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있는 시

[스크랩] 신달자 시인의 감성시들

똥하 2009. 5. 14. 06:07


 


 

 
 


네 그림자를 밟는
거리쯤에서
오래 너를 바라보고 싶다.

팔을 들어
네 속닢께 손이 닿는
그 거리쯤에
오래오래 서 있으면

거리도 없이
너는 내 마음에 와닿아
아직 터지지 않는 꽃망울 하나
무량하게 피어올라

나는 네 앞에서
발이 붙었다.
 
 
나의 사랑

드디어 한 조각으로 남아
여기 걸렸구나

마음에서 떠나보내면
저승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이승의 허공에 깃발로 걸려
찢어지더라도 눈물없이 우는 법
여기서 익히고 있구나

바람아 너무 심하게는 하지마라
한 여자의 심장이 거기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저
깃발 하나 있다고 말하리라

저승밖에 끌어내지 못했으면
허공에 있어도
내 가슴에 있는 것
이제는 단념이란 말
저승으로 보내고

이땅에 더 깊은 뿌리로 선
이땅에 더 높은 기둥에 몸을 묶은
나의 목숨
아 나의 사랑.
 

 




 


가을날

순박한 햇살이 나를 둘러서서
무슨 소원이라도 말하라는 것인가

밤새 뒤척이며
끝끝내 풀지 못한
그 대답도 시원히 풀어 준다는 것인가

어떻게 여름을 질러 왔는지
묻지도 않으면서
저렇듯 푸르른 하늘을 욕심껏 품으라는 것인가

용서하십니까

이 가을을 품어도 좋을 내 마음에
순결한 웅덩이 하나 있기는 있는 것일까.

 
사랑은

사랑은
나의 결점

도시
숨기지를 못한다

사랑은
나의 패배

한번도
완성되는 법이 없다

사랑은
나의 악습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너를 만나러 갈 때는

너를 만나러 갈 때는
햇살을 피해
그늘로 간다

무심한 풀꽃도
마주치면 불꽃
바람도 피해
살을 가린다

한가로운 구름
못난 모과 열매에도
더운 숨결 들리느니

너를 만나러 갈 때 만나는
모든 것은 애무
아 처음 열리는 나의 문을
보겠네.

 

 

자전(自轉)
 
기도하지 않는 날 밤
나는 어둠이 무겁다
새벽으로 돌아 눕는
내 등이 시리고
추운 몸으로 받는
공간이 무겁다.

기도하지 않는 아침
나는 두 발이 무겁다
비틀거리는 걸음
비틀거리는 마음
대낮이 어두워
햇볕 아래서 길을 더듬다.

 

 




 

 

가을 편지

그대는 아는가
나는 지금
소홀산이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는
광릉의 숲길에 와 있다

크낙새는 다 어디로 갔는지
그대 뒷 모습도 보이지 않는
적막한 숲길에서
나는 유서 같은 편지를 쓴다

나무들은 그래도
가을이 가기전에 그대가 오리라고
말하고 있다

가지마다 붉은 축등을 켜 놓고
우리의 만남을 위해
서둘러 황홀한 잔치라도 벌이자는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사약 같은 통증으로
숲을 향해 외치지만

나무들은 더더욱
산너머 바다 너머 그 너머
서둘러 그대가 달려오리라는 것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생은 그대를 기다리는 것
나는 다만 이 한마디로
이 편지의 마무리를 끝내려고 한다
행여 그대 오려거든
아파하고 신음하는 아스팔트 길을 멀리하고
고요하고 적막한
광릉의 숲길로 오라


노을

이대로야 돌아설 수 있겠느냐

지는 해를 붙안고
단 한마디 말 전하기 위해
파초꽃 같은 심장을 토해 놓는
저 마지막 애원

나는 어리석었다
손가락 깨물어 피를 낼지라도
내 심중의 한마디
전했어야 했다.
 

 



 

 

 
그리울 때는

모질게
욕이나 할까부다

네까짓 거 네까짓 거
얕보며 빈정대어 볼까부다

미치겠는 그리움에
독(毒)을 바르고

칼날같은 악담이나
퍼부어 볼까부다.
 
 
늦은 밤에

내가 울 때 왜 너는 없을까
배고픈 늦은 밤
울음을 참아내면서
너를 찾지만
이미 너는 내 어두운
표정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나는 풀이 죽어
마음으로
너의 웃음을 불러들여
길을 밝히지만
너는 너무 멀리 있구나

같이 울기 위해서
너를 사랑한 건 아니지만.

 



 

 

 
백치슬픔

사랑하면서
슬픔을 배웠다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사랑보다 더 크게
내 안에 자리잡은
슬픔을 배웠다

사랑은
늘 모자라는 식량
사랑은
늘 타는 목마름

슬픔은 구름처럼 몰려와
드디어 온몸을 적시는
아픈 비로 내리나니

사랑은 남고
슬픔은 떠나라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슬픔아
이 백치슬픔아

잠들지도 않고
꿈의 끝까지 따라와
외로운 잠을 울먹이게 하는
이 한덩이
백치슬픔아

나는 너와 이별하고 싶다.

 

 

불행

내던지지 마라
박살난다
잘 주무르면
그것도 옥이 되리니
 

 



 
 
* 신달자씨 6년만의 시집 ‘아버지의 빛’ - 경향신문

「아버지를 땅에 묻었다/하늘이던 아버지가 땅이 되었다//땅은 나의 아버지//하산하는 길에 발이 오그라들었다//신발을 신고 땅을 밟는 일/발톱 저리게 황망하다」(「아버지의 빛 1」중에서)

시인 신달자씨(명지전문대 문창과 교수)가 6년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시집 「아버지의 빛」(문학세계사)은 온통 아버지 얘기로 가득하다. 97년 수년간의 투병 끝에 돌아가신 신씨의 아버지는 「증오」와 「연민」의 감정을 수없이 교차하게 만든 분이었다. 타고난 방랑기질로, 수없는 여성편력으로 어머니를 상심케 했던 아버지. 그러나 시를 잘쓰고 잘생긴 외모를 가진 아버지는 신씨에게 절대적인 남성상이기도 했다.

이미 외손자를 둔 할머니가 된 신씨의 새 시집에는 타계 이후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들로 가득하다. 아버지를 화두로 인간의 삶과 죽음, 삶의 고통과 희열을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에게 혹은 아버지를 둔 모든이에게 「아버지의 의미」를 얘기한다
 
신씨는 이번 시집이 『아버지의 발을 한번 더 씻겨드리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 신달자 *

43년 경남 거창생.
현대문학 천료.
시집 <겨울축제> <봉헌문자> <다시부는 바람으로> <백치슬픔>
<아버지의 빛> <아무도 말하지 않는 이 비밀을> 등
 
 

노의웅 그림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choicl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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