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황제국가 고려를 위하여

똥하 2009. 4. 19. 18:27

황제국가 고려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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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천추태후, 고려를 제후국으로 만든 유학 세력과 싸우다

▣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 국왕의 어머니는 대비(大妃)였다. 그러나 <고려사>는 “헌애(獻愛) 황태후 황보씨는 대종(戴宗)의 딸이니 목종(穆宗)을 낳았다”라면서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를 천추태후라고 불렀다”라고 전하고 있다. 태후는 ‘황제의 어머니’란 뜻이다. 천추태후의 할머니는 황해도 황주에 기반을 둔 호족의 딸인 신정왕후 황보씨였는데 남편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었다. 즉, 천추태후의 할아버지는 왕건인데 부성(父姓)이 아니라 모성(母姓)을 따서 황보씨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녀가 모친 성을 따를 수 있게 된 것이 올해(2008년)부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헌애왕후(천추태후)와 그 동생 헌정왕후는 고려 5대 임금 경종과 혼인한다. 경종 역시 왕건의 아들인 광종의 장남이었으므로 헌애왕후, 헌정왕후와 경종은 모두 왕건의 손자녀였다. 신라 사회의 근친혼 유풍인데, 지금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근친혼은 권력을 배타적으로 세습하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황보씨가 혼인했을 때 경종에게는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제1비는 신라 경순왕의 딸 헌숙왕후 김씨였고 제2비는 헌의왕후 유(劉)씨였다. 이들 역시 황보씨 못지않은 쟁쟁한 가문 출신들이었다.

수절 강요, 단호히 물리치다

광종의 장남인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부친의 정책을 부인했다. 광종의 급격 개혁으로 그 자신도 화를 입을 뻔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즉위 뒤 광종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과거사 정리를 단행했다. 즉위 직후 대사면령을 내려 부왕 때 귀양을 간 사람들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고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을 복직시켰다. 심지어 경종은 복수법까지 허용해 광종 때 피화자들이 복수에 나서는 일을 합법화했다. 이에 따라 무수히 많은 복수전이 벌어져 태조의 두 아들 효성태자와 원녕태자까지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헌애왕후는 경종 6년(980) 네 명의 왕비 중 가장 먼저 왕자 송(誦·목종)을 낳는 데 성공했다. 경종의 유일한 왕자였다. 그러나 경종은 이듬해 재위 6년 만에 2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두 살짜리 왕자가 왕위를 이을 수는 없었기에 헌애왕후의 오빠 성종이 즉위했다. 비록 친오빠였지만 성종과 헌애왕후는 정치철학이 서로 달랐다. 성종이 중국식 유교정치 이념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면 헌애왕후는 왕건의 유지에 따라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고 상무(尙武) 북벌정신을 드높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고려사>는 성종이 즉위하자마자 “팔관회(八關會)의 잡기들이 떳떳하지 못하고 번쇄하다고 생각해 이를 전부 폐지했다”고 전하고 있다. 성종은 팔관회나 연등회, 선랑(仙郞) 같은 고려의 전통 행사들을 ‘떳떳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폐지했다.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은 중국식과 다르다는 뜻이었다. 태조 왕건은 사왕(嗣王)들에게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팔관회는 천령(天靈)과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라며 이를 잘 지키라고 당부했으나 태조의 손자인 성종은 ‘이를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고 폐지한 것이다.

성종은 나아가 고려의 정치체제를 중국식 정치체제로 바꾸었다. 당나라 제도를 모방해 고려의 중앙관제를 삼성육부제로 바꾼 것이다. 또한 성종은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중국식 태묘,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 공자에게 제사하는 문묘 등을 설치했다. 성종에게는 중국 것이 우월한 것이고 고려 전통의 것은 하등한 것이었다. 이는 최승로 같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중국식 유교정치 체제란 잣대를 들이대면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성종은 개국 이래 사용해오던 ‘조서’(詔書)라는 용어를 황제의 용어라며 제후의 용어인 ‘교서’(敎書)라고 개칭했다. 내부적으로 황제국을 지향했던 고려는 성종 즉위 뒤 내면까지 제후국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섭정되면서 고려 전통 부활

성종은 유학정치 이념에 따라 과부가 된 젊은 여동생에게 수절을 강요했다. 그러나 경종 사망 당시 열여덟 살이던 헌애왕후는 유교 윤리에 구애받지 않는 고려 여인이었다. 그래서 헌애왕후는 외가 쪽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별다른 망설임 없이 정을 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김치양을 곤장 친 뒤 멀리 귀양 보냈다. 동생 헌정왕후도 숙부 안종(安宗) 왕욱(王郁)과 정을 통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은 재위 11년(992) 왕욱도 경상도 사수현(泗水縣·사천)으로 귀양 보냈다. 헌정왕후는 귀양길에 오른 왕욱을 눈물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서 산기(産氣)를 느끼고 버드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가 대량원군인데 훗날 8대 현종(顯宗)이 된다. 그러나 헌정왕후는 산후조리에 실패해 그만 죽고 말았다. 헌애왕후는 헌정왕후에게 유교식 수절을 강조한 것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종이 재위 16년(997) 38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성종이 왕자 없이 공주만 둘을 낳고 세상을 떠남에 따라 헌애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7대 목종(穆宗·재위 997~1009)이다. 즉위 당시 목종은 이미 18살의 성인이었으나 모후 헌애왕후가 섭정했다. 그가 거주하던 천추궁(千秋宮)은 성종과는 다른 정책을 펴는 개혁의 핵심기관이 되었다. 고려를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환원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천추태후는 귀양 간 김치양을 불러들여 우복야 겸 삼사사에 임명했다. 목종이 추진하는 고려 전통 부활정책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그는 북진을 강조했던 왕건의 유훈을 실천하기 위해 목종에게 네 번이나 서경(西京·평양)에 행차하게 했다. 그때마다 산악과 주진(州鎭)의 핵심 지역에 제사를 지내 전통신에게 가호를 빌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진관사(眞觀寺)를 짓고, 목종을 위해 숭교사(崇敎寺)를, 김치양의 출신지 서흥에 성수사(星宿寺)를, 궁성 서북에 시왕사(十王寺)를 지었는데 이런 절들은 전통 행사 팔관회에서 모든 토속신앙이 어울렸던 것처럼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이 함께 어울리는 장소였다. 천추태후에게 전통 사찰의 창건은 개인의 신앙 차원이 아니라 성종 때 억압받은 고려 전통의 부활이었다. 천추태후가 왕궁 안에 신선 신앙이 담긴 낭원정(?苑亭)이란 정자를 지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낭원정은 고려의 전통적 사상인 선랑(仙郞) 정신 회복을 위한 기지였다. 천추태후는 연등회도 부활시켰는데, 이런 고려 전통정책의 부활이 숭무정신을 되살려 왕건의 유지인 북진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천추태후의 이런 정책으로 성종 때 고사될 뻔한 고려의 전통사상들이 대거 회복되고 고려의 독자성이 회복됐다.

그러나 천추태후의 이런 고려 전통의 부활 정책에 대한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천추태후의 집권은 곧 성종과 중국식 유교정치 체제를 지향했던 유학자들의 실권을 의미했는데, 이들이 반대파를 형성했다. 천추태후가 있는 한 자신들의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쿠데타를 계획했다. 천추태후의 정적들은 태후의 동생 헌정왕후가 숙부 왕욱과 사통해 낳은 대량원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천추태후는 이런 기미를 알고 대량원군을 숭교사(崇敎寺)로 출가시켰으나 정적들이 계속 대량원군 주변으로 모여들자 목종 9년(1006)에는 그를 남경(南京·서울)의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움직임은 그치지 않았다. 천추태후는 불쌍하게 죽어간 동생 헌정왕후가 낳은 아들을 죽일 수 없었다. 냉혹한 정치 현장에서 이런 온정주의는 큰 후환을 낳았다.

 

목종에게 후사가 없자 정적들은 목종이 남색(男色)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목종이 선정왕후 유씨 외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은 것을 이용해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이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정책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아들이 목종의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목종 6년(1003)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를 목종의 후사로 삼으려고 계획했다. 그래야 자신의 정책들이 목종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쿠데타군에 쫓겨 충주로

정적들은 목종의 뒤를 천추태후의 아들이 잇게 되는 현실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천추태후의 아들이 크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종 12년(1009) 정월 임금이 관등(觀燈)하는 사이에 천추궁에 불이 났는데, 이것이 바로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대량원군을 추대하려는 세력들이 일으킨 불이었다. 쿠데타군이 믿는 군사력의 핵심은 서경 도순검사 강조(康兆)였는데, 그는 쿠데타군에 호응해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사> ‘강조 열전’은 “천추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꺼려 내신(內臣)을 보내 절령(?嶺)을 수비하게 하고 행인들을 차단케 했다”고 전하고 있다. 쿠데타 세력이 강조를 불러들이자 천추태후는 개경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절령을 방어하게 한 것이다. 그사이 개경에서는 쿠데타 세력과 천추태후 세력이 맞부딪쳐 혼란이 계속됐다. 싸움의 성패는 절령에서 강조를 막아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는데, <고려사> ‘강조 열전’은 강조가 5천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쿠데타 세력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사> ‘강조 열전’은 “목종이 벌써 현종(대량원군)을 맞으러 사람을 보낸 것을 모르고 강조가 분사감찰 김응인(金應仁)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맞아오게 했다”고 적고 있다. 쿠데타 세력들은 ‘목종이 대량원군을 맞으러 사람을 보냈다’라고 대량원군을 후사로 지목한 인물이 목종인 것처럼 사실을 날조했던 것이다. 불과 서른 살의 목종이 느닷없이 대량원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하야할 아무런 이유는 없었다. 주도권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들이 부족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목종이 대량원군을 후사로 삼았다’라고 사실을 날조한 것에 불과했다. 목종은 강조에 의해 폐위당하고 현종이 추대됨으로써 쿠데타는 성공했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 등 천추태후 세력 7명을 살해하고, 태후의 친척 이주정(李周楨) 등 30여 명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목종은 태후와 함께 울면서 법왕사(法王寺)로 나갔다가 다시 충주(忠州)로 향했다. <고려사> ‘목종조’는 이때 “태후가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왕이 친히 밥상을 차려드리고 태후가 말을 타려고 하면 왕이 친히 고삐를 잡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목종은 충주에 가서 모후와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이 소박한 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쿠데타 세력은 목종과 천추태후가 살아 있는 한 언제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조는 김광보(金光甫)를 보내 목종에게 독약을 전달했는데, 목종이 마시기를 거부하자, 강조는 중금(中禁) 안패(安覇)에게 “목종을 죽이지 못하면 멸족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안패는 목종을 살해한 뒤 자결했다고 <고려사>는 전하고 있다. <고려사> ‘강조 열전’은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행위에 대해서 관리와 백성을 막론하고 통분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현종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거란이 침입해 문죄했을 때에야 이를 알게 되었다”고 모든 책임을 강조 한 사람에게 돌리고 있으나 이는 쿠데타 세력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인 것이다. 이때 천추태후의 나이 46살이었으나 쿠데타 세력은 그를 죽이지는 못했다. 목종과 김치양 사이의 아들까지 모두 죽여 재기할 싹을 자른데다 태조의 손녀이자 선왕 경종의 부인인 그마저 살해하는 것에는 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목종이 죽은 뒤 그는 외가의 고향인 황주(黃州)로 이사해 21년을 더 살다가 현종 20년(1029) 정월 6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고려의 전통은 살았다

천추태후는 비록 쫓겨났지만 정적들도 그가 되살린 정책들을 모두 없애지는 못했다. 현종은 즉위 직후 낭원정을 헐어버려 천추태후의 정책을 폐기하는 듯했으나 이듬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열었다. 현종이 불교와 전통사상의 토대 위에서 유학을 가미해 조화를 이루려 한 것은 천추태후의 정책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는 고려의 현실을 보여준다. 천추태후가 12년 동안 추진한 정책들은 고려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천추태후가 있었기에 고려의 전통사상들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중국의 사상과 체제의 홍수 속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choicl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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