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태현 묘지명

똥하 2010. 1. 18. 05:43

문정공(휘 태현) 묘지명

김문정공(金文正公) 묘지

공의 이름은 태현(台鉉)이고, 자는 불기(不器)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본래 광산(光山)의 망족(望族)으로, 개국 초기부터 벼슬하여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였다. 증조 신호위중랑장(神虎衛中郞將) 광세(光世)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조부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경량(鏡亮)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감찰어사(監察御史) 수(須)는 여러 차례 추증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시중은 일찍이 충헌왕(忠憲王, 高宗) 을묘년(고종 42, 1255 )에 진사제(進士第)에 급제하였는데, 성품과 용모가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며 담력과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유능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지원(至元) 기사년(원종 10, 1269)에 어사(御史)를 거쳐 지영광군주사(知靈光郡州事)로 나갔다. 이듬해에 삼별초(三別抄)가 난을 일으켜 강도(江都, 江華)의 인물을 약탈하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며 먼저 탐라(耽羅)를 점거하려 하였으므로, 본국에서 장군 고여림(高汝霖)을 파견하여 쫓아가 토벌하도록 하고, 또 전라도 선정관(全羅道 選正官)에게 문서를 내려보내 사람들이 평소 믿고 따를 수 있는 자가 군사를 이끌고 함께 나가라고 하였다. 시중이 그 선발에 뽑히자 집에서 숙식을 하지 않고 드디어 초군(抄軍)과 함께 급하게 가서 고여림과 탐라에서 만났다. 적들이 아직 진도(珍島)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탐라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밤낮으로 성벽을 쌓고 병기를 수리하며 내습로를 끊어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움추리고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적이 다른 길을 거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와 같이 대의(大義)로써 사졸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용기를 백 배나 더하여 용감하게 소리치며 다투어 달려나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러나 토착지방민[土人]들이 적을 도와주게 되니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
공은 10세에 부친을 잃었다. 대부인(大夫人)은 작고한 예빈경(禮賓卿) 고정(高侹)공의 딸로 영광에서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와 법도에 맞게 가르치니, 공도 생각을 고쳐서 독서에 힘썼다. 14세가 되자 숙부이자 작고한 재상인 문숙공(文肅公, 金周鼎)을 따라가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는데, 문숙공이 그가 지은 사부(詞賦)가 뛰어난 것을 보고 “우리 가문을 크게 떨칠 사람은 너로구나. 우리 형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도다” 라고 하였다. 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한 번에 으뜸으로 합격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또 예부시(禮部試)에 나가 진사에 급제하였다. 정축년(충렬왕 3, 1277)에 녹원사(錄苑事)가 되었다가 뒤에 강음목감직(江陰牧監直)이 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가 되었다. 경진년(충렬왕 6, 1280 ) 여름에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좌우위참군 겸 직문한서(左右衛叅軍 兼 直文翰署)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7년 동안 모두 세 차례 관직이 바뀌면서 7품에 이르렀다. 모두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났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밀직당후관(密直堂後官)을 거쳐 권지통례문지후(權知通禮門祗候)가 되었다. 얼마 뒤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에 제수되고,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은비(銀緋)를 입고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옮겼다가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기거랑(起居郞)으로 바뀌었다가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첨의사인(僉議舍人)에 제수되었으며, 전법총랑(典法摠郞)으로 바뀌면서 조현대부(朝顯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대덕(大德) 무술년(충렬왕 24, 1298) 봄에 덕릉(德陵, 忠宣王)이 내선[內讓]을 받아 왕위를 계승하자 공의 잘못을 면해 주었다. 가을에 덕릉이 (원의) 조정에 들어가고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하자 판도총랑(版圖摠郞)에 기용되고, 전중윤(殿中尹)으로 옮겼다가 여러 차례 옮겨 밀직우승지 판사재사 문한시독 사관수찬 지제고 지군부감찰사(密直右承旨 判司宰事 文翰侍讀 史館修撰 知制誥 知軍簿監察司)가 되었으며, 조봉·중열(朝奉·中列) 2대부(大夫)가 더해졌다.
경자년(충렬왕 26, 1300)에 봉익대부 밀직부사 겸 감찰대부(奉翊大夫 密直副使 兼 監察大夫)에 제수되고, 신축년(충렬왕 27, 1301 )에 왕명을 받들어 천수성절(天壽聖節)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상도(上都)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성종(成宗)이 삭방유수(朔方留守)로 친행(親行) 중에 있었으므로, 성(省)에서 각국 사신들에게 군사일에 관한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상도에) 머물러 있으라고 조칙을 내렸다. 공이 성에 나가 “우리 나라가 귀국을 섬긴 이래 해마다 보내는 축하사절을 일찍이 빠뜨린 일이 없는데, 이제 여기에 머물러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 참으로 매우 황공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상도를 떠나 북으로 가기를 허락받았다. 1년 동안 한 역[站] 한 역을 지나면서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여 성절(聖節)을 맞이하였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하례를 올렸는데 의식이 궁궐의 연회에서 행하는 것과 같으니, (황제가) 멀리서 왔다고 하여 특별히 어식(御食)을 내려주면서 총애하였다. 당시 황제가 친히 적을 정벌하여 물리쳤는데, 공이 먼저 황제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경하하였다.
동지지사사(同知知司事)에 오르면서 문한승지(文翰承旨)직을 겸대하고, 또 원에서 황제의 명[宣命]으로 승무랑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承務郞 征東行中書省 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다.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옮기면서 대보문(大寶文)을 겸하였고,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바뀌었다.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첨의부(僉議府)에 들어가 지사사(知司事)가 되고, 병오년(충렬왕 32, 1306 )에 또 천수절(天壽節)을 축하하러 원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 때 충렬왕이 상도에 있으면서 신하를 만나고 있었는데, 무술년(충렬왕 24, 1298)에 복위한 때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파당을 나누어 부자의 정을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공이 그 사이에서 중재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 봄에 덕릉이 인종(仁宗)을 거들어 내부의 난을 평정하니 공(功)이 천하에 높았으므로, 본국의 신하로서 임금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자는 모두 떠나갔다. 위로는 이부(二府, 僉議府와 密直司)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리에 이르기까지 혹은 죽이기도 하고 혹은 유배보내기도 하면서 모두 바꾸었으나, 홀로 공만을 유임시켜 다시 지밀직사(知密直司)로 삼았는데, 여름에 밀직이 혁파되자 자의찬성사(咨議贊成事)가 되었다.
지대(至大) 무신년(충렬왕 34, 1308)에 충렬왕이 승하하고 덕릉이 즉위하자 대신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을 생활을 살피고 호적을 정리하려 할 때에, 공을 양광수길도 계점사 행수주목사(楊廣水吉道 計點使 行水州牧使)로 삼았다. 각도에서 첨의사(僉議司)에 글을 올려 적용할 법규를 요청하였으나 첨의사에서는 정해진 것이 없었으므로 회송문서에다 매번 마땅히 양광수길도의 1도에서 정한 예에 따라 시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모두 관리를 보내어 그 법을 배워 갔다.
기유년(충선왕 1, 1309) 여름에 다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어 2년 간 재임하다가, 삼사(三司)가 혁파되자 대광 상의찬성사(大匡 商議贊成事)가 되었다. 신해년(충선왕 3, 1311)에 또 상의(商議)의 관직을 없애니 관례에 따라 물러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벼슬 없이 한가하게 지낸 것이 10년이었다. 신유년(충숙왕 8, 1321)에 기용되어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가 곧 판삼사가 되고, 관계(官階)는 중대광(重大匡)에 이르렀다.
연우(延祐) 말에 덕릉이 토번(吐蕃)으로 가게되는 일이 벌어지고, 지치(至治) 초에 상왕(上王)이 원에 들어와 머물게 되자 나라에서는 파당의 논의가 일어났다. 당시 총재(冢宰)는 임금을 수행하여 갔으므로 공이 이부(二府)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아래에 있는 관리들이 오히려 나라의 권력을 장악한 채 서로 마음을 합하지 않았으므로, 일이 있을 때마다 모두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나라가 잘못되지 아니한 것은 오직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 1324)에 상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자 여러 가지가 다시 바뀌게 되면서 공을 파면시키고자 하였다. 임금은 “이 노인은 시종일관하여 다른 뜻이 없는 분이니, 내쫓는 것은 옳지 않소” 라고 하였으나, 권력을 잡은 자로 어리석게 찬동하는 자가 있어서 마침내 파직되었다. 이듬해에 임금이 귀국하자, 삼중대광첨의정승(三重大匡 僉議政丞)으로 벼슬을 물러나 은퇴하였다.
이 해에 대부인의 나이가 100세였으므로 해마다 30석(碩)의 곡식을 하사받았다. 정묘년(충숙왕 14, 1327)에 관호를 다시 바꾸었으므로 삼중대광 첨의중찬 수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리사사(三重大匡 僉議中贊 修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 判典理司事)가 되어 그대로 은퇴하였다. 이 때에 대부인이 작고하니 나이가 102세로서, 특별히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으로 추증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충숙왕 17, 1330) 봄에 국왕<충혜왕>이 지위를 이으라는 명을 받게 되니, (원의) 조정에서 객성(客省)에 70명의 날랜 군사[堅]를 보내어 금인(金印)을 가져오게 하면서 공을 권행성사(權行省事)로 임명하였다. 공이 거듭하여 그 명을 받지 않자 또 서사(署事, 署行省事)로 기용하였다. 조정의 사신이 2월 2일에 돌아가고 29일이 되자 당시 재상들이 순군(巡軍)에 모여 앉아 전 임금의 명령이라 하여 공을 소환하였다. 공이 도착하자 승상의 관인(官印)을 몰수하고 성부(省府)에서 공을 축출하였다. 명에 따라 귀가하여 몇 달을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보내다가, 4월에 식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였는데, 대개 의혹을 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5월에 임금의 사신이 상도(上都)로부터 와서 당시의 재상이 마음대로 승상인(丞相印)을 빼앗은 것을 질책하면서, 좌우의 담당 관리를 파직하고 모든 월봉(月俸)을 정지시켰다. 임금의 명을 받은 관리 한 명을 파견하여 산에 다달아 명을 전하니 공은 역마(驛馬)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 다시 서성사(署省事)가 되었으나, 즐겨 한 일은 아니었다. 7월에 병환의 기운이 있어 약으로 다스렸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0월 6일 계축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0세이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공평하였으며 생김새가 뛰어나고 단정하였다. 말과 행동거지가 예법을 따랐으므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히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으나, 한 번 접해보면 목소리와 기색이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대부인을 섬기며 효도를 다하였고, 부인을 대하면서도 예의를 지켰다.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도 방정함이 있었고, 친척과도 매우 화목하여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화합하였다. 사람들과 더불어 함부로 교유하지 않았고 또한 원한을 가진 사람도 없었으며, 이부(二府)에 재직할 때나 파직되어 한가로이 있을 때나 손님이 오고가는 것에는 더함이나 줄어듬이 없었다. 평소에 일이 없을 때에도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낮에 눕는 일이 없었고 더워도 웃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비록 발[簾]을 드리운 곳에 있을 때라도 옷깃을 여미고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엄정하고 공손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내시(內侍)에 들어가서 감창시(監倉寺)의 명을 받았을 때, 번잡한 일을 현명하게 처리하니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대간(臺諫)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말한 것이 모두 원대한 계책이 되었으며, 충청·경상(忠淸·慶尙) 2도(道)의 안찰사(按察使)와 동계 안집사(東界 安集使)로 나갔을 때에는 감옥의 일과 소송을 공평하게 처리하여 이익은 늘리고 손해는 줄이는 일을 즐겨하였으니, 당시에 이미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구제하리라 기대되었다.
세 임금<忠烈·忠宣·忠肅>을 두루 섬기면서 행동을 예의바르게 하였으며 일찍이 실낱만큼의 실언(失言)도 없었다. 역대(歷代)의 전고(典故)를 마치 어제 일처럼 환하게 알고 있어서, 매 번 나라에서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공을) 찾아가서 바로 잡고는 하였다. 저술은 문장[詞]의 가르침이 체(體)를 이루고 있었으며, 시(詩)는 맑으면서도 고와서 가히 애송할 만하였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을 손수 모아서 『동국문감(東國文鑑)』이라 하였으니, 정수를 모아 배열한 것이라 할 만하다. 스스로 호를 지어 쾌헌(快軒)이라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설암(雪庵)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이천(李蒨)등 70 명을 얻고, 예부시[禮闈]를 주관하여서는 박리(朴理) 등 30여 명을 얻으니,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 많이 그 중에 들어 있다.
공은 좌우위낭장(左右衛郎將) 김의(金儀)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뜨자, 다시 신호위낭장(神虎衛郞將) 왕단(王旦)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개성군대부인(開城郡大夫人)으로 봉해졌다. 어질게 능히 가정을 다스려서, 있고 없음으로 공을 혼란스럽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들 3인을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서 나라에서 해마다 20석(石)의 곡식을 받았다. 공은 아들이 4명이고 딸이 2명인데, 첫 부인이 1남을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후부인이 낳았다. 광식(光軾)은 갑오년(충렬왕 20, 1294 )의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총부의랑(摠部議郞)에 이르렀으나 먼저 사망하여 자식이 없다. 광철(光轍)은 을사년(충렬왕 31, 1305 )의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군부총랑 진현직제학(軍簿摠郞 進賢直提學)이며, 광재(光載)는 계축년(충선왕 5, 1313 )의 과거에 합격하여 지금 도관정랑(都官正郞)이 되었다. 광로(光輅)는 정사년(충숙왕 4, 1317 )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결혼하기 전에 일찍 사망하여 관직은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에 그쳤다. 장녀는 전교령 예문직제학(典校令 藝文直提學) 안목(安牧)에게 시집가서 익양군부인(翼陽郡夫人)으로 봉해졌고, 차녀는 예문공봉(藝文供奉)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명이 있는데 하나는 아무개로 별장(別將)이며, 다음은 아직 이름이 없다.
국왕이 어릴 때부터 (공의) 명성을 들었는데 즉위한 처음에 성(省)의 권임(權任)을 맡긴 것은 대개 다시 재상으로 삼아 국공(國公)이 되게 할 뜻이 있어서였다. 공이 병이 들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부의를 후하게 내리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면서, 다시 담당 관청에게 비용을 쓰라고 명하였다. 11월 8일 갑신일에 덕수현(德水縣) 동쪽 풀이 많은 언덕[多草之原]에 장사지내면서, 두 아들이 공이 남긴 명(命)이라 하여 문인(門人) 최(崔) 아무개에게 묘지의 명(銘)을 부탁하였다. 아무개가 공을 섬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는데 항상 송구스럽게도 보살핌을 비할 바 없이 받아 왔다. 드리워진 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글을 짓는 일은 마땅히 능한 사람에게 미루어야 할 것이나, 공이 명하였으니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백 번 절하고 울면서 명(銘)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아, 문정공이여, 실로 나라의 원로이신데
이제 홀연히 가시니 어디에다 물어보아야 합니까.
산이 무너지고 들보가 부러졌고, 어질고 맑은 분께서 가시니
그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자(孔子)[宣尼]를 잃은 느낌입니다.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짓고, 자금어대(紫金魚袋) 김원준(金元俊)이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金文正公墓誌

公諱 字不器金氏本光之望族白國初已入仕代不絶人大王父神虎衞中郎將諱允世贈尙書左僕射王父金吾衞大將軍諱鏡贈門下平章事父監察御史諱湏累贈門下侍中侍中嘗於 忠憲王乙卯嵗登進士苐質貌偉麗膽畧過人從事冲外以▨能稱至元已巳自御史出知靈光郡明年三别抄叛掠江都人物舟而南下志在先據耽羅 本國遣將軍高汝霖追討又牒下全羅道選正官雅爲人所信服者領軍偕進侍中當其選不宿家遂行抄軍亟會汝霖于耽羅則賊猶保珎島未至於是晝夜築保珍械謀断來道使無淂入而守土者首鼠不爲力賊由他道至不覺侍中素以大義勵士卒人多感激有百其勇奮呼爭登殺賊先鋒殆盡然而士人資敵衆寡不侔竟與高將軍歿陣不還人寃之至今公年十嵗而孤大夫人故禮賓卿高公諱挺之女也自靈光挈孤以歸敎之有法度而公能折節讀書甫十四從叔父故相文肅公斈舉業文肅見其詞賦奇之曰大吾門者汝乎吾兄爲不亡矣十五一舉司馬試果中思明年又赴禮闈苐進士丁丑錄死亊後直江隂牧監俄錄詹亊府事庚辰夏中殿試除左右衞叅軍兼直文翰署自此七年凢三更官至七品戊子由密直堂後官擭知通禮門祇候尋除右正言知制誥歴右司諌服銀緋遷監察侍史賜金紫改起居郎由起居注拜僉議舍人改典法捴郎陞朝顯大夫大德戊戍春陵受內讓嗣王位以公過免秋 陵入侍
闕庭 忠烈王位起爲版圖捴郎轉殿中尹累遷至密直右承旨判司宰寺文翰侍讀史館修撰知制誥知軍簿監察司加朝奉中列二大夫庚子拜奉翊大夫密直副使兼監察大夫辛丑奉 王命入賀 天壽聖節行至上都適
成宗幸朔方留守省奉勑諸路使臣除軍情開緊一切停住公詣省云下國自事大來朝賀年莭木嘗有闕今留不進實深恐懼遂淂許北去上都過一十一站達 行在値 聖莭具袍笏拜賀如儀起宴帳殿上以遠至特賜御食以寵之時 車駕親征却敵公先奉喜音而回所至皆慶遷同知知司事帶文翰承旨又欽受 宣命授承務郎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遷密直司使帶大寶文轉匡靖大夫乙巳入僉議爲知司事丙午又入賀 天壽莭而回是時忠烈朝覲在都自戊戍復位之後國人分曹至使父子之情有所不通公周旋其間一以公正人無異言及丁末春 德陵奉
仁宗掃淸內難功高天下而本國之臣有懷貳于 王者皆去之上自二府下逮庶僚或誅或流釐革且盡獨留公復知密直司夏罷密直爲咨議成事至大戊申 忠烈上昇 陵即位分遣大臣諸道計點民居欲成青籍以公爲楊廣水吉道計點使行水州牧使諸道牒報僉議司承受條畫僉議無所定擬回文每曰當依楊廣水吉一道定體施行故皆遣僚佐來取法焉已酉夏命判三司事居二年罷三司爲大匡商議成事辛死又刪商議官随例罷自是閑居者十年辛酉起爲僉議評理尋判三司階重大匡延祐末 陵有吐蕃之行至治初 上王入朝見留國中黨論起時冡宰從于 王所而公首居二府在下者反執國權不與一心故事皆皆杆格然終不至誤國者由有公也泰定甲子 上王淂政多所更改而欲罷公 王曰此老終始無他不宜去執政罔有者卒見罷明年 王歸國以僉議政丞致仕是年大夫人年百嵗賜廩嵗三十碩丁卯更革官号就以三重大匡僉議中修文館大提斈監春秋館亊上護軍判典理司事仍致仕及是太夫人卒年百二嵗特贈卞韓國大夫人至順庚午春 國王受嗣封之命 朝廷遣客省使七十堅來取金印而命公權行省事公重違其命且起署事朝使以二月二日而回至廿九日時宰會坐巡軍所以 前王命召公至則妝丞相印于省府出令听命旼家數月別無行遣四月挈家東游金剛山蓋避嫌也五月 王使至自都責時宰以擅妝丞相印事而罷其左右司官皆停月俸遣宣使一人到山傳命公乗驛還京署省事非其好也七月氣疾作藥治不效至十月六日癸丑卒于冢享年七十公性資廉平儀表秀整言語舉止動循禮法人望之若不可犯及乎一接聲氣又温然而和莫知其有也其事大夫人孝待夫人以礼教養子孫有方親婣克睦不言而化與人無妄交亦無與爲仇怨者其居二府至罷閑居賓客挫來不爲之增減也平生無事必夙興夜寐晝不偃卧暑不袒祼雖處簾閣整襟危坐肅▨如也方其年少入內侍奉命監倉寺務繁愈辦老事者以爲不可及至叅臺諫所陳皆遠謀其出於忠淸慶尙二道安集東界獄訟歸于平具除利害若嗜欲然當時已以經濟期之歴事 三王進退由礼未甞有絲毫之失言歴代典故班班如昨日事每國有大疑就訪而是正焉其所著述詞教得体詩淸豔可愛又手集東人之文號東國文鑑以擬配選粹自號快軒晚年又號雪庵甞主成均試得李蒨等七十人闢礼闈得朴理等三十餘人一時聞士多入選中公娵庀右衛郎將金化之女早逝又娵神虎衛郎將王旦之女封開城郡大夫人賢而能家不以有無溷于公以三子皆登科食國廩嵗二十石公子男四人女二人先夫人生一男餘皆後夫人生也光軾登甲午科官至捴部議郎先卒無子光轍登乙巳科今爲軍簿捴郎進賢直提學光載登癸丑科今爲都官正郎光輅登丁巳科末娶而夭官止嘉安府錄事女適典校今藝文直提學安牧封翼陽郡夫人次適藝文供奉朴允文孫男二人曰某職爲別將次未名 國王自幼素聞重名在初受封即以省權任之蓋有相意及就國公巳病聞其卒爲之不懌另賻加厚贈謚曰文正更命有司用十月八日甲申葬于古水縣東多草之原二孤以遺命屬門人崔某銘其墓某亊公近三十年常懼無似有負知待至如譔垂之不朽冝讓能者然公之治命不可辭也謹百拜泣而銘之銘曰
嗚呼文正實國元龜今而忽喪于何質疑山頹梁毀哲人其萎匪獨賜也有感宣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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