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37-1 고려, 조선왕조의 교체(1)

똥하 2009. 4. 11. 23:38

가. 홍건적의 침입과 고려 후기의 세력 변화

(1) 홍건적의 침입

원의 지배하에 들어간 고려 후기 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드렸습니다. 이미 고종 45년(1258)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철령이북을 그들의 영토에 편입하였고, 고려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한 1270년에는 평양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자비령 이북을 차지하는가 하면,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1273년 제주도에는 탐라총관부를 두어 그들의 목마(牧馬)장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동녕부는 20여년이 지난 충렬왕 16년(1290)에 만주로 옮겼고 탐라총관부도 1300년 탐라만호부가 설치되면서 고려에 귀속시켰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이를 수복할 때까지(1356) 그들의 영토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의 31대 공민왕(恭愍王/1351∼1374)이 즉위했는데, 그가 충숙왕의 둘째아들로서 비록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라는 몽고식 이름을 갖기도 했고, 비는 원(元)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였으나 그의 어머니가 고려 여인이고,1341년(충혜왕 복위 2) 숙위(宿衛)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가진 멸시와 고초를 당하면서 울분을 삼키다가 고려왕이 되어 개경으로 왔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가 원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지 않았겠지요.

이때 중국에서는 한산동의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1351),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공민왕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원 나라 배척운동을 일으켜, 1352년(공민왕 1) 변발(髮)·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없애고, 1356년 몽골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폐지하였습니다. 이어 원나라 기황후의 친정 오라버니인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주성 회복운동이 한창 일 때 난대 없는 불청객이 들여 닥쳐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는데 이를 홍건적의 침입이라고 합니다. 홍건적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으나 고려로서는 이들을 지배한 적도 없고, 그들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으나 이들이 중국에서 난을 일으키자 원의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수휘와 곽자흥 그리고 주원장이 이끄는 소위 서계는 강남지역을 근거로 하였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한산동과 유복통, 이이(李二) 등이 이끄는 이른바 동계는 심한 타격을 받고 일부는 남으로 내려가 서계와 합세하였으나 미쳐 빠져 나가지 못한 동계의 무리 중에는 만주로 이동, 요양(遼陽 / 랴오양)을 근거지로 저항을 계속하다가, 다시 만주의 홍건적을 원조(元朝)에서 타도하자 이들은 도망할 곳을 찾아 압록강을 넘게 된 것이 고려를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1359년(공민왕 8) 12월 압록강이 결빙(結氷)되자 모거경(毛居敬) 등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일거에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철주(鐵州) 등을 차례로 함락하고 이어 서경(西京:平壤)을 함락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이방실(李芳實), 안우(安佑) 등이 이들을 반격하자, 홍건적들은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다시 고려군의 추격을 받고 궤멸되어 겨우 잔병 300 명이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는데 이것을 홍건적의 1차 침입이라고 합니다.

그 후 홍건적들은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침범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다시 반성(潘城)·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이 10 여 만의 홍건적으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고려의 2차 침입을 하였습니다. 홍건적이 절령(慈悲嶺)의 방책(防柵)을 깨뜨리고 개경(開京)으로 진군한다는 보고가 있자 공민왕은 남쪽 복주(경북 안동)로 난을 피하고 도지휘사(都指揮使) 이방실, 상원수 안우 등이 홍건적과 대적하여 싸웠으나 그 수에 밀려 패하고 수도 개경이 이들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홍건적은 이후 수개월 동안 개경을 중심으로 머물면서 마음대로 잔학한 짓을 자행하고 그 일부는 인근지역은 물론, 원주(原州)·안주(安州) 등을 약탈하자, 이 해 12월 복주에 다다른 공민왕은 정세운·이방실·안우·김득배(金得培) 등을 보내어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 개경을 수복하고 난을 평정하였습니다(1362)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東北面)의 상만호(上萬戶)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는 휘하의 2,000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서 적의 괴수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목을 베고 개경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수훈을 세웠고, 이 때부터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바다에서는 왜구의 출몰이 잦아 이의 퇴치에도 여간 고심하지 않았는데 이런 혼란기가 이성계에게 날개를 달아 주어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392년에는 조선왕조의 창업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삼한의 새로운 군주가 되었습니다.

(나)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가 동북면상만호로서 독로강만호 박의의 난을 진압하고(1361), 이어서 홍건적 토벌의 공으로 1362년에는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고려 국방의 요충을 맡게 되었고,

홍건적이 물러가자 다시 왜구의 출몰이 끊이질 않았는데 이를 토벌하면서 그의 이름과 함께 벼슬도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성계의 본관을 전주(全州)로 하고 있어서 전주가 그의 연고지임에는 틀림없고, 지금도 전주에는 경기전(慶基殿)이 있어서 사적 제 339호로 보존되고 그 전각 안에는 보물 제 931호인 태조 이성계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 자신은 전주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고조부(4대조)인 이안사(李安社 : 穆祖/?~1274)가 전주의 호족으로서 할거하고 있던 중 새로 부임한 관리와 다투고,

그 보복이 두려워 강원도 삼척으로 갔다가 다시 함경도 덕원으로 옮겨, 고종 때 고려의 벼슬을 받아 지의주사(知宜州事)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원(元)이 고려를 다시 침공하자 1258년 조휘(趙暉)가 영흥지방을 원에게 바치고 쌍성총관부를 설치,

그가 쌍성총관이 되면서 그 세력하에 있던 덕원의 이안사도 원에 귀화한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남경 오천호(南京五千戶)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벼슬을 원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다루가치란 몽고가 정복지에 파견한 그들의 관리라는 것은 많이 들었지요.

이안사(李安社)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翼祖/?~?)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호(千戶)라는 원(元)나라의 벼슬을 받았으나, 뒤에 여진족(女眞族)의 기습을 피하여 함경도 경흥(慶興)지방에 도피하였다가, 후에 고향인 덕원으로 돌아왔는데, 천호란 몽골의 군사조직이자 행정단위로 유사시 1000명의 군인을 동원할 수 있는 부락(부족)크기의 단위를 말하며, 천호 위에는 다시 만호가 있었으나 이는 명예직에 가깝고 실질적인 실세는 천호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춘(椿:度祖/?~1342)은 어머니가 등주최씨(登州崔氏) 기열(基烈)의 딸로서, 원나라로부터 아버지의 천호 관직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고, 처음에 박씨와 결혼하여 탑사불화(塔思不花)와 자춘(子春)을 낳았으나, 얼마 후 박씨가 죽자 쌍성총관(雙城總管)의 딸 조씨(趙氏)와 재혼하고 의주(宜州/덕원)에서 화주(和州:함흥)로 옮겼다고 합니다. 화주로 옮긴 것은 후처인 조씨가 조휘(趙暉)의 손녀이므로, 처가의 정치세력을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되는 이자춘(李子春 :桓祖/1315 ~ 1361)은 이춘의 뒤를 이어 함경도 쌍성(雙城:永興)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천호(千戶)로 있을 때, 중국대륙에서는 홍건적이 난이 일어났고, 고려에서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시작되었는데, 이런 시기에 이자춘은 눈치가 빨랐던지 국제 정세에 민감했던지 아니면, 같은 민족으로 애국심이 깊었던지 1355년(공민왕 4)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얼굴을 내밀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

소부윤(少府尹)이라는 벼슬을 받았고, 다음해(1356)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내응(內應)하여 고려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라는 벼슬과 함께 저택을 하사 받아 개경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함흥으로 돌아가 그곳 제일인자가 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곧 함흥으로 돌아갔습니다.

충신(忠臣)과 역적(逆賊), 이것은 왕조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조상과 뿌리를 중히 여기는 우리들에게는 지금도 매우 중요한 가치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당시 총관이었던 조소생(趙小生/?~1362)은 한양(漢陽)조씨의 후예로서 그의 증조부 뻘인 조휘가 몽고 침입 때(1256) 투항해서 안내역을 자청하고 반대파를 처단하여 함흥일대를 몽고에 바치고 그 공으로 쌍성 총관이 되었습니다.

이 때 이성계의 고조부가 되는 이안사는 고려의 의주지사를 지내다가 다시 원의 다루가치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고려 왕실 입장에서 이안사가 역적은 아닐지라도 충신은 될 수 없었겠지요.

그 후 조휘의 자손은 쌍성총관직을 세습해서 조소생에 이르렀고, 이안사의 자손은 천호직으로 세습해서 이자춘에 이르렀습니다. 이자춘에게는 항상 껄끄러운 상대 조소생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보고 쉽게 고려에 귀순하여 쌍성 탈환에 공을 세우고, 개경에 잠시 머물다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흥으로 돌아가 함경도 지방을 다스리다가 죽고,

그 뒤를 아들 이성계가 물려받았습니다. 요즘의 상황으로 이를 풀어보면 이성계의 집안이나 조소생의 집안 모두가 원에 귀부(歸附)하여 영화를 누렸고, 국적도 몽고로 바꾸었다가, 몽고(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이성계 집안은 현재의 지위를 보장 받는다는 조건으로 다시 변신하여 고려로 돌아왔고, 조소생은 고려에 다시 귀순한다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소생은 고려귀순을 끝까지 반대하고 쌍성이 함락되자 여진으로 도주한 뒤, 만주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나하추(納哈出/납합출/?~1381)을 찾아가 쌍성을 치자고 설득하여 나하추가 수만 군사로 쳐들어 왔으나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 탈환에 공을 세우고 이자춘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가 된 그의 아들 이성계(李成桂)가 이끄는 고려 군에게 함흥평야의 대회전(大會戰)에서 참패하고 달아났습니다.

이 후 고려 조정은 북원과의 관계,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매우 어렵게 되었고, 이것이 북변의 무장이었던 이성계를 중앙 정치무대로 불러들이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로 하여금 신 왕조 개창의 힘을 모으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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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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