떠남이 마치 빈 하늘(虛空界)과 같아서 곧 이것을 如來平等法身이라 한다.

 

. 처성취(處成就)이니 사위국은 문물이라 이르니, 지수등(祇樹等)이란 기타태자(祇陀太子)가 보시한 나무이고 급고독원(給孤獨園)이란 수달장자가 산 동산이다. 급고독(給孤獨)은 보시를 행한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절을 승가람(僧伽藍)이라 하나 한문으론 중원(衆園)이다.

 

. 중성취(衆成就)이니 여()의 뜻은 아우른다는 뜻과 함께한다는 뜻이 있다. 千二百五十人이란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할 때 교진여(憍陣如) 인을 제도하고 다음엔 가섭 3형제와 그의 신도 1000 을 모두 제도하고 다음엔 사리불, 목건련과 각각 신도 一百名을 제도하시고 또 야사장자(耶舍長者)의 아들 등 五十人인 보시한 나무이고 給孤獨園이란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산 동산이다.

 

야부송

 

높고 높아 당당함이여,

만법 가운데 이로다.

삼십이상에 백천 가지 빛이라

성현 범부가 우러르고

외도가 귀의하여 항복하도다.

자비로운 모습을 뵙기 어렵다 이르지 말라.

기원 대도장에 아직 그대로 계시도다.

 

육조

 

이시(爾時)란 것은 바로 그 때이고 食時란 지금의 진시(辰時; 오전7시부터 9)니 재시(齋時: 사시(巳時). 오전 10)가 가까워온 때이다. 착의지발(着衣持鉢)이란 예법(禮法)이요, ()이란 성 밖으로부터 성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사위대성(舍衛大城)’은 사위국(舍衛國)의 이름하니 곧 파사익왕이 살고 있던 성()인 까닭에 사위대성(舍衛大城)이라 한 것이다.

 

걸식이란 여래께서 능히 일체중생에게 하심한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고, 차제(次第)란 빈부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교화한 것이다. 걸이(乞已)란 많이 빌 때는 일곱 집을 넘지 않았고 일곱 집이 차면 다시 다른 집에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환지본처(還至本處)란 부처님의 뜻으로 모든 비구(比丘)를 제어하시어 신도들의 초청이 있기 전에는 자주 백의(白衣:속인)의 집에 나아가지 않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세족(洗足)이란 여래도 똑같아 범부와 다른 점이 없는 까닭에 세족이라 한다.

 

또 대승법에서는 손발을 씻는 것만으로서 깨끗한 것을 삼지 않는다. 손과 발을 씻는 것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과는 같지 않으나 일념을 깨끗이 하여 죄의 때를 모두 없애는 것을 손발 씻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여래께서 설법하고자 할 때는 먼저 단좌(檀座)를 펴고 앉는 것으로서 위의를 삼은 까닭에 말씀하시기를 부좌이좌(敷座而坐)라 하신 것이다."하였다.

 

설의 : 입성걸식(入城乞食)과 수의세족(收衣洗足)과 부좌이좌(敷座宴坐)하심은 낱낱이 다 가슴깊이 사무치는 사람을 위한 소식이다.

 

여기에서 아주 영리한 사람(상상근기上上根機)을 빼고는 한바탕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근기가 같지 않으므로 여러 方便으로 대중들을 이끌어 들인 것이다. 새를 잡는 것은 그물의 한 눈금으로 족하나 그물의 한 눈금을 그물이라 하지 않는다. 나라를 다스림에 그 은 한 사람에게 있으나 한 사람만으로써 나라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황명노자(黃面老子)가 곡진히 중하근기를 위해서 한 걸음을 내려와서 언설의 바다에 몸을 비껴 들어가시어 동설서설하시고 횡설수설하시니라.

 

이러므로 조사의 가르침을 높이 들어 근기에 따라 쓰니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은 그 말씀이 자비를 띠고 있음을 알라고 하시니 아래의 긴 글은 바로 그것 때문에 쓴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운 부처님께서 베푸신 이러한 말씀이 요컨대 이득과 가 미세하지 못하니 도리어 가 되고 가 됨을 알겠는가.

 

각묵스님의 금강경 해석과 믿음[信解]

 

초기 경에서는 믿음이라는 술어가 어떻게 나타나며 초기 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는 것이 불교 신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한다. 초기 경에서 믿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는 saddhā(삿다, Sk. śraddhā, 슈랏다) pasāda(빠사다, Sk. prasāda, 쁘라사다) adhimokkha(아디목카, Sk. adhimokṣa, 아디목샤)의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일반적으로 한글로 믿음이라 할 수 있는 산스끄리뜨 원어는 śraddhā(Pāli. saddhā)이다. 서양의 범어 학자들에 의하면 슈라드는 심장, 가슴(heart)을 나타내는 명사로서 희랍이나 로마의 heart를 나타내는 단어와 같은 기원을 가진 단어로 보고 있다. 그래서 슈랏다는 마음을, 자기 가슴을 무엇에다가 놓는 것이라는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인도에서도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 슈랏다라는 단어는 우리말 믿음[]이 여러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듯이 믿음에 관계되는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벌써 브라흐마나 문헌(제의서)에는 이 슈랏다가 공물의 신으로 인격화되어 나타나서 공물을 바치는 만큼 축복을 준다는 개념으로 발전하고 있기도 한다. 이렇듯이 인도 문헌에서는 슈랏다는 믿음에 관계된 모든 의미 즉 영어의 belief, faith, confidence, trust 등의 의미로 광범하게 쓰이고 있다고 하겠다.

 

초기불교에서도 이 용어가 받아들여져서 빠알리어에서는 삿다(saddhā)로 발음이 되고 있는데 이 삿다가 뜻하는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술어가 빠알리 경전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 불교의 거의 대부분의 술어들은 산스끄리뜨를 위시한 동시대의 언어를 차용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술어들은 동시대 바라문교나 힌두교에서 통용되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불교 특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술어로 정착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용어는 그냥 전통적인 산스끄리뜨의 의미로서만 받아들여서는 아주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실 발제자가 인도에서 공부할 때 베다나 클래식 산스끄리뜨에 정통한 바라문 선생님들이 불교용어를 그들 식으로 해석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불교 용어를 이해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술어들이 불교 경전의 문맥에서 어떻게 쓰이고 나타나는가 하는 점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다.

 

信解 아디목카(adhimokkha)를 살펴보면, 사전에는 확신, 결단, 결심을 뜻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신뢰(삿다)와 분명함(빠사다)에 바탕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본 경에서도 이 아디목샤(adhimokṣa)라는 단어가 몇 번 나타나고 있고 구마라즙과 현장은 信解라고 옮기고 있다.

 

이처럼 초기 경에서는 믿음이 부처님 가르침에 신뢰(삿다)와 법을 사유하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생기는 편안함 즐거움, 그래서 생기게 되는 확신, 흔들리지 않음, 확고부동함(아디목카)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한다. 이런 믿음이 확립된 경지를 예류향 내지는 예류과라 하여 성자의 반열에 동참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우리가 꼭 음미해보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출처 : 대불법회
글쓴이 : 다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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