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윤선좌

똥하 2009. 6. 15. 18:46

 윤선좌(尹宣佐)

  1265(원종 6)∼1343(충혜왕 복위 4).

  고려시대의 문신. 자는 순수, 문하시중을 지낸 관(瓘)의 7 세손이다.

  일찍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영특하여 7세에 벌써 글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계속해서 학문(學文)에 정진하다가 1288년(충렬왕 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김해장서기가 되었다가 비서랑(秘書郞)·직문한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충선왕 초에 좌정언에 임명되고, 이어 우사보·내서사인·선부의랑에 차례로 전직되었다.

  가는 곳마다 강직한 면모와 청렴함으로 이름을 떨쳐 전라도 지방을 안찰할 때, 도율령(都律令)으

로 승직하였다.

  평소에 그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던 충숙왕(忠肅王)은 1313년 즉위한 다음, 성균제주에 제수하

고 부인(符印)을 관장하게 하였다.

  곧이어 사헌집의(司憲執義)에 올라 윤신걸(尹莘傑)· 백원항(白元恒) 등과 더불어『 자치통감(資

治通鑑)』을 진강 하였다.

  1322년(충숙왕 9) 다시 집의에 제수되었을 때,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 등이 왕을 폐하고

심왕 고(瀋王 暠)를 대신 세우려는 책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채홍철 등은 여흥군 민지(閔漬), 영양군 조호(趙瑚) 등과 짜고 백관들을 자운사(慈雲寺)에 모이

게 하고는 충숙왕을 고발하는 글에 서명할 것을 독촉하였다.

  이에 많은 신하들이 앞다투어 서명하려 하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우리 임금께서 잘못한 일

을 알지 못한다. 신하가 임금을 고발하는 것은 개나 돼지도 못할 일이다. "라고 하면서 침을 뱉고

그곳을 떠나 버렸다.

  이로 인해서 대간·문한들이 서명을 하지 않았고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뒤 원에 5년간이나 체류하던 충숙왕의 재정이 궁핍해지자 심왕 고의 일당은 사정을 알고 창고

를 봉쇄하고 물품 운반을 저지하였다.

  이에 감찰관 조관(趙琯)으로 하여금 수송 책임자를 독려하면서 물품을 운송하도록 하였다.

  왕이 귀국하자 판전교가 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로 옮겨 한양윤(漢陽尹)을 겸하였다.

  1331년(충혜왕 1) 이윤(伊尹)의 고사를 들어 앞당겨 치사 하였다.

  한번은 왕이 공주와 함께 지금의 용산(龍山)에 행차하였는데,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 한

양윤이 청렴하고 검소하니 백성들을 잘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깊은 신임을 나타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다시 계림윤(鷄林尹)에 임명(任命)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 · 예

문관대제학감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에 제배되었다.

  1343년 병(病)이 들어 자식들을 모아 놓고 자녀들에게 가업을 공평하게 나누고 "다투지 말고 화

목하게 지내도록 너의 자손들에게도 훈계하라."는 말을 마친 후 의관을 정제하고 세상을 떠났다.

  평생 재물에 욕심이 없었으며 술도 먹지 못했다고 한다.

  남과 더불어 농담하는 일이 드물었고, 노래와 춤 등의 여흥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한 친구와 사귀는 데 신중했고, 사람들과 경서와 사기를 토론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혹 누군가 질문을 하면 경서에 의거하여 대답할 정도로 경학에 밝고 노장(老莊) · 형명(形名) 등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렇듯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당대 표전(表箋)을 많이 지었으며 따르는 학자도 많았다 한다.

 

외손:김흠(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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