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윤택

똥하 2009. 6. 15. 19:01

공도공의 스승 무송 윤택

이문화 선생의 스승 윤택(尹澤)선생

-충숙왕으로부터 후일의 공민왕에 대한 고명을 받고, 공민왕 즉위 후에 지성으로 보필, 치사 중에도 충간을 계속한 고창 출신의 재야 재상.



40세 넘어서도 미관말직

 고려 말기의 한 이채로운 문신, 윤택의 존재는 여러모로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는데, 왠지 승진을 못하고 15년여를 하위직을 맴돌아, 나이 45세에도 9품 검열직에 머물러 있었다. 그만큼 그는 처세에 능숙하지 못하고 환해(宦海)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를 더러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위축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장차 재상이 될 수 있다고 스스로 믿어, 기개 있게 처신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부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거만하고 경망하다고 평하였으나, 일체 개의치 않았다. 그는 처세술만 빼면 나머지 재상이 될 만한 자질과 학문과 경륜을 두루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송의 윤 씨로 충렬왕 15년(1289)에 출생하였다.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봉익대부밀직부사 증직을 받은 수평(守平), 조부는 국학대사성 문한사학을 지낸 해(諧)로 충렬왕 때의 명신이었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편모(뒤에 진례군부인-進禮郡夫人호를 받음)슬하에서 조부의 훈도(薰陶)를 받고 자랐다. 서너 살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배우는 족족 외워 조부를 놀라게 했다. 또 그가 사람을 경동(驚動)시킬 만한 글귀를 말할 때마다 조부는,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는 바로 너로구나. 수평이 죽지 않았도다.”고 말하면서 울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는 성장함에 따라 입지(立志)를 더욱 굳게 하고, 고모부 윤선좌(尹宣佐)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윤선좌는 당대 굴지의 대학자로 경학에 밝을뿐더러 뛰어난 문장가였다.

  충렬왕 14년에 과거에 장원하고, 충숙왕 때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를 지낸 명망 높은 문신이었다. 그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여 배우는 과정마다 달통하였고, 특히 좌씨춘추를 좋아하여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는 늘 범중엄(范仲淹.송의재상)의,“내 근심보다 천하의 근심을 먼저하고, 천하가 즐긴 후에 내가 즐긴다.”는 글귀를 외우면서, “대장부가 되어 어찌 하잘 것 없이 세상을 살까보냐.”고 강개해 하였다.


 

베이블에 떨어진 자리

 그는 충숙왕 4년(1317)에 등제하여 경산부사록이 되고, 이어 교감(校勘)을 거쳐 검열로 전임하였다. 이후, 과거에 급제한 지 거의 15년, 40이 넘은 나이까지 9품관을 감수(甘受)하고 있었다. 말직 관등에 개의치 않고 재상과 다름없는 긍지와 오기를 지니고 직무에 충실하였다.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권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독야청청하며 바른말하기를 좋아하니 승진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청백리였던 조부의 영향인지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았다. 벼슬아치로서 평생 베 이불을 덮고, 떨어진 자리에서 생활하고, 조석의 끼니조차 잇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는 그렇게 부귀 현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은퇴 후의 생활을 읊은 시이지만, 그의 사람됨을 엿보기에 족하다.

 아침 해에 동창이 밝더니,

 석양엔 또 서창이 밝구나.

 그 속에 한 늙은이 누워 있으니,

 고즈넉한 낮 찾은 이 없어라.

 이만하면 여생 편안한데,

 구태여 정신 시달려 무엇하리.

 다만 술의 유무가 걱정될 뿐,

 누구 너그럽고 좁은 건 괜찮아.



  朝 () () () () ()   () () 西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는 법’, 15년을 9품 말단직에서 맴돌던 그에게 마침내 날아볼 때가 왔다.

 충숙왕이 원에 가서 연경에 머물고 있을 때, 그 경위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윤택이 홀로 연경까지 가서 왕을 배알할 기회를 가졌다. 그 때 왕이 한번 보고는 큰 인재로 여기고, 어린 아들 기(祺. 후일의 공민왕)의 뒷일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대신은 아니나 고명(顧命)을 받은 셈이었다. 택이 감격하여 절하고 사례하면서.  “신이 이미 늙었으니 어떻게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고 겸사하였다. 충숙왕 복위1년(1332), 그의 나이는 49세, 관등을 검열일 때 연경에 있는 왕의 자택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로부터 공민왕과의 뗄 수 없는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 왕이 귀국 도중 서경에서 머물 때, 윤택이 검열로서 서경참군직을 임시로 맡아, 왕을 위한 시설 및 생활 용품 조달을 관장했는데, 규모 있게 잘 집행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왕이 마냥 흡족히 여겨, ‘어질도다, 안회여.( () () () () )라는 논어의 말을 인용하며 감탄하였다.



충숙왕의 지우

 이는 택의 용모가 회회(回回. 위글족)인과 비슷한 데서 안회에 비하여 말한 것이다. 그의 조부 해(諧)도 일찍이 왕을 시종하여 원을 오갈 때 공용(供用)책무를 맡아 절제 있게 관리하여 비용을 남겨서 국고에 반환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그 조부에 그 손자였다. 이 무렵 원제(元帝)의 조서가 와서, 왕이 윤택에게 읽으라고 지시하니 신하들이,  “조서를 읽는 일은 본래 지제고(知制誥)가 하는 일입니다.”고 이론을 제기했다. 그러자 왕이, “참군(參軍)이 양제(兩制)가 되는 것도 내게 달린 일이 아니랴.”하면서 바로 택을 권응교(權應敎)로 임명하였다. 충숙왕의 윤택에 대한 신임이 이렇듯 대단하였다. 얼마 지난 뒤, 왕이 그를 서경부윤으로 등용하려니 관등이 부족하므로, 일단 판관으로 올려 주었다. 또 어떤 자가, 윤택이 왕에게 불공한 언동이 있었다고 중상하자, “윤생은 충성스러운 사람인데 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고 물리쳤다. 그는 왕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분수를 지키며, 겸허하고 공선사후(公先私後)의 공인 정신에 투철하였다. 그는 충숙왕 복위 7년(1338)에 우부대언이 되어 전선(銓選)을 맡아 관리의 선발 배치를 주관했는데, 왕이 택의 아들에게 호군(護軍)벼슬을 주라고 하였다. 택이, 
 “관직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현명하고 공로 있는 자도 지금 승진이 지체되는 판국에, 감히 신의 자식을 사사로이 임명하겠습니까.”고 사양하였다. 이렇게 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왕이 그를 더욱더 존중하게 되었다. 충숙왕 8년(1339)애 우대언이 되었는데, 왕이 그를 병석으로 불러 연전에 연경 자택에서 왕자 부탁했던 말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는 왕에게 기필코 하명을 차질 없이 받들겠다고 다짐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충숙왕이 죽은 뒤 왕위는 충혜왕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윤택은 사직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공민왕이 즉위하였으나

 그 뒤로 왕위는 좀처럼 공민왕 몫이 안 되고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등 3대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공민왕으로 귀착하여, 마침내 충숙왕의 뜻이 실현을 보게 된다.  그 동안 일단 퇴출되었던 윤택은 충목왕 초년(1344)에 기용되어 나주 목사가 되었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백성들의 여망이 왕자 전(顓. 초명 기-祺:공민왕)에게 쏠렸다. 여기에다 전왕(충숙왕)의 고명이 있는지라, 윤택이 왕자 전을 후계자로 세우자고 발의하여 전 밀직 이승로(李承老)등과 함께 원의 중서성에 진정하였다. 지금 왕위에 오를 예정인 충혜왕의 둘째 왕자 저(㫝)는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올라도 통치권을 감당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고로 왕위를 형제 숙질간에 서로 계승하는 일이 상례로 되어 있으므로, 전왕의 숙부인, 충숙왕의 제 2왕자를 왕에 올림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윤택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충혜왕의 왕자 저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니 곧 충정왕(忠定王)이다. 충정왕이 즉위하자 윤택은 곧바로 광양현감무로 강직되었다. 충정왕은 재위 불과 3년 만에 원에 의해 퇴위당하고, 마침내 공민왕이 즉위하였다. 윤택은 다시 불우한 시절을 마감하고 공민왕 즉위년(1351) 11월 밀직제학에 임명되어 중앙에 복귀하였다. 충숙왕의 고명을 받은 지 20년 만에, 비로소 그가 바라고 바라던, 공민왕의 왕위 계승이 실현된 것이다. 그는 공민왕이 명철한 군주로서 올바른 정치를 펴도록 충성을 다해 보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길은 충간(忠諫)에 있었다. 공민왕 1년(1352) 4월에 시정(時政)에 관하여 성심을 다해 개연히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곧 개성윤(開城尹)으로 나갔다가 이내 치사하고 말았다. 그가 오랜 세월 바라던 왕, 모처럼 왕다운 왕을 만나 난마처럼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아, 치세를 구현하고자 했던 소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국정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독실한 유학 신봉자였다. 그리고 유교적인 정치이념 실현을 희구하며 추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신념이 공민왕의 생각과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기대했던 왕 밑에서 좌절하였던 것이다. 공민왕과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유교이념 신봉자로서의 그의 면호를 드러내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그가 경산부사록으로 있을 때, 농경을 독려하고 학문을 숭상하며, 백성들에게 상제례 여행을 권장하여 예절과 풍속의 진흥을 보았다. 공민왕 6년(1357) 3월에 <서경(書經)>‘무일편(無逸篇)’을 왕과 재신들에게 강의하게 되어, 주공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공로를 진술하는 대목에서, “원하옵건대, 주상께서 성왕을 본받아 주공의 훈계를 들으시고, 장중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억제하고 삼가며 두려워하신다면 나라의 복인가 합니다.”고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왕이 정색하고 들었다.

 시정(時政)에 관한 상소 후 퇴직

 또 그는 진덕수(眞德秀)의 편저인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일찍이 최승로가 성종에게 진강한 글을 가지고 강의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불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는데,“주상께서 위로 종묘를 받들고 아래로 생민을 거느리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필부(匹夫)처럼 인간으로서의 윤리 도덕을 없애 버리려 하십니까. 신의 말씀을 들어주신다면, 공자의 도를 따르지 않으면 불가함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원하옵건대 성의(聖意)를 이에 더욱 기울여 주소서.”라고 호소하였다. 이처럼 윤택은 유교적인 정치 이상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행보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므로 견딜 수 없었다. 치사의 원인이 된 시정에 관한 상소 직전에, 왕은 불탄일이라 하여 궁중에서 연등을 하고, 승려 100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화산놀이’를 시키며, 기생들에게 풍악을 연주시키고 구경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유교의 정치 이념을 신봉하는 그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왕이 충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은퇴 후에도 상소 올린 ‘재야 재상’

 윤택은 퇴직 후에도 우국 충군의 일념은 변함이 없어,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상소하여 국정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한번은 왕의 근신들이 향악(鄕樂)을 원에 가져가는 문제로 의논을 한다는 말을 듣고 택이 상소하여, “원 세조가 옛날에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가져가면 식자들의 조소를 받을까 두렵습니다.”라며 반대하였다. 또 어떤 때는, 심지어 왕에게 여러 가지 씀씀이를 절약하도록 진언하기도 하였다. 왕이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말을 듣고 한양으로 천도코자 궁궐 조영을 시작하니, 또 윤택이 나서서 역간하였다. 왕년에 중 묘청이 인종을 유혹하여 나라를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 경험과 교훈이 그리 먼 옛날의 일이 아니고, 더욱이 지금 사방이 소란한 데도 군사를 훈련하고 양성하는 힘조차 부족한 처치에, 공사를 일으켜 노역에 내몰아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공민왕은 10년(1361)에 윤택을 일단 정당문학으로 임명하여 퇴임케 하였다. 윤택은 왕은에 보답이라도 하듯 목청을 가다듬어 간했다. 근래에 기근이 잦은 데다 전란까지 일어나 백성들의 고통도 극심합니다. 저번에는 남경의 궁궐을 짓고, 이번에는 또 백악(白岳)의 궁궐을 지으니, 백성들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그는 또 이런 말도 하였다. 인재 등용은 정치의 근본이니, 현자를 승진시키고 무능 자를 물리치기 바랍니다. 모든 정사의 득실을 전하께서 환히 알고 계시더라도, 대신에게 맡겨 두면, 즉시 처리되지 않고 미루어지는 사이, 잘못이 커져 바로잡으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왕에게 거푸 들이대고 쓴 소리를 쏘아대니, 아무리 너그러운 왕이라도 마음속으론 짜증이 났을 것이다. 왕이 이런 노인을 조정에 오래 있게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왕이 술을 주자 윤택이 큰 술잔에다 연거푸 석 잔을 마시고도 기색이 자약하였다. 시중 홍언박(洪彦博)이,“운공이 이렇듯 강직한 줄 몰랐다. 나는 그를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감탄하였다. 윤택은 충숙왕의 지우를 받았기에, 그에 대한 사모의 정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그는 공민왕에게 화공을 시켜 충숙왕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고명을 받은 그인지라, 그의 충숙왕에 대한 사모의 정은 그대로 곧 공민왕을 명군(名君)으로 만들겠다는 사명감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그는 치사한 뒤에도 수시로 국정에 대하여 솔직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또 왕은 그의 언사에 혹 지나침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받아들였다. 부왕과의 관계와 그의 충성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직에만 없었을 뿐 늘 대소 국사에 관하여 논변하고 왕을 보도하려 애썼으니, 말하자면 국로요, 재야의 재상이었다. 공민왕은 12년에 또 윤택을 찬성사로 임명하여 치사케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76세 때 병이 나서 금주(錦州)로 돌아가서 자연을 즐기면서 유유히 살았다. 그런 속이서도 임금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다. 귀향한 지 7년 지나 공민왕 19년(1370)에 82세로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덕가의 여경(餘慶)

 그는 자신의 병이 위중해지자 가족들을 불러 앉히고 훈계하였다.“조부께서 한미한 가문에서 관직에 나아가사 청백과 충직으로 당시에 이름이 높았는데, 아버지께서 일찍 세상을 뜨셨기 때문에 나는 밤낮으로 조부의 뜻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다행히 상감의 지우를 입어 총애와 봉록을 과분하게 받고 나이 80이 넘도록 살았으니, 이 모두 조상들이 끼치신 은덕이요, 조부의 청백의 여택이다. 내가 죽거든 장례를 간소하게 치러라.” 윤택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조차 알지 못함을 한스러워해 성묘할 때면 늘 목 놓아 울면서 슬퍼해 마지않았다. 혹 책을 읽다가 부자의 정리를 서술한 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었다. 항상 주머니 하나를 차고 다니다가 별미 음식이 있으면 꼭 담아 가지고 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윤택이 일찍이 충숙왕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바 있어, 고비마다 강릉대군(공민왕)의 왕위 승계를 대망하고 그 나름대로 진력도 하였으나, 막상 그 일이 실현된 뒤로는 양자 간의 정치이념과 노선이 현격히 달라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 그가 물러앉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택의 충성과 왕의 남다른 신임은 시종 변함이 없이 아름답게 지속되었다. 택의 충직과 고결한 인품으로 인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친히 택의 초상화를 그려 거기에 그의 호, 율정(栗亭) 두 글자를 크게 제(題)하여 써서 그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나타냈다. 왕이 신하의 초상을 친히 그려 준, 세상에 드문 일에 대하여 당시의 문호요, 시중인 이제현이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제목은 ‘문생 윤정 윤정당이, 주상이 초상을 그려 율정 두 큰 글자를 써 주시는 은혜를 입음에, 이 천년에 한 번 보고듣기 드문 일을 시 지어 축하한다.’로 되어 있다.


 그대 알지 않은가, 한나라 장량은,

 황제가 자를 불러 자방(子房)이라 한 것을.

 그대 알지 않은가, 백낙천은,

 황제가 초상 그려 집현전에 둔 일을.

 이름보다 자 부름은 진실로 어울리고,

 화공시켜 초상 그림은 아니 아름다운가.

 훌륭하다 내 친구 윤정당이여,

 세상에 드문 큰 왕은을 입었구려.

 금창(金窓)에 붉은 책상 한 점 티끌 없고,

 전하 친히 붓 적셔 초상 그리시니.

 그윽하고 높고 맑아 신령스러워,

 신묘한 필치 아마도 단청이 아닌 듯.

 그 위에 제한 율정 큰 두 글자는,

 한 점 한 획이 천지를 비추네.

 몸을 부순들 만 분의 일도 보은 못하리,

 집에 전할 새 누가 천금을 귀하다 할꼬.

 능연각(凌練閣)의 구양순 우세남은 자랑 마라,

 성재(誠齋)도 괜히 범석호(范石湖)를 부러워했느니.

 조관들은 우두커니 탄상에 넋 잃고,

 육궁(六宮)들 눈이 휘둥그레 보고 또 보네.

 역옹은 진심으로 놀랍고 기뻐,

 눈앞에 문생의 기특한 일 보니.



  君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일세의 문호답게 당시 정황을 한눈에 그려 놓았다. 공전절후의 일대 성사(成事)였다고 할 것이다. 문집 율정집이 고려사 편찬 당시 세상에 전한다고 하였다. 윤해와 택, 조손 2대에 걸쳐 덕을 쌓고, 충의청.백. 정직으로 나라와 겨레에 봉사한 보답이듯, 그의 자손은 번성하고 현달하였다. 세 아들 귀생(龜生), 봉생(鳳生), 동명(東明)중 큰 아들 귀생은 효자로 고려사 열전에 올라있다. 손자 소종(紹宗), 회종(會宗)이 공민왕․ 우왕 때 각각 등제하여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문신으로 명성을 떨쳤다. 증손자 윤회(尹淮)는 대학자로 조선 태종 ․ 세종 조의 명신이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묘지명병서가 남아 있다.

【연보】

․충렬왕 15년(1289) 출생.

․충숙왕 4년(1317) 9월 과거 급제 이후 경산부사록, 서적녹사 교감 등 역임.

․충숙왕 7년(1320) 수재과(秀才科)1위 급제,40이 넘을 때까지 검열.

․충숙왕 복위1년(1332) 연경에 가서 왕 알현. 왕자 기(祺.공민왕)에 대한 고명을 받다.

․충숙왕 복위2년(1333) 왕의 서경 체류 중 검열로 겹권서경참군. 뒤이어 권응교. 서경판관.

․충숙왕7년(1338) 우부대언.

․충숙왕8년(1339) 우대언. 성균관시 주관.

․충혜왕 즉위하자(1340)낙향.

․충혜왕 즉위년(1344) 나주목사.

․충정왕1년(1349) 7월 광양감무.

․공민왕 즉위년(1351) 11월 밀직제학.

․공민왕1년(1352) 개성윤으로 치사.

․공민왕6년(1357) 3월<서경>무일편을 왕․ 중신들에게 강의.

․공민왕10년(1361) 정당문학으로 임명, 치사.

․공민왕12년(1363) 찬성사로 임명, 치사.

․공민왕13년(1364) 금주(錦州:금산)로 은퇴.

․공민왕19년(1370) 9월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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