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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불교의 태두 백장회해

똥하 2011. 11. 29. 10:22

선농불교의 태두 백장회해

마조계(馬祖系) 선종의 획기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수많은 문도의 양적인 팽창과 조직적 교단 출범이다.

마조도일의 문하에 모인 수많은 수행자들은 전에 볼 수 없는 집단생활을 유지하며 승원(僧院)의 구조와 조직을 새롭게 개편했다. 이와 같은 교세의 확장은 홍주종(洪州宗)이라는 호칭을 얻기에 충분했다.
마조로부터 파생된 선종교단(禪宗敎團)은 홍인(弘忍)의 동산법문(東山法門)이나 혜능의 조계법문(曹溪法門)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거대했다.
마조문하의 입실제자를 88인, 혹은 139인이라 한다. 또는 대적문하팔백여인(大寂門下八百餘人), 현도천유여중(玄徒千有餘衆)이라 한다. 이러한 대중의 수는 마조문하의 총수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다시없는 선종교단의 인원임에 틀림없다.

마조의 문파는 백장(百丈)을 거친 위산(?山) 문하 천오백인, 황벽(黃檗)문하 일천여인을 망라한 것이다.
마조문하의 선승(禪僧)들은 중국 전지역에 널리 흩어져서 교화를 전개했다. 선종의 제파는 물론 수당불교(隋唐佛敎)역시 낙양(洛陽)이나 장안(長安)의 제도(帝都)에서 행화(行化)를 전개했다. 그러나 마조는 제도불교단(帝都佛敎團)과 인연을 멀리한 강서지방을 무대로해서 행화를 전개했음에도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된 까닭은 그의 문하에 왕성한 선사들의 활약이 컸었다고 보아야 옳다.
마조의 수많은 제자가운데 흥선유관(興善惟寬:755~817), 아호대의(鵝湖大義:746~817), 장경회휘(章敬懷暉:757~816) 등은 중앙 제도(帝都)에서 선교하는 한편 칙소(勅召:)에 의한 궁내설법(宮內說法)도 여라 차례 가졌다.
장경회휘, 흥선유관, 아호대의 등 3인의 활약에 의해서 육조혜능(六祖慧能)에게는 대감선사(大鑑禪師), 남악회양(南嶽懷讓)에게는 대혜선사(大慧禪師), 마조도일(馬祖道一)에게는 대적선사(大寂禪師)라는 익호(謚號)가 황제로부터 내려졌다.
마조 문하에는 다양한 기능과 재주를 지닌 많은 사람들이 있음으로해서 개성이 풍부한 선장(禪匠)들을 여럿 배출했다.
분주무업(汾州無業:762~823) 같은 전통적인 불교학자도 있는가 하면 방온(龐蘊:?~815)과 같은 거사도 있었고, 석공혜장(石鞏慧藏)같은 엽사(獵師)도 있었다.
권덕여(權德輿)가 쓴 홍주개원사석문도일선사탑비명(洪州開元寺石門道一禪師塔碑銘)에는 마조문하의 뛰어난 십대제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사문혜해(沙門惠海), 지장(智藏), 호영(鎬英), 지현(志賢), 지통(智通), 도오(道悟), 회휘(懷暉), 유관(惟寬), 지광(智廣), 숭태(崇泰), 혜운(惠雲) 등이다.

오늘에 이르러 그 전기가 알려진 사람은 혜해(惠海), 지장(智藏), 회휘(懷暉), 유관(惟寬)등 4인에 지나지 않다.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은 백장회해(百丈懷海), 남전보원(南泉普願), 서당지장(西堂智藏), 아호대의(鵝湖大義) 등은 마조 문하의 대표적 인물 10인에 끼어 있지 못한 점이다. 그렇지만 종밀(宗密)이 쓴 선문사자승습도(禪門師資承襲圖)에는 장경(章敬)의 휘(暉), 백장(百丈)의 해(海), 서당(西黨)의 장(藏), 흥선(興善)의 관(寬) 등 4인의 이름이 들어 있다.
마조문하의 삼대사(三大士)를 들라고하면 백장회해, 서당지장, 남전보원이다. 그러나 마조의 법계(法系)는 서당지장(西堂智藏)이라기 보다는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다.
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임제(臨濟)로 이어지는 사가(四家)의 전통과 사가어록(四家語錄)의 재편은 새로운 선종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선사의 속성은 왕(王)씨. 복주(福州:복건성) 장락(長樂) 출신이다.
20세에 서산혜조(西山慧照)의 밑으로 출가한 후 형산(衡山)의 법조율사(法朝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남강(南康)의 마조(馬祖)를 찾아 수학한 후 법을 이었으며, 원화(元和) 9년(814) 1월 17일, 66세에 천화(遷化)했다.
백장이 마조 문하의 일재(逸才)로 알려지게된 계기는 그가 백장산(百丈山)을 개창한 후 위산영우(? 山靈祐:771~853)와 황벽희운(黃檗希運:미상)을 배출시킨 다음의 일이다.

마조어록(馬祖語錄)에 사구백비(四句百非)의 문답이 수록되어 있다.
한 스님이 마조에게 물었다.
"사구(四句)와 백비(百非:일체의 판단이 미치지 못하고 이론이 끊어진 곳)가 끊어진 곳에 달마의 종지를 곧바로 보여 주십시요."
마조가 말했다.
"나는 오늘 대답할 마음이 내키지 않네. 지장(智藏)에게 가서 물어보게."
한 스님은 지장에게 가서 물었다.
"사구와 백비가 끊어진 곳에 달마의 종지를 곧바로 보여 주십시요."

지장이 말했다.
"어찌하여 마조화상에게 질문하지 않는가?"
"마조께서 상좌에게 묻도록 하셨습니다."
지장은 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오늘은 머리가 아프니 회해사형에게 가서 묻게나."
한 스님은 회해에게 가서 물었다.
"사구와 백비가 끊어진 곳에 달마의 종지를 곧바로 보여 주십시요."
회해가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한 스님은 마조에게 다시 돌아가 모든 것을 보고했다.
마조는 이렇게 말했다.
"장(藏)의 머리는 희고 해(海)의 머리는 검다."
이 이야기는 조당집 권14 마조장(馬祖章)에 수록되어 있다.

경덕전등록(景 德傳燈錄) 권6의 백장회해장(百丈懷海章)에 마조하의 이대사(二大士)로서 백장과 서당의 존재를 전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느 날 밤, 이대사(二大사)는 마조를 모시고 달구경을 나갔다.
마조가 물었다.
“이럴 때 무엇을 하면 좋겠나?”
서당이 대답했다.
“공양을 하면 좋겠습니다.”
회해는 달리 대답했다.
“수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지장의 것이고, 선(禪)은 회해의 것이다.”

이상의 문답을 통해서 서당지장의 존재를 뛰어 넘는 백장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서당의 흰머리보다 백장의 검은 머리가 보다 철저하다는 견지를 나타내고 있으며, 지장의 경보다 백장의 선이 뛰어남을 시사하고 있다.
백장이 마조문하의 수제자인 서당지장과 나란히 필두로 등장되어 있음은 물론 오히려 서당의 견해를 능가하는 식견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백장이 마조문하 2대 제자로서의 위치가 확보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



회해는 백장산(百丈山) 대웅봉(大雄峰)에서 교화했다.
어떤 스님이 대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기특한 일(奇特大事)입니까?”
회해가 대답했다.
“홀로 대웅봉에 앉았노라(獨坐大雄峰)”
기특한 일은 백장산 대웅봉에서 수선안거하여 기특한 체험을 통해 스스로의 본심을 깨달아 얻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최고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홀로 대웅봉에 앉음은 백장회해의 선경(禪境)이요, 가풍(家風)이라 할 수 있다.
백장은 개당하여 게송을 읊었다.

신령스런 빛이 홀로 들어나 육근 육진을 벗어났다(靈光獨露逈脫根塵)
본체가 참 모습을 드러내니 문자에 의지하지 않네(體露眞相不拘文字)
마음 성품 오염되지 않아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心性無染本自圓成)
망념만 여의면 바로 여여불이라네(但離妄念卽如如佛)

백장은 사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기에 망념만 제거하면 그대로가 부처라는 조사선의 경계를 드러냈다.
선종사에서 백장회해의 업적을 든다면 율종 사찰에 더부살이를 했던 선종을 이끌어내서 당당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도록 한 점이다. 다시 말하면 <백장청규>를 중심으로하여 선종총림(禪宗叢林)을 수립해낸 점이다.

<백장청규>의 원래 내용은 다 알 수 없으나, <선문규식>과 관련 전적에 인용되어 있는 것을 참고하여 대략의 내용과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1)선사(禪寺)를 율사(律寺)로부터 독립시키고, (2)선원청규를 제정하고, (3)장로(長老)를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여 법을 설하게 하고, (4)불당(佛堂)을 세우지 않고 중앙에 법당(法堂)을 세우며, (5)전 대중이 보청(普請)법에 의거하여 노동생산에 참여하며, (6)대중생활에서 규범을 어긴 자에게 벌칙을 내리는 것이다.

보청에 의한 노동생산은 선종의 독특한 자활의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一日不作),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食)는 격언이 말해주듯 백장은 노동생산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백장의 선농불교(禪農佛敎)의 주창은 면면히 이어져 선종이 오늘날까지 생존해 오는데 크게 기여했다.
선농불교는 농사일과 참선수행을 병행한다는 의미보다는 노동을 신선한 수행방법으로 승화시켰다는 의미가 크다. 백장의 선원청규와 선농불교는 선종의 수행방식으로 면면히 이어져 나오고 있다.

 

 

글: 김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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