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스크랩]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와 현대철학

똥하 2015. 6. 23. 17:22
의상의 《華嚴一乘法界圖》와 현대철학
- 법성의 깨달음과 본성의 행복을 위한 복음
 

김형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철학.

 

1. 만달라(mandala)의 도인(圖印)으로서의 법계도

::::: 목 차 :::::
  1. 만달라(mandala)의 도인(圖印)으로서의 법계도
  2. 도인(圖印)의 도형적 분석
  3. 법성의 원융성과 차연(差延)의 법
  4. 사실의 법을 여여하게 보기
  5. 존재의 기쁨과 행복의 복음
    Abstract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7세기에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하 《법계도》라 약칭함)를 오늘의 우리는 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상(義湘)이 1300여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선지식(善知識)을 가르치고 있는가?

1300여 년의 세월, 정말로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으로 보면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이다. 그런데 의상은 그의 법성게(法性偈)에서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 교직(交織)하고 있다’(九世十世互相卽)라고 말하였다. 사전적인 의미로 소개하면, 구세는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가 각각 과거, 현재, 미래를 안고 있기에 구세라 이르고, 십세는 그 구세를 관통하는 통일적인 시간을 일세(一世)로 간주하여 도합 십세로 보고 있다. 법계도의 법성게에 대한 주석서로서 의상의 제자들이 편찬했다고 하는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이하 《총수록》이라 약칭함)에서 좀 더 알기 쉽게 상기의 말에 대한 해설이 나온다.

저 구세는 다섯 가지 요소로 집약되는데, 그것은 그제(昨昨日), 어제(昨日), 오늘(今日), 내일(明日), 모레(明明日)을 말한다. 그제는 과거의 과거에 해당하고, 어제는 그 과거의 현재점에서 보면 과거의 현재를 말하고,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현재의 과거이다. 오늘은 어제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미래이고, 현재 시점에서 보면 현재의 현재이다. 그리고 내일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은 미래의 과거인 셈이다.

내일을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현재의 미래이고, 그 당시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미래의 현재인 셈이고, 모레는 내일의 미래와 같다.1) 1) 李箕永 역, 《한국의 불교사상》(세계사상전집 11권), 《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 299쪽, 삼성출판사. 漢文原本, 504쪽.

이런 각도에서 구세를 읽으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은 의상이 살고 있었던 그 시간에 비하여 어제의 미래인 셈이고 동시에 그 때는 오늘의 과거에 불과하다. 오늘은 어제와 분명히 차이가 나지만 동시에 오늘이 어제의 미래이므로 오늘은 어제의 시간적 연기와 같다.

그래서 의상이 살고 있는 7세기는 화엄적 시간의 차원에서 보면 21세기의 어제와 같고 21세기는 7세기의 미래와 같다. 이렇게 차이가 나므로 서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으나, 또한 7세기가 21세기에 시간적으로 연기되어 있으므로 같은 일세의 뜻으로 봐서 십세로 계산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면 21세기가 7세기에 가역적으로 연장되는 일은 없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본질상 그런 역방향의 진행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화엄적인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에 비추어 21세기에서 우리가 해석하는 의상의 《법계도》의 의미가 풍요하면 할수록 그 의미는 1300여 년의 세월을 통과하여 의상의 화엄사상의 가르침을 더욱 찬연하고 생기나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아래의 《법계도》의 모양과 기술을 보면 알수 있듯이, 저 《법계도》는 도장(印)의 형식으로 그려진 일종의 만달라(mandala)로서 사각이다. 사각의 형태는 의상 자신의 설명처럼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四攝)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사무량심은 무량한 자심(慈心), 비심(悲心), 희심(喜心) 그리고 사심(捨心)을 각각 의미하는데, 이것은 이 《법계도》가 중생들에게 한없는 자애심(慈愛心)과 고통과 슬픔을 씻어주는 발고심(拔苦心), 그리고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는 마음과 모든 중생들을 평등하게 사려하기 위하여 자기집착을 버리는 마음을 말하는데, 이 사무량심은 곧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불심을 상징한다.

그리고 사섭도 고통의 괴로움을 받고 있는 중생들로 하여금 복락의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하여 내는 보살의 발심으로서 보시로서 중생들을 거두어 드리는 보시섭(布施攝),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서 중생을 거두어 드리는 애어섭(愛語攝),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여 거두어 드리는 이행섭(利行攝),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추어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해함으로써 그들을 거두어 드리는 동사섭(同事攝)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무량심과 사섭으로 대변되는 사각의 법계도는 이미 그 구성의 목적이 바로 중생들에게 최상의 복락과 행복을 시여하는 만달라임을 알리고 있다.

이 만달라의 도인은 또한 흰바탕의 기세간(器世間)을 공통으로 하여 하나의 붉은 선으로 구불구불하게 54각으로 이어지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7언 30구의 210개의 검은 글자들로 짜여진 중생세간(衆生世間)이 모두 하나의 도형으로서 상징화되고 있다. 보살과 부처의 세계와 중생의 세계가 다 산하대지의 기세간을 떠나서는 성립하지 않으므로 흰바탕의 기세간을 바탕으로 광명의 색인 붉은 불보살의 세계와 어두운 무명의 중생세계가 공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총수록》이 밝히고 있다.2) 2) 같은 책, 304쪽 참조.

그리고 붉은 선이 한줄로 이어지는 것은 부처님의 법이 하나의 진리인 일음(一音)임을 상징하고, 54개의 굴곡으로 펼쳐지는 것은 중생들의 근기가 각각 달라서 오는 다양성을 말한다고 한다. 저 법계도는 화엄의 육상(六相)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화엄의 육상(六相)은 ‘총상(總相)/동상(同相)/성상(成相)’과 ‘별상(別相)/이상(異相)/괴상(壞相)’을 뜻하는 것으로 의상의 《법계도》가 하나의 전체적 그림으로 통일적으로 표현된 것은 화엄의 총상(總相)과 동상(同相)과 성상(成相)을 대변하고, 그 법계도가 다양한 각과 곡선으로 나누어진 것은 화엄의 별상(別相)과 이상(異相)과 괴상(壞相)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의상이 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은 정신은 괴로움을 인고해야 하는 사바세상에서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깨달음의 세상에로 중생들을 회향시켜 부처님의 환희와 행복이 중생들의 마음 속에 이미 있어 왔음을 알게 하려는 그런 다라니(dharani)의 신비한 주문을 시여하려는 마음과 같다. 그래서 그는 인간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신비한 힘을 가진 만달라(이하 도인이라 함)로서 그의 화엄사상을 표시하였다.

분석심리학자 융(Jung)은 이 만달라의 도형이 지니는 심리적 중요성을 가장 깊이 탐구한 사상가이리라. 그는 불교에서 표시해 온 만달라가 사실상에서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요구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저 만달라는 동서양의 구분을 넘어서 인간의 아픔이 치유받고자 원하는 무의식의 표현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인류의 신화나 꿈 속에 등장해 온 어린아기의 존재는 모든 가능성을 머금고 있는 씨앗이자 동시에 모든 가능성을 수용하는 빈 창고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만달라이고, 고대 그리스의 신화로서의 자웅동체(hermaphrodism)의 상징도 일종의 만달라이고, 달걀로서 표현되는 신화의 한 원형도 원융성(Vollst ndigkeit)의 만달라이고, 쉽게 얻기 어려운 보물들과 장미꽃, 진주, 금강석, 금달걀, 금잔과 그 받침 등도 그런 원융성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특히 원, 바퀴, 사각형, 십자가형, 접시위에 배열된 네개의 과일 등도 다 만달라의 가장 전형적인 모형이라고 한다. 융은 이 만달라는 불성(佛性)과 신성(神性)의 상징과 같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런 만달라를 환자들이 자주 꾸는 것은 환자들의 마음의 괴로움을 치유하기 위한 화평과 조화의 강한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부모가 이혼한 상태에서 괴로워하는 어린이에게 그런 꿈이 자주 나타나고, 또 어른의 경우에 성격상의 갈등과 심리적 부조화로 고통을 받는 신경증(neurosis)환자에게 흔히 만달라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만달라의 등장은 인간의 본성이 불성처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원융성의 평등무애함과 대자재함을 욕망하는 자기 치유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모든 가능성들을 다 용인하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넉넉한 허공의 비어있음(空)이나 바다(海)의 가득함과 유사하기에 그 중심이 비어 있는 그런 형태를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공의 비어있음과 바다의 넉넉함은 서로 은유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허공은 모든 사물들을 다 그 자리에 존재케 하는 종용(從容, Gelassenheit=letting be)의 의미를 띠고 있고, 바다는 짠맛이 중심과 변두리에서도 평등하고 모든 생명을 살게 하는 물을 보시해 주는 시원이면서도 그 물을 다 다시 수용하는 종착지이고 조금의 증감도 표시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허공은 무애하고 바다는 원융하다. 의상의 법계도가 ‘법(法)’자으로 시작해서 ‘불(佛)’자로 끝나는데, 그것은 법(法)의 허공같은 무애성과 불(佛)의 바다같은 원융성을 가리키면서 마음의 무애와 원융이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도(道)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그 법계도의 칠언 삼십구를 인용한다. 번역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조금씩 각각 다르다. 아마도 그것은 이 반시(盤詩; 槃詩)의 이해와 해석의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번역은 석우 스님의 《법성게강의》와 스티브 오딘(Steve Odin)의 〈화엄불교와 의상의 해인도(海印圖, Uisang’s Ocean Seal of Hua-yen Buddhism)〉를 많이 참조하였으나 다만 몇 군데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1) 법성은 원융하여 두 相이 없고 - 法性圓融無二相
2) 모든 법은 부동하여 본래 고요함이라 - 諸法不動本來寂
3)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일체가 끊어져 - 無名無相絶一切
4) 證智를 통해서 아는 바이지 다른 경계에 의해서가 아니네 - 證智所知非餘境
5) 진성은 매우 깊고 지극히 미묘하여서 - 眞性甚深極微妙
6) 자성을 지키지 않고 緣을 따라 이룸이라 - 不守自性隨緣成
7)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多中에 하나 있어 - 一中一切多中一
8) 하나가 곧 일체요, 多가 곧 하나이다 - 一卽一切多卽一
9) 한 티끌 속에 시방이 다 포함되어 있고 - 一微塵中含十方
10) 일체 티끌 가운데도 또한 그러하다 - 一切塵中亦如是
11) 무량한 오랜 겁이 곧 일념이요 - 無量遠劫卽一念
12) 일념이 곧 무량겁이다 - 一念卽是無量劫
13) 구세와 십세가 서로 交織하고 있으나 - 九世十世互相卽
14) 이에 혼란스럽지 않고 차이를 이룬다 - 仍不雜亂隔別成
15) 처음 발심함이 곧 정각이요 - 初發心是便正覺
16) 생사와 열반은 늘 더불어 교응하고 있다 - 生死涅槃常共和
17) 깨달은 진리와 여여한 사실는 깊이 상통하여 분별이 없으니 - 理事冥然無分別
18) 십불과 보현등 대인의 경계이다 - 十佛普賢大人境
19) 사람이 능히 해인삼매 속에 들어가면 - 能入海印三昧中
20) 자유자재로 不思議한 경계를 나타내리라 - 繁出如意不思議
21)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보배스런 비가 허공에 가득하니 - 雨寶益生滿虛空
22) 중생은 근기따라 이익을 얻는다 - 衆生隨器得利益
23)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성의 경계에 돌아 가려면 - 是故行者還本際
24) 망상을 쉬지 않고서는 그것이 얻어질 수 없네 - ?息妄想必不得
25) 걸림이 없는 좋은 방편을 뜻대로 얻으면 - 無緣善巧捉如意
26) 집에 돌아가 근기따라 자량을 얻으리라 - 歸家隨分得資糧
27) 이 다라니의 무진한 보배로서 - 以陀羅尼無盡寶
28) 법계를 실제의 보전으로 장엄하게 하여 - 莊嚴法界實寶殿
29) 마침내 진여인 중도의 자리에 앉으니 - 窮坐實際中道床
30) 옛부터 부동하여 온 것을 일컬어 부처라 하네 - 舊來不動名爲佛

이 법성게를 다시 의상이 《법계도》에서 말한 자술의 주해에 의하여 보면, 1구부터 18구까지는 자리행(自利行)을 다루고 있고, 다음 4구(19구∼22구)는 이타행(利他行)을 언급하였고, 나머지 8구(23구∼30구)는 수행자의 방편과 수행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관한 서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의 18구도 역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첫 4구(1구∼4구)는 증오(證悟)의 차원을 현시한 것이고(現示證分), 다음의 14구(5구∼18구)는 연기를 나타낸 차원(顯緣起分)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14구를 다시 세분하면 첫 2구(5구∼6구)는 연기의 본질를 지시한 것(指緣起體)이고, 다음의 2구(7구∼8구)는 다라니의 원리와 작용에 의거하여 법을 별별하면서 통합하였고, 그 다음 셋째로 2구(9구∼10구)는 사법(事法)에 의거하여 법을 밝히면서 통합하였고, 다시 다음의 4구(11구∼14구)는 세간의 시간에 의거해서 법을 알리면서 통합하였고, 그 다음의 2구(15구∼16구)는 수행의 위상에 의거해서 법을 밝히고 통합하였다.

또 그 다음의 2구(17구∼18구)는 위에서 열거된 의미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즉 상기의 6문(門)이 비록 동일하지는 않으나 다 연기의 다라니법을 표시한 것이다.3)3) Steve Odin, Process Metaphysics and Hua-yen Buddhism, 197쪽 참조,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Albany.

이상의 소개는 의상이 직접 그의 법성게를 해설해 주는 대목의 일부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법성게에 대한 우리의 철학적 관심은 더 나아가야 한다.

2. 도인(圖印)의 도형적 분석

위에 그려진 《법계도》의 도인과 그 게를 아울러 보면서 우리의 생각을 개진시켜 본다. 저 법성게의 철학적 해석은 곧 우리가 《법계도》의 도인과 게와 관련된 외형적 의미를 먼저 분석한 다음에 시도될 것이다. 의상(義湘)이 말한 바와 같이 법성게는 《법계도》의 중앙의 ‘법(法)’에서부터 출발하여 역시 중앙의 ‘불(佛)’자로 끝난다.

말하자면 그 법계도는 하나의 만달라이지만 그 안에 네 개의 작은 만달라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글은 우선 그 법성게가 출발하고 있는 좌측 하단의 만달라의 의미부터 뭉뚱그려 성찰해 보는 것으로 시작하자. 그 만달라는 법성에서 출발하여 게의 진행이 중심으로 말려 들어가다가 다시 바깥으로 펼쳐지고 있다. 《법계도》의 도인 안에 있는 네 개의 만달라가 다 각각 수렴과 전개의 두 방향을 머금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바라보는 쪽에서 먼저 좌측 하단의 도인과 그 게를 살펴보기로 하자.

법성이 원융하여 두 相이 없고(法性圓融無二相)/ 모든 법이 부동하여 본래 고요함이라(諸法不動本來寂)/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일체가 끊겨서(無名無相絶一切)/ 證智를 통해서 아는 바이지 다른 경계에 의해서가 아니네(證智所知非餘境)/ 진성은 매우 깊고 지극히 미묘하여서(眞性甚深極微妙)/
법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법성의 본질과 인식의 방편을 말한 다음에 그 법성이 진여의 본성인 진성에 다름 아님을 밝히고 있다. 법성과 진성은 같은 것이나 또한 다르다.

만약에 완전히 동일하다면 의상이 불필요한 동어반복을 진술한 셈이다. 법성과 진성은 같지만 다르다. 법성은 여여하게 존재하는 법의 존재론적 본질을 지시함이고, 진성은 그 여여한 존재의 법이 동시에 마음이 깨달은 진리의 본질로서의 진성과 다르지 않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여여하게 존재하는 법성의 본질이 마음의 깨달음에 의하여 진리화된 것이 진성이다. 그러므로 법성과 진성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고 우리가 말한다. 그러면 존재하는 법성이 도형 상에서 왜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수렴의 방향으로 진행할까?

그것은 존재의 법이 마음의 리(理)로 집약되는 그런 뜻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법계도 상에서 ‘진성이 매우 깊고 지극히 미묘하여서(眞性甚深極微妙)’의 구절이 저 만달라의 가장 안쪽의 오무려진 선상에 배열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하리라. ‘마음의 리(理)인 진성’은 가장 압축적으로 법성의 여여한 법을 수렴하고 있다고 읽어야 하리라. 그런데 그 진성의 리(理)는 자가성을 띤 실체가 아니고 법성의 본질인 공(空)의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으므로 자기 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없다.

그리하여 지키려는 자기 것이 없으므로 그 진성은 연기의 법으로 다시 바깥으로 펼쳐진다. 마음의 진리인 진성은 세상의 모든 것이 연기법으로 얽히고 설킨 것을 사실 그대로 비쳐주는 거울의 반영과 다르지 않다. 마음의 비어있음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여여하게 관조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마음이 자기의 업장으로 가득차 있으면 그것이 사실의 법을 그대로 보는데 장애를 일으킨다.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의 것에 몰입해 있으면 다른 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법성게는 안으로 수렴된 진심의 미묘함이 다시 세상의 인연에 따라 펼쳐지는 그런 방향을 취한다. 법성의 여여한 비어있음과 진성으로서 마음의 비어있음을 뜻하는 반야공(般若空)이 세상의 색법인 연기법으로 다시 펼쳐진다. 개공법(皆空法)은 연기법(緣起法)의 본질(體)이고 연기법은 개공법의 현상(相)이다.

법성은 진성으로 수렴되고 진성은 다시 연기의 색법으로서 세상에 전개된다. 이런 진행의 과정을 의상은 좌측 하단의 첫째 도인에서 좌측 상단의 두 번째 도인에로 연결되는 그런 통로로서 그리고 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다중에 하나가 있어(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요, 多가 곧 하나이다(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속에 시방이 다 포함되어 있고(一微塵中含十方)/ 일체 티끌 가운데도 그러하다(一切塵中亦如是)/ 무량한 오랜 겁이 곧 일념이요(無量遠劫卽一念)/ 일념이 곧 무량 겁이다(一念卽是無量劫)/ 구세와 십세가 서로 교직하고 있으나(九世十世互相卽)/ 이에 혼란스럽지 않고 차이를 이룬다(仍不雜亂隔別成)/

따라서 좌측 하단의 도인이 주로 법의 본질을 주로 언급한 특성을 안고 있다면, 좌측 상단의 도인은 법의 현상을 주로 언명한 구절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색법(色法)으로서의 연기는 일(一)과 다(多)의 관계를 상호간 상입상즉(相入相卽)의 가역성(reversibility)으로 오갈 수 있는 그런 관계로 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전체성과 많은 다양성이 서로 회통된다고 보는 것이 화엄의 진리고 그것을 의상이 좌측 상단의 도인에서 진술하고 있다.

그런 회통의 진리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다 적용됨을 의상이 그의 법성게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런 법의 연기 현상을 명시하는 색법이 안으로 말려들어 가면서 역시 일념(一念)의 마음에로 두 번째의 도인이 수렴되고 있다. 이 일념에서부터 다시 무량의 시간에로 법의 연기가 바깥에로 펼쳐지면서 세상의 모든 시간이 구세로 나누어지고 또한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시간이 혼란하지 않고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언명으로서 좌측 상단의 도형이 끝나면서 다음의 우측 상단의 도형에로 자신을 넘기고 있다. 연기법이 시공으로 설명되면서 ‘마음의 일념(一念)’에로 수렴되면서 그것이 가운데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다시 그 일념이 무량의 시간에로 전개되어 바깥으로 펼쳐진다.

처음 발심이 곧 정각이요(初發心是便正覺)/ 생사와 열반은 늘 더불어 교응하고 있다(生死涅槃常共和)/ 깨달은 진리와 여여한 사실는 깊이 상통하여 분별이 없으니(理事冥然無分別)/ 十佛과 普賢 등 대인의 경계이다(十佛普賢大人境)/ 사람이 능히 해인삼매에 들어가면(能入海印三昧境)/ 자유자재로 不思議한 경계를 나타내리라(繁出如意不思議)/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보배스런 비가 허공에 가득하니(雨寶益生滿虛空)/ 중생은 근기따라 이익을 얻는다(衆生隨器得利益)/

이처럼 둘째 도인에서 셋째 도인에로 넘어감에서 앞에서 거론된 법성과 진성의 본질과 그 법의 현상으로서의 연기의 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를 밝힌 다음에 의상은 그런 반야공법과 연기법이 다 우리 각자의 이익을 위한 것임을 우측 상단의 만달라에서 천명한다.

그런 법이 존재하고 그 법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져 있어도 그 법을 내가 욕망하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그림 속의 떡처럼 나의 주린 배를 채워 주지 못한다. 내가 욕망해야 한다. 통상 욕망의 개념을 불가에서는 너무 금기시 해왔다. 부처님이 되시기 위하여 싯달다 태자가 출가한 것은 욕망이 아닌가? 스님들이 불성의 행복을 찾기 위하여 출가하신 것은 욕망이 아닌가? 욕망을 소유적 욕망으로서의 욕심과 너무 동격으로 봐서는 안되리라. 욕망이 완전히 말라버린 인간은 이미 다 타버린 죽은 재와 같다.

우리가 여기서 자세히 논할 시간이 없지만 욕망은 인간의 아뢰야식의 능연심(能緣心)과 같은데 그 능연심이 소유의 이기적 욕망에로 흐르기도 하고, 존재의 공동적 욕망에로 흐르기도 한다. 욕망은 곧 이익을 찾아 떠난다. 그런데 그 이익 중에서 인간의 본능이 좋아하는 이기적 이익도 있고, 인간의 본성인 불성이 좋아하는 이익도 있다. 이 불성이 좋아하는 이익은 같이 존재함의 기쁨을 노래하는 이익이다. 그래서 불성이 찾는 이익은 처음의 출발은 자리적이지만, 기실 그것은 이타적이기도 하다.

이제 우측 상단의 도인은 초발심의 자리적 욕망에서 그 화엄적 진리를 의상이 설파하는 것을 알려준다. 내가 본성의 이익을 찾아 떠나겠다는 그 초발심의 마음이 바로 보리를 깨달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소유적 만족과 그 이익을 위하여 법을 찾지 않고 존재의 본성에 이익이 되는 길을 발견하는 것만이 번뇌와 괴로움의 마음을 벗어나는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초발심의 시각(始覺)은 이미 자리의 욕망이나 그 욕망이 동시에 바로 이타적 보살심이 표현하고 있는 중생제도의 욕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그 시각(始覺)은 곧 본각(本覺)의 정각(正覺)과 동거하고 있다. 이 자리와 이타의 동거성에 대해서 우리가 뒤에서 다시 성찰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도형상의 법성게의 흐름을 인식하는 수준에서 그치기로 하자.

자리적 욕망의 열매인 시각과 이타적 욕망의 마음인 본각이 동거하고 있기 때문에 자리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생사와 중생제도의 이타적 욕망(大願意)을 갖는 보현보살의 열반이 서로 교응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각자가 먼저 행복의 기쁨에서 존재하기 위하여 그 법을 욕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욕망해야 한다는 당위의 어법은 여기서 적절하지 않다.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 즉각 우리의 마음은 그 길로 나아간다. 행복을 아는 것이 곧 거기에로 향하는 욕망을 잉태하기에 화엄의 진리를 우리가 알기만 하면 그 쪽으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간다.

그러므로 보리의 지혜는 마음의 리(理)와 세상의 사(事)로 이원화되는 것이 아님을 의상이 조명한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이원적으로 갈라지지 않듯이, 마음이 깨달은 이치와 세상의 여여한 사실이 이원적이 아님을 아는 이가 바로 십불(十佛)이고 보현보살이라는 것이다. 십불은 정각에 이른 부처님의 열가지 경계를 기술한 개념이다. 이것을 우리가 뒤에서 논할 것이다. 이런 십불과 보현보살의 경지가 다시 안으로 향하여 말려 들어가고 있다.

중생의 자리적 구도의 욕망이 바로 보현보살의 보살도와 동거하고 있다는 그런 법이 십불과 보현보살의 마음으로 접목되면서 셋째 도인은 다시 ‘해인삼매의 마음’으로 집약된다. 해인 삼매에 이른 마음이 다시 바깥으로 펼쳐지는 길을 가면서 의상은 화엄의 진리가 바로 우주의 허공에 미만된 생명의 감로수인 보배스런 비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중생들이 각각 그들의 근기에 따라 행복의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런 메시지가 다시 우측 하단인 넷째의 도인에로 미끄러진다. 허공에 가득찬 비의 감로수는 달리 표현하면 부처님의 비어 있는 마음의 감로수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성의 경계에 돌아가려면(是故行者還本際)/ 망상을 쉬지 않고서는 그것이 얻어질 수 없네(?息妄想必不得)/ 걸림이 없는 좋은 방편을 뜻대로 얻으면(無緣善巧捉如意)/ 집에 돌아가 근기따라 자량을 얻으리라(歸家隨分得資糧)/ 이 다라니의 무진한 보배로서(以陀羅尼無盡寶)/ 법계를 실제의 보전으로 장엄하게 하여(莊嚴法界實寶殿)/ 마침내 진여인 中道의 자리에 앉으니(窮坐實際中道床)/ 옛부터 부동하여 온 것을 일컬어 부처라 하네(舊來不動名爲佛)/

출처 : 연어알
글쓴이 : 북극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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