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신심명

똥하 2011. 11. 29. 10:54

선종의 제3조 감지승찬(鑑智僧璨)은 도선(道宣)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존재가 의심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문헌을 살펴 본 결과 남북 계통의 문헌에 승찬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이 확증되었다.
『보림전(寶林傳)』 권8에 기록되어 있는 방관(房琯)의 비문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승찬의 향관(鄕貫)과 족성(族姓)은 명료하지 않지만 처음 업도의 주변에서 혜가(慧可)에게 참하여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승찬은 건덕 4년(574)에 행해진 북주파불(北周破佛) 무렵 혜가를 따라 서주(舒州) 완공산(完公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5년 후에 혜가가 다시 업도로 돌아갔을 때 승찬은 업도에 가지 않고 서주(舒州) 사공산(司空山:安徽省 太湖縣 서북 방향)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24년 동안 머물렀다. 개황 12년(592)에 도신(道信)을 만나 법을 물려주고 남방의 나부산(羅浮山)으로 자리를 옮겨 3년 동안 머문 후에 완공산에 돌아와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입적했다.
<보림전>에서는 승찬의 입적을 수 양제 대업 2년(606)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

대종황제 태력 7년(772)에 독고급(獨孤及)의 주청에 의하여 경지선사(境智禪師:鑑智禪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전은 각적(覺寂)이라 하였다. 방관의 비문에 따르면 승찬은 천성이 유마와 같아서 지극히 호방불패(豪放不覇)했다 한다.
승찬에게는 4언 2구로 된 73게송 624자의 『신심명』이 있다.
처음 부분의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唯嫌揀擇)과 말미의 신심불이(信心不二) 불이신심(不二信心)이라는 구절은 한 편의 강요(綱要)를 보여주고 있다.

본 편은 화엄사상의 교의로서 일심불생(一心不生)으로 일체를 포용하여 유즉무(有卽無) 무즉유(無卽有)하고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의 무애자재한 실천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여래장사상으로서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정신(正信)이 제대로 드러나고 일체에 머물지 않으면 집착할 바가 없다.(狐疑盡淨 正信調直 一切不留 無可記憶)〕는 내용도 들어 있다.

신심불이(信心不二)의 심(心)은 곧 우리들이 본래부터 구족한 심성인 동시에 개개인에게 원성(圓成)되어 있는 불심을 가리킨다. 신심을 포괄한 능통일(能統一)의 일심으로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을 의미한다. 달마의 이입사행(二入四行) 가운데 이입(理入)의 취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달마의 이입은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깨닫는 것이다. 중생은 성인과 동일한 진성(眞性)을 지니고 있음을 심신(深信)하는 것이다(理入者 謂藉敎悟宗 深信含生凡聖同一眞性)>라는 입장인데 승찬의 관점도 이와 같은 것이다.

 
<신심명>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을 꺼릴 뿐.
증오와 애욕만 없으면 훤칠하게 드러난다.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털끝만치라도 차이가 생기면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생기니
도를 현전에서 터득하고자 하거든 순경이나 역경을 두어서는 안 된다.

違順相爭 是爲心病 不識玄旨 徒勞念靜
어기고 따르면서 서로 다투면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어
현묘한 뜻도 모르고 공연히 번뇌만 그치려 한다.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有取捨 所以不如
태허처럼 원만하여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여여하지 못한다.

莫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세간의 인연도 따르지 말고 제법개공의 도리에도 머물지 말라.
한결같이 마음을 평등하게 지니면 연(緣)과 공(空)이 저절로 없어진다.

止動歸止 止更彌動 唯滯兩邊 寧知一種
움직임을 그치고 고요하고자 하면 고요가 다시 더욱 크게 움직여
움직임과 고요의 양변에 막히게 되니 어찌 한결같을 수 있겠는가.

一種不通 兩處失功 遣有沒有 從空背空
한결같음으로 일관하지 않으면 움직임과 고요함의 공덕을 잃게 되니
유(有)를 부정하면 유(有)에 빠지고 공(空)을 따르면 공(空)을 등지게 된다.

多言多慮 轉不相應 絶言絶慮 無處不通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진리에) 상응치 못하니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못할 곳이 없다.

歸根得旨 隨照失宗 須臾返照 勝却前空
근본을 향하면 종지를 얻고 현상을 따르면 종지를 잃으니
잠시라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위의 공(空)보다 뛰어나게 된다.

前空轉變 皆由妄見 不用求眞 唯須息見
위의 공(空)이 전변(轉變)하는 것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참됨도 구하려 말고 오직 망견을 쉬어야 한다.

二見不住 愼莫追尋 才有是非 紛然失心
분별하는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지도 말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내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게 된다.

二由一有 一亦莫守 一心不生 萬法無咎 無咎無法 不生不心
허물과 법의 둘은 한 마음에서 생기게 되니 그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한 마음 내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허물이 없고 법도 없으면 허물도 나지 않고 마음도 없다.

能隨境滅 境逐能沈 境由能境 能由能境
주관은 객관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 따라 없어지니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 되고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 된다.

欲知兩段 元是一空 一空同兩 齊含萬象 不見精  寧有偏黨
양단을 알고자 하는가. 원래 동일한 공(空)이다.
동일한 공(空)은 둘 다 똑같아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세밀하고 거칠음이 따로 없으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大道體寬 無易無難 小見狐疑 轉急轉遲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지만
좁은 견해로 의심을 내니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진다.

執之失度 必入邪路 放之自然 體無去住
대도에 집착하면 법도를 잃어 반드시 삿된 길에 빠지게 되고
대도마저도 놓아 버리면 자연스러워 본체에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

任性合道 逍遙絶惱 繫念乖眞 昏沈不好 不好勞神 何用疎親
자성에 맡기면 도(道)에 계합하고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망념에 얽매이면 진(眞)에 어긋나고 혼침하여 여의치 못하게 된다.
여의치 못하면 정신이 피곤하니 어찌 친(親)과 소(疎)를 알겠는가.

欲趣一乘 勿惡六塵 六塵不惡 還同正覺
일승에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멀리하지 말라.
육진을 멀리하지 않으면 그것이 정각(正覺)과 같다.

智者無爲 愚人自縛 法無異法 妄自愛著 將心用心 豈非大錯
지혜로운 이는 걸림이 없으나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얽매인다.
법은 다른 법이 없으나 망령되게 스스로 애착하여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알려고 하니 어찌 크게 그릇되지 않으랴.

迷生寂亂 悟無好惡 一切二邊 良由斟酌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나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다.
일체의 분별하는 견해는 자못 억지 짐작 때문이다.

夢幻虛華 何勞把捉 得失是非 一時放却
몽환(夢幻)과 허화(虛華)를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득실과 시비를 일시에 놓아 버려라.

眼若不睡 諸夢自除 心若不異 萬法一如
만약 눈에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만약 마음이 한결같으면 만법이 일여하게 된다.

一如體玄 兀爾忘緣 萬法齊觀 歸復自然
일여하게 본체가 현묘하면 올연히 반연을 잊고
만법이 그대로 현전하여 자연으로 돌아간다.

泯其所以 不可方比 止動無動 動止無止 兩旣不成 一何有爾
그 까닭을 없애고 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다.
고요하면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면 고요해도 고요하지 않다.
고요와 움직임이 없으니 하나인들 어찌 있겠는가.

究竟窮極 不存軌則 契心平等 所作俱息
구경과 궁극은 일정한 법칙이 없고,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하면 능과 소가 모두 없다.

狐疑盡淨 正信調直 一切不留 無可記憶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정신(正信)이 제대로 드러나고
일체에 머물지 않으면 집착할 바가 없다.
虛明自照 不勞心力 非思量處 識情難測.
텅 비도록 저절로 비추어지면 애써 마음 쓸 일 없다.
비사량처는 분별사식(分別思識)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眞如法界 無他無自 要急相應 唯言不二
진여법계는 나와 남이 없으니
그것을 알려고 하나 그것은 불이(不二)의 도리일 뿐.

不二皆同 無不包容 十方智者 皆入此宗
불이(不二)는 모두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으니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지를 깨친다.

宗非促延 一念萬年 無在不在 十方目前
종지에는 길고 짧음이 없으니 한 생각이 곧 만년이요
있거나〔在〕 있지 않음〔不在〕이 없으니 시방이 바로 눈앞에 있다.

極小同大 忘絶境界 極大同小 不見邊表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으니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다.

有卽是無 無卽是有 若不如此 必不須守
유(有)가 곧 무(無)요 무(無)가 곧 유(有)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但能如是 何慮不畢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이와 같이 알면 어찌 지도(至道)를 마치지 못할까 걱정하랴.

信心不二 不二信心 言語道斷 非去來今
신심(信心)은 곧 불이(不二)이고 불이(不二)는 곧 신심(信心)이니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고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으로 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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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강해


1.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지극한 도(道)란 곧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말합니다. 이 무상 대도는 전혀 어려운 것이 없으므로 오직 간택(揀擇)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간택이란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말함이니,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극한 도는 양변(兩邊), 즉 변견(邊見)에 떨어져 마침내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간법(世間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니며, 마구니(魔軍)를 버리고 불법을 취해도 불교가 아닙니다. 무었이든지 취하거나 버릴 것 같으면 실제로 무상대도에 계합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불법을 바로 알고, 무상대도를 바로 깨치려면 간택하는 마음부터 먼저 버리라 한 것입니다.

2.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

미워하고 사랑하는 이 두 가지 마음만 없으면 무상대도는 툭트여 명백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는 좋아하고 마구니는 미워하며, 불법을 좋아하고 세간법은 미워하는 증애심(憎愛心)만 버리면 지극한 도는 분명하고 또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간택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즉 증애심입니다. 이 증애심만 완전히 버린다면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이상의 네 귀절이 바로 [信心銘]의 근본 골자입니다. 이제 정맥으로서 낭야 각(瑯揶覺)선사라는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에게 어느 재상이 편지로 "신심명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서 지극한 보배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자세한 주해(註解)를 내려주십시요"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낭야 각선사가 답하기를 '至道無難이요 唯嫌揀擇이니 但莫憎愛하면 洞然明白이라'하는 첫 귀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뒷 귀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여버렸습니 다. 그렇게 한 뜻이 무엇일까요? [신심명]의 근본 골수는 크게 쓴 귀절 속에 다 있으므로 이 귀절의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귀절들은 모두 이 귀절의 주해일뿐, 같은 뜻만 바로 알면 나머지 귀절들은 모두 이 귀절의 주해일뿐,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낭 야각선사가 앞 네 귀절만 크게 쓰고 뒤절은 주해로 써서 답장한 이것은 [신심명]에 대한 천고의 명 주해로서, 참으로 걸작이라는 평을 듣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신심명]을 바로 알려면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증애심만 떠나면 중도정각 (中道正覺)입니다. 대주스님은 [돈오입도요문(頓悟入道要門)]에서 증애심이 없으면 두 성품이 공하여 자연히 해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네 귀절이 [신심명]의 핵심이고 뒷 귀절들은 주해의 뜻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사이로 벌어지나니 /毫釐有差하면 天地懸隔하나니

"지극한 도는 어렵지않다. 취하고 버리는 마음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버리라"고 하니, "아 그렇구나, 천하에 쉽구나!" 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뜻을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쉽다는 것은 간택심 증애심만 버린다면 중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성불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무상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만, "이 간택심을 버린다, 증애심을 버린다"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뜻을 털끝만큼이라고 어긋나게 되면 하늘과 땅 사이 만큼이나 벌어진다고 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4. 도가 앞에 나타나길 바라거든 따름과 거슬림을 두지 말라. /欲得現前이어든 莫存順逆하라

"무상대도를 깨우치려면 따름(順)과 거슬림(逆)을 버리라"한 것입니다. '따름'과 '거슬림'은 상대법으로서, 따른다 함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거슬린다 함은 싫어한다는 것이니, 이는 표현은 다르나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데, 지극한 도를 얻으려면 따름과 거슬림의 마음을 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5. 어긋남과 다름이 서로 다툼은 이는 마음의 병이 됨이니 /違順相爭이 是爲心病이니

어긋난다, 맞는다 하며 서로 싸운다면, 이것이 갈등이 되고 모순이 되어 마음의 병이 된다는 말입니다.


6.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공연히 생각만 고요히 하려 하도다. /不識玄旨하고 徒勞念靜이로다

"참으로 양변을 여읜 중도의 지극한 도를 모르고 애써 마음만 고요히 하고자 할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도를 성취하려면 누구든지 가만히 앉아서 고요히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읍니다. 이 대도(大道) 라는 것은 간택심(揀擇心) 증애심(憎愛心) 순역심(順逆心)을 버리면 상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을 억지로 고요하게 해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분주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안된다고 하니 그러면 분주하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혹 생각할는지 모르지만,움직임과 고요함 이 두 가지가 다 병으로서 움직임이 병이라면 고요함도 병이고 어긋남이 병이라면 맞음도 병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두가 상대적인 변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대를 버려야 대도에 들어가게 됩니다.

7.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거늘 /圓同太虛하야 無欠無餘어늘

"지극한 도는 참으로 원융하고 장애가 없어서, 둥글기가 큰 허공과 같다"고 하였읍니다. 즉 융통자재하여 아무런 걸림이 없음을 큰 허공에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음도 없읍니다. 지극한 도란 누가 조금이라도 더 보탤 수 없고 덜어낼 수도 없어 모두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바로 깨칠 뿐 증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지극한 도가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8. 취하고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까닭에 여여하지 못하도다. /良由取捨하야 所以不如라

"지극한 도는 취하려 하고, 변견은 버리려하는 마음이 큰 병이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변견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나도 할수 없어서 중도를 많이 얘기하지만, 그 말을 듣고 중도를 취하려 하고 변견을 버리려 하면 이것이 큰 병이라는 뜻입니다. 혹 변견은 취하고 중도를 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병은 마찬가지로서 무엇이든지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큰 병입니다. 대도에는 모든 것이 원만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라고 남는 것이없지만, 우리가 근본 진리를 깨치지못한 것은 취하고 버리는 마음, 즉 취사심 (取捨心)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중생을 버리고 부처가 되려는 것도 취사심이며, 불법을 버리고 세숙법을 취하는 것도 취사심으로서 모든 취하고 버리는 것은 다 병입니다. 때문에 "취사심으로 말미암아 여여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여한 자성'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취사심을 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9.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莫逐有緣하고 勿住空忍하라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 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 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 일도 좇아가지 말고 출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함에 머물면 이것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 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0.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一種平懷하면 泯然自塵이라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 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11.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옴직임이 되나니 /止動歸止하면 止更彌動하나니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둘아가려 하면, 고요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 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 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텐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리도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12.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唯滯兩邊이라 寧知一種가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3. 한 가지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 다 공덕을 잃으리니 /一種不通하면 兩處失功이니

'일종(一種)',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자성(眞如自性)에 통하지 못하면 양쪽의 공덕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14.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 /遣有沒有요 從空背空이라

이 구절은 참으로 깊은 말씀입니다. 현상(有)이 싫다고 해서 현상을 버리려고 하면 버리려 하는 생각이 하나 더 붙어서 더욱 현상에 빠지고, 본체(空)가 좋다하여 공을 좇아가면 본체를 더욱 등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공이란 본래 좇아가거나 좇아가지 않음이 없는 것인데, 공을 따라갈 생각이 있으면 공과는 더욱 등지게 된다고 하였읍니다. 현상을 버리고서 공을 따르려고도 하지 말며, 반대로 본체를 버리고서 현상을 따라 가려고도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양변이며 취사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취사심을 버려야만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15. 말아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치 못함이요 /多言多慮하면 轉不相應이요

이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설명하고 거듭 설명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래 대도란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 것(言語道斷 心行處滅)'입니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도(大道)가 이와 같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려 하다가는 대도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16.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않는 곳 없느니라. /絶言絶慮하면 無處不通이라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곳이 없어진'곳에서는 자연히 대도를 모를래야 모를 수 없읍니다. 그렇다고 '말과 생각이 끈어진' 여기에 집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통하지 않아 아주 모르게 됩니다. 이 '말과 생각이 끊긴것'은 그 자취마저 없는 데서 하는 말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 경지에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읍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이 끊어진 곳'에 집착하면 전체가 막히고 맙니다. 여기서도 근본은 취사심을 버려야 대도를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17.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취를 잃나니 /歸根得旨요 隨照失宗이니

자기의 근본 자성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어 무상대도를 성취하고, '비춤을 따른다(隨照)'는 것은 자기 생각나는 대로 번뇌망상 업식망정을 자꾸 따라가면 근본 대도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18.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함보다 뛰어남이라 /須臾返照하면 勝却前空이라

잠깐 동안에 돌이켜 비춰보고 자성을 바로 깨치면 '공했느니 공하지 않느니'한 것이 다 소용없는 꿈같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19.앞의 공함이 전변함은 모두 망견 때문이니 /前空轉變은 皆由妄見이니

앞에서의 공함이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견해(妄見)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18공(十八
空) 20공(二十空) 등 여러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중생이 못 알아듣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 뜻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공이 어떻게 옮겨 변할 수 있겠습니까? 공함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하게 된 것은 중생의 망견(妄見) 때문이며 진공(眞空)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20. 참됨을 구하려 하지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不用求眞이요 唯須息見이라.

누구든지 깨치려면 진여본성을 깨치려 하지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빛나듯 태양을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망상의 구름만 걷어 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부처님과 같은 자성청정한 진여본성을 다 갖추고 있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여자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도 망견이 앞을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이니, 망견만 쉬어버리면 진여자성을 달리 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견이란 무엇일까?
21.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二見不住하야 愼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 시비 증애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22.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才有是非하면 紛然失心이니라

갓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23.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二由一有니 一亦莫守하라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하나마저도 버리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알았다 해도 중도가 따로 하나로 하나 때문에 둘이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고 버려라, 곧 중도마저도 버리라 하였습니다. 중도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억지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


24.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법이 허물 없느니라. /一心不生 萬法無咎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만법이 원융무애하여,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융통자재를 말한 것으로서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무장애법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어디서 성립되느냐 하면 바로 양변을
여읜 중도에서 성립됩니다. 즉 시비심의 두 견해를 버리고, 하나마저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생각도 나지
않고 일체 만법에 통달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져 일체에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25.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無咎無法이요 不生不心이라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있어서 원융무애한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이 경지는 허물도 법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물도 변(邊)이며, 법도 변이고, 나는것도 변이며, 마음이라 해도 변입니다. 이 모두가 없으면 중도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26. 주관은 객간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能隋境滅하고 境逐能沈하야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고 객관은 주관을 좇아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27.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境由能境이요 能由境能이니

객관은 주관 때문에, 주관은 객관 때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이 없으면 개관이 성립하지 못하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병이므로 주관 객관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28. 양단을 알고지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欲知兩段인댄 元是一空이라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두가지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전체가 한 가지로 공(空)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관도 객관도 찾아불 수 없는 것이 근본 대도인데. 주관 객관을 따라간다면 모두가 생멸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만 대도에 들어어게 되는데, 양단(兩段)이 모두 병이고 허물이므로 이것을 바로 알면 젙체가 다 공했더라는
것입니다. '공했다'는 것은 양변을 여읜 동시에 진여가 현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공했다고 한 그 하나의 공은 말똑처럼 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29. 동일한 공(空)은 둘 다 똑같아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一空同兩 齊含萬象


30.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不見精추 寧有偏黨

앞 구절에서 '하나의 공'이란 공공적적(空空寂寂)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으므로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가 중도 아님이 하나도 없읍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중도 아님이 없으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멸이 벌어진다고 하니 어떤 실제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이 벌어져 드러났다 하여도 거기에 세밀함과 거칠음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이 곧 공이 아니며 공 아님이 곧 공이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여전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산이라느니 물이라는 생각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다는 등 이러한 견해가 있으면, '한 가지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쌍차쌍조 (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한 무장애법계에 있어서는 세밀함과 거칠음을 불 수 없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상이 다 떨어져 원융무애하고 대자재한 것을 말한 것이지, 세밀함과 거칠음이나 편당(偏黨)을 가지고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세밀함과 거칠음에 기우는 편당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도리는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31. 대도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大道體寬하야 無易無難이어늘

무상대도는 그 본바탕이 넓기로는 진시방무진허공(盡十方無盡虛空)을 여러 억천만개를 합쳐 놓아도 그 속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이같은 무변허공(無邊虛空)이라 해도 실제로는 이 자성에다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대도의 본체는 바탕이 넓다'고
한 것으로서 무궁무진하고 무한무변한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대도의 본체는 넓어서 어려움도 없고 쉬움도 없다'한 것은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으므로 조금도 어렵다거나 쉽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스스로 원만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대법이든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공부해서 성춰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대도를
성취하려면 참으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므로 쉬운 것도 역시 아니라는 말입니다. 곧 쉽다, 어렵다 하는 것은 모두 중생이 변견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는 대도를 모르고 하는 말이므로 이러한 쓸데없는 지견(知見)은 모두 버려
라 하는 것입니다.
32.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지도다. /小見이 狐疑하야 轉急轉遲로다

조그만한 견해로 여우처럼 자꾸 의심하면서 급하게 서둘면 더욱 더디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 져 있는데, 이를 자꾸 가깝게 하려 하면 더욱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므로, 누구든지 대도를 성취하려면 쉽다는 생각도 내지 말고 어렵다 는 생각도 내지 말며, 급한 생각도 더디다는 생각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쉽다 어렵다 급하다 더디다 하는 등이 모두가 변 견으로서 취사심(取捨心)이기 때문입니다. 어러한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33.집착하면 법도를 잃음이라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고 /執之失度 必入邪路

대도나 중도나 또는 다른 뭐라고 하든지, 이를 집착하면 병이 됩니다. 누구든지 중도를 성취하고 부처를 이루려면 집착하는 병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착이 없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한 사람이며, 집착이 있는 사람은 대도를 성취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병이 있으면 법도를 잃고 근본 대도와는 어긋나서 반드시 삿된 길, 즉 변견에 떨어지게 됩니다.


34. 놓아 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放之自然이니 體無去住라

집착을 놓아 버리면 모두가 자연히 현전하며, 본체는 본래 가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머무름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으면 머무는 것이 있읍니다. 그러나 대도는 본래 원만구족하여 머무름과 가는 것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착하는 생각만 완전히 놓아버리면 자연히 대도를 성취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변견인 취사심을 버려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5. 자성에 맡기면 도에 합하여 소요하여 번뇌가 끊기고 /任性合道하야 逍遙絶惱하고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자기의 자성을 따라서 그대로 도에 합합니다. 이는 마치 구슬이 쟁반에서 구르듯이 힘 안들이고 마음대로 활동하여 아무런 장애도 없읍니다. 소요(逍遙)란 한가롭고 자재한 기상을 말하는데, 일체 번뇌망상이 다 떨어 졌다는 뜻입니다.

36.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繫念(계념)하면 乖眞하야 昏沈이 不好니라

우리가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대도가 현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러나 일반적으인 번뇌망상은 그만두고, 대도 중도 부처라는 등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생각이 얽매이면 바로 진리와는 어긋나므로, 중도도 깨져 버리고 부처도 죽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처라는 생각과 중도라는 생각, 참되다는 생각 등 어떤 생각이든지 이런 생각이 추호라도 마음에 남는다면 근본은 모두 깨지고 맙니다. 이처럼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 했다 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멍텅구리처럼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각에 얽매여도 병이고, 혼침해도 병이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7.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건가. /不好勞神커든 何用疎親가

쓸데없이 정신을 쓰지 말아라, 정신을 쓰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어찌 성김과 친함을 쓸까보냐'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김이란 멀리한다는 뜻이니 세간법과 악을 버림이고, 친함이란 가까이한다는 뜻으로서 세간법과 악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려 하지도 말며,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리하여 양변 변견을 버리지도 취하지도 않을 때,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38.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欲趣一乘이어든 勿惡六塵하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일승(一乘)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하려거든 객관의 대상인 육진을 버리지 말며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진을 이대로가 전체로 진여대용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육진이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육진이 아니라 진여대용(眞如大用)의 육용(六用)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집착심을 가지면 육진이 되고 눈 밝은 사람이 바로 쓰면 육용(六用)으로서 진여의 대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진을 버리고서 어찌 무상대도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말입니다.


39.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동일함이라 /六塵을 不惡하면 還同正覺이라

진여대용(眞如大用)인 육진(六塵:色聲香味觸法)을 미워하지 않으면 바로 정각(正覺)이라는 말입니다. 육진을 버리고 정각을 성취하려는 사람은 마치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육진을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40.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智者는 無爲어늘 愚人은 自縛이로다

지혜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읍니다. 왜냐하면 대도가 현전하여 버릴래야 버릴 것이 없고 취할래야 취할 것이 없는데, 무슨 할 일이 있겠읍니까? 잘 모르는 사람은 공연히 취하려고 애쓰며 버리려고 고생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근본 대법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취사심에 묶여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지옥으로 갔다 극락으로 갔다 하며 온갖 전도(顚倒)를 거듭합니다. 그러면 '본래 스스로 함이 없다(本自無爲)'고 하여 손도 꼼짝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것도 무위법에 떨어진 것이 됩니다. '함이 없다(無爲)'고 했지만 실제는 함이 없는 것을 찾아 볼수도 없고 중도를 깨쳐도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구경에서 하는 말이지, '함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41.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法無異法이어늘 妄自愛着하야

법은 다른 법이 없어서 중생이 생각하고 집착할 특별한 법이 없는데, 공연히 스스로 애착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세법을 버리고 불교를 해야겠다, 교학을 버리고 참선을 해야겠다, 반대로 참선하면 무슨 소용있나, 교(敎)나하지 하는 것 등이 모두 애착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선이니, 교니, 중생이니, 부처니, 마구니니 하는 분별들은 모두 망견인 변견으로서 애착심입니다, 그러니 그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42.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將心用心 豈非大錯(기비대착)

'쓸데없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고 있으니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고 보면 우리가 성불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하려고 애를 쓰고, 경을 배우려고 애를 쓰는 것 전부가 마치 머리위레 머리 하나를 더 얹으려는 것과 같읍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서 그 진여광명이 일체에 현성(現成)해 있으므로,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고 숨을래야 숨을 수도 없읍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으로 잡으려 하고 성취하려고 하면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만, 그러나 깨쳤다는 생각도 병입니다. 더구나 깨치지 않았다면 참으로 집착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므로, 깨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고서는 광명을 불 수 없듯이 깨치지 못하면 밤낮으로 현저한 이 진여광명을 절대로 볼 수 없읍니다.

43.미흑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迷生寂亂이요 悟無好惡어니

미혹할 때는 고요함과 혼란함이 생기나 깨치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감정은 취사심이므로 미혹할 때는 집착심이 있지만 깨치면 취사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44.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一切二邊은 良由斟酌(양유짐작)이로다

모든 치우친 두 가지 견해, 즉 양변을 다 버려야만 무상대도인 일승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우리가 쓸데없는 생각과 계교심을 일으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법에는 양변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음으로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분별을 내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짐작인 취사심만 버리면 전체가 현전하여 대도(大道)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45. 꿈 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夢幻空華 何勞把捉(하로파착)

'꿈 속의 허깨비와 헛꽃'은 일체의 변견을 말합니다. 성불하려는 것도 꿈 속의 불사(佛事)이니, 성불한다는 것도 중생 제도한다든지
하는 것도 모두 꿈이며 헛꽃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생각과 불법이니 세법이니 하는 것도 다 놓아 버려야 하는데, 왜 이를 잡으려고 애를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46.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得失是非 一時放却

잘잘못과 옳고 그름 모두가 변견이니, 이러한 양변을 완전히 버리면 중도가 현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47.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眼若不睡면 諸夢自除요

누구든지 잠을 자지 아니하면 꿈은 없는 것입니다. 꿈은 누구든지 잠을 자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49.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모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一如體玄 兀爾忘緣(올이망연)

'일체 만법이 여여하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현모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제로 알 수는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건가(釋迦猶未會어니 迦葉豈能傳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에게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50.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萬法齊觀 歸復自然

'만법제관(萬法齊觀)'이란 일체만법을 환히 다 본다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지만, 일체만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되고 맙니다. 귀복(歸復)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51. 그 까닭을 없이 하여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泯其所以 不可方比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 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2.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止動無動 動止無止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법으로서 여기서는 먼저 이 두 상대법을 서로 긍정한 다음에 두 법을 부정하였읍니다(照而遮). 그치면서 움직인다(止而動) 함은 그침과 움직임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융통자재하게 살아나는 동시에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말하였고, 움직이면서 그친다(動而止) 함은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상통(相通)하는 동시에 그침이 없음(無止) 을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그침의 양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다시 두 법을 긍정하여 서로 융통자재하게 쓸 수 있는 중도정의(中道正義)를 여기서도 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照) 없애 버림으로써(常寂) 비치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 고요하면 항상 비치는(寂而常照) 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먼저 비춰서 막고(照而遮) 뒤에 막아서 비춘다(遮而照)는 순서만 달리하였을 뿐, 막음과 비춤을 함께 한(遮照同時) 중도 정의는 다름이 없읍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통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읍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읍니다.


53.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兩旣不成이라 一何有爾아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법이기 때문에 움직임과 그침을 모두 버리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읍니까? 하나까지도 없어져야 둘이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인들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54. 구경하고 궁극하여서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究竟窮極하야 不存軌則이요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중도를 성취하면 거기서는 중도라 할것도 찾아불 수 없읍니다. 이것이 구경하고 궁극한 법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법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칙이 없다 해서 단멸(斷滅)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전한 진여대용이 자유자재하고 호호탕탕하여 법을 마음대로 쓰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55.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契心平等하야 昭作이 俱息이로다

내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조금도 차별 망견을 찾아불 수 없고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물이 산 위로 솟아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산은 산 그대로 높고 물은 물 그대로 깊은데, 그 가운데 일체가 평등하고 여여부동함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쉰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바로 일체 변견을 다 쉬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56.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면 /狐疑가 淨盡하면 正信이 調直이라

자기의 일체 변견과 망견을 다 버리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이 화살같이 곧게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正信)이란 신(信) 해(解) 오(悟) 증(證)의 전체를 통한 데서 나오는 믿음이며, 처음 발심하는 신심(信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경을 성취하면 바른 믿음이라 하든 정각(正覺)이라 하든 여기서는 뭐라 해도 상관 없으니, 이것이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수행의 지위가 낮고 정각은 수행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근본을 바로 성취한 사람을 믿음이라, 각(覺)이라,부처라, 중생이라, 조사라, 무어라 해고 상관 없읍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바로 성취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름은 무엇이라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57.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一切不留하야 無可記檍이로다

객관적으로 일체가 머물지 못한다거나 주관적으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머물 것이 있고 머물지 못할 것이 있는 것처럼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는 능(能) 소(所)가 붙으므로 바른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여기서는 바른 믿음이 곧고 발라서 진여자성이 현전해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못하고 또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었을 기억할래야 할 것이 없읍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조사도 찾아 볼 수 없는데 무슨 기억을 할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58.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虛明自照하야 不勞心力이라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쌍차(雙遮)를 의미하고, 명(明)이란 일체를 비추어 다 살아나는 것으로서, 즉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허(虛)가 명(明)을 비추고 명(明)이 허(虛)를 비춰서 부정과 긍정이 동시(遮照同時)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진 자성의 묘한 작용이므로 마음의 힘으로써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9.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非思量處라 識情難測이로다

대도는 사량(思量)으로는 알 수 없고 깨쳐야만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의 사량은 거친 사량(추思量)이라 하고, 성인의 사량은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사량(微細思量)이라 하는데 거친 사량은 그만 두고, 미세사량으로도 대도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성인도 허허로이 밝게 스스로 비추는 무상대도는 알 수 없고,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妙覺)만이 그러한 무상대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는냐 하면 바로 진여법계라 한다는 것입니다.


60.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眞如法界엔 無他無自라

여기서부터는 [신심명(信心銘)]의 총결산입니다. 모든 병폐를 털어버리면 진여법계가 현전한다는 것입니다. 진여법계란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 진여법계의 내용은 남도 없고 나도 없어서 모든 상대, 곧 일체를 초월하여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이란 상대로 되어 있는데, 그 현상계를 해탈하여 진여법계 일심법계인 자성을 보게 되면,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절대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상대법이 끊어진 쌍차(雙遮)의 경계이며 진여법계 일심법계인 것입니다.

61. 재빨리 상응코저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要急相應하면 唯言不二로다

앞에서 '진여법계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고 하니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그런 세계라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진여법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대자유의 세계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3차원의 차별세계를 완전히 초월하면 차별이 다한 4차원의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여법계이며 '둘 아님을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 아니란 말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있음(有)과 없음(無)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립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는 상대세계를 초월하고 절대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상대를 극복하여 융합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남이 없다 하니 아무 것도 없이 텅텅 빈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나와 남이 없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이 곧 나이고 내가 바로 남으로서, 나와 남이 하나로 통하는 절대법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62.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不二皆同하야 無不包容하니

서로 상극되는 물과 불을 예로 들어 봅시다. 물과 불이 상대적으로 있을 때는 서로 통하지 않지만, 참으로 쌍차(雙遮)하여 물과 불을
초월하면 물이 곧 불이고 불이 바로 물이 되어 버립니다. 보통의 논리로는 전혀 말이 안되는 듯도 하지만, 여기에 와서는 물과 불이 둘 아닌 가운데 물 속에서 불을 보고 불 속에서 물을 퍼내게 되니, 이러한 세계가 참으로 진여법계라는 의미입니다. 둘이 아닌 세계, 즉 물도 불도 아닌 세계는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체 만물이 원용무애하고 탕탕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한 것이니 쌍조(雙照)입니다. 즉 그 세계에서는 일체 만물의 대립은 다 없어지고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깨치지 못하면 서로서로 대립이 되어 포섭이 되지 않고 싸움만 하게 됩니다. 쌍차(雙遮)란 모든 것을 버리는 세계면, 쌍조(雙照)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세계입니다.

63.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 옴이라 /十方智者가 皆入此宗이라

시방세계의 모든 지혜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종취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모든 있음과 없음의 차별세계를 떠나면 절대세계인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종취에 들어 간다'한 것은 바로 '둘 아닌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대립을 버리면 모든 것이 융합한 세계에 들어가는데 그곳이 곧 둘 아닌 세계, 진여의 세계, 쌍조의 세계인 것입니다.


64.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宗非促延이니 一念萬年이요

이러한 종취는 짧거나 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촉(促)이란 짧은 것, 연(延)이란 긴 것입니다. 이 진여법계의 종취는 시간적 으로 짧거나 길지도 않다는 것으로서 한 생각 이대로가 만년이며 만년 이대로가 한 생각입니다. 즉 무량원겁(無量遠劫)이 한 생각이며 한 생각이 무량원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짧은 것도 없고 긴 것도 없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긴 것이 짧은 것이고 짧은 것이 긴 것이라는 뜻으로서, 한 생각이 만년이며 만년이 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짧고 긴 것이 아니라'함은 쌍차(雙遮)이며, '한 생각이 만년이라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우리가 진여자성을 깨쳐서 대도를 성취하면 시간의 길고 짧음이 다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만년'이라고 해서 한 생각과 만년이 따로 있는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시간 공간이 끊어진데서 하는 말이므로 '한 생각'도 찾아불 수 없고 '만년'도 찾아불 수 없읍니다.
65.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 앞이로다. /無在不在하야 十方目前이로다

시방(十方)은 먼 곳을 말하고 목전(目前)은 가까운 곳을 말합니다.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서로 융합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탈하여 둘 아닌 진여세계로 들어가면 시간적으로 길고 짧음이,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한 생각이 만년이고 만년이 한 생각이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서 시방이 목전이고 목전이 시방입니다. 여기서는 멀고 가까움이 통하여 원융무애한 둘 아닌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는 것은 쌍차를 말하며, '시방이 눈 앞이라'함은 쌍조를 말합니다.

66.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極小同大하야 忘絶境界하고

어떻게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을수 있는가? 이는 조그마한 좁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는 의미인데, 시방세계 속에 좁쌀이 들어간다는 말은 알기 쉽지만, 좁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 하면 상식적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원융무애하여 상대가 끊어진 세계는 조그마한 좁쌀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상대적인 경계가 끊어져 한계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계가 있으면 작은 좁쌀에도 한계가 있고 시방세계도 한계가 있으니 작은 좁쌀속에 어떻게 큰 시방세계가 들어갈수 있겠읍니까? 그러나 여기는 한계가 없으므로 조그마한 좁쌀 속에 큰 시방세계가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좁쌀이 큰 시방세계로서, 온 시방세계가 좁쌀 속에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고 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경계가 있다면 좁쌀 속에 어찌 시방세계가 들어갈 수 있겠읍니까?

67.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極大同小하야 不見邊表라

지극히 커도 작은 것과 동일하여, 가도 없고 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큰 것과 같다'함과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다'함은 쌍조(雙照)를 말한 것이며, '경계가 끊어졌다'함과 '끝과 겉을 볼 수 없다'함은 쌍차를 말한 것으로 모두 양변을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면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67.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有卽是無 無卽是有

있음과 없음이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이 가장 통하기 어려우나 진여법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하여 무애자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69. 만약 이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若不如此인댄 不必須守니라

았음과 없음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우리가 실제로 바로 깨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인 둘 아닌 세계로 바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하기 전에는 불법(佛法)이라 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70.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一卽一切 一切卽一

하나는 작은 하나이며 일체는 커다란 전체입니다. 진여법계에서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바로 하나로서 하나와 많음이 서로서로 통하여,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71.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但能如是하면 何慮不畢가

일체 진리를 깨치고 나면 일체 원리를 모두 성취하여 버렸다는 말이니, 결국 이것은 우리의 자성자리, 곧 법계실상(法界實相)을
얘기한 것입니다.


72.믿는 마음은 둘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信心不二요 不二信心이니

그러면 이 진여법계를 무엇으로 깨치느냐 하면 바로 신심(信心) 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심(信心)은 범부에서부터 부처가 될 때까지 모두가 신심(信心)뿐인 것이니, 이는 신(信) 해(解) 오(悟) 증(證)을 함께 겸한 신심(信心)입니다. 그러므로 신심은 불법진여의 근본으로서 그것은 둘이 아니며, 모든 것이 원융하여 쌍조가 되어서 '둘 아님이 신심(信心)'이라 하였읍니다. 둘 아님이 신심(信心)'이니 거기서는 아무 상대도 없고 무애자재만 남게 됩니다.

73.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 /言語道斷하야 非去來今이로다

그 깊고 오묘한 도리는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말이나 문자로써 설명할 수 없고, 과거 미래 현재의 삼세(三世)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어의 길이 끊겼다'하니 벙어리의 세계냐고 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대적인 언어의 길은 끊겼지만 원융무애한 진여법계에서는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고 해도 한마디 한마디가 무한한 진리로서 모든 것이 다 표현되어 있읍니다. 또 '삼세가 없다'하지만 삼세가 끊어진 곳에 삼세가 분명하여 과거 속에 미래가 있고 미래속에 과거가 있으며. 현재 속에 과거가 있고 현재 속에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닌 동시에 과거 속에 미래가 미래 속에 현재가 원융하여 무애자재한 진여법계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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