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37-2 고려, 조선왕조의 교체(2)

똥하 2009. 4. 11. 23:39

나. 고려(高麗)·조선(朝鮮) 왕조(王朝)의 교체(交替)

들어가기 전에,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단순한 왕조교체에서, 교과서적인 내용은 매우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고려말 공민왕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31대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고려사회 내부에는 원의 지배를 80년 가까이 지낸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속방에 불과했던 고려보다는 어떤 연줄로 던 상국(上國)인 원에 귀부(歸附)하여 권세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공민왕 자신도, 조모와 증조모가 원나라 여자였고, 그 왕비 역시 원의 공주였다는 점, 그리고 자신도 연경에서 지냈기 때문에 왕으로서 권위를 세우는데 원나라의 배경에는 부족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왕이 되고 처음 시작한 일은 왕권을 세우는 일이겠지요. 몽고풍금지, 관제복구, 친원파 숙청, 영토회복 등은 그 자신 원나라의 세력 배경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누적되면서 위험수위가 되었을 때, 대륙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 원이 기울고 명이 서면서, 원나라로 돌아가기는 이미 때를 놓치고, 자연적으로 새로운 명나라와 손을 잡고 살길을 찾아야 했겠지요. 그래서 그의 치세 기간은 배원(背元) 친명(親明)이라는 엉뚱한 방향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다가 인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왕이 10세의 어린이로 왕이 되었으니,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어려운 일을 할 수는 없겠지요, 왕실의 권위는 떨어지고 권신에 의해서 정권이 좌우될 때, 왜구라는 반갑지 못한 손님이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자 이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전쟁 영웅은 만들어지고, 이래서 이성계가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으나,

그 혼자만으로는 오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세력을 몰아내기에는 한계가 있었겠지요. 여기에서 대외적으로 명이라는 국제적인 힘을 빌려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안으로는 불평 많은 신진관료들과 힘을 모아, 경제적 토대부터 마련하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여, 이를 실현시키고, 민심을 얻을 명분을 얻기 위해 유학을 바탕으로 선양의 형식을 빌려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습니다.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이나 외세의 동향과 결부해서 조선왕조 성립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자 생각했으나, 여러 가지 한계가 따릅니다. 그냥 부담없이 재미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 공민왕(恭愍王)의 개혁정치

고려왕실에 유입된 몽고의 혈통

고려가 몽고의 지배로 들어간 13세기 후반부터 고려는 몽고의 심한 간섭을 받게 되었고, 그 가운데 왕의 시호(諡號)에 앞에는 충(忠)자를, 끝에는 조(祖)나 종(宗) 대신에 왕(王)자를 붙였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지요.

이런 첫 번째 왕이 충렬왕이었고, 그는 원이 세조 쿠빌라이의 딸 제국공주 홀도노갈리미실(忽都魯 里迷室)을 비로 마지하여 충선왕(26대)을 낳았고, 충선왕 역시 몽고 여자 세속진(世速眞)을 의비(懿妃)로 삼아 충숙왕(27)을 낳았는데, 충숙왕도 원(元)나라의 영왕(營王)의 딸 복국장공주( 國長公主)를 비롯해서, 남양(南陽)인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및 백안홀두(바이앤후두/伯顔忽頭)의 딸 경화공주(慶華公主) 등 여러 명을 비로 삼았습니다.

복국장공주가 명덕태후를 투기하므로 정안공(定安公)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자리 보전을 하면서 두 아들을 얻었는데 맏아들 정(楨)이 충혜왕(28대)이 되었고 둘째 아들이 후일 공민왕이 되었습니다.

공민왕의 초 명은 기(祺), 후에 전( )으로 고쳤고, 몽고식 이름은 백안첨목아(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 1341년(충혜왕 복위 2)부터 숙위(宿衛)로 원나라에 머물렀고, 그의 동복형 충혜왕이 죽고, 충혜왕과 원나라 덕녕공주 사이에 난 충목왕(忠穆王/1337~1348)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할 때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가 4년 후 충목왕이 12세에 죽자,

정승 비빈 등이 이제현을 원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리고 보탑실리왕(普塔失理王/충혜왕)의 동복동생인 왕기(공민왕 : 당시 19세)나, 보탑실리왕의 서자(庶子)인 왕저(王 /충정왕 : 당시 11세) 중에서 왕을 삼아줄 것을 청원하여, 1349년 원으로부터 왕저가 왕으로 책봉되어 즉위하였는데 이가 충정왕입니다.

충정왕(忠定王/1337~1352)은 1348년(충목왕 4)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에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에 충목왕(忠穆王)이 후사가 없이 죽자 1349년 원(元)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어 7월에 즉위하였고, 어머니는 찬성(贊成) 윤계종(尹繼宗)의 딸로서 희비(禧妃)가 되었는데, 밀직 이승로와 대언 윤택 등이 백성들의 인망이 강릉대군 기(祺)에게로 돌아갔다고 보고, 곧 중서성(원의 중심 권부)에 글을 올려 역대 고려 국왕 중 형제숙질간에 왕위를 계승한 고사와 왕이 여러 국무를 감당할 수 없는 정상을 말하여, 그의 왕위계승에 부당함을 원조(元朝)에 고했다가, 후일 이승로는 선천구당, 윤택은 광양감무로 좌천되기도 하였습니다.

왕이 나이가 어려 외척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이 세도를 부려 기강이 해이해지고, 밖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국정이 문란하였습니다. 이에 충정왕과 함께 충목왕의 후계자로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江陵大君:恭愍王)이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여 민심이 그에게로 쏠리자, 원 지정 11년(1351) 10월 임오일에 강릉대군 기를 왕으로 삼고, 단사관(斷事官) 완자불화(完者不花)를 고려 조정에 보내어 창고(倉庫)를 봉(封)하고, 국새(國璽)를 거두어 가면서 충정왕은 강화도로 추방되었다가 다음해에 독살되었습니다.

공민왕이 책봉되자 그의 서삼촌이 되는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타스티무르/탑사첨목아(塔思帖木兒)이 한 때 중이되었다가 원나라로 망명, 순제에게 아첨하여 왕에 책봉되고, 기황후와 최유(崔濡), 김용(金鏞) 등과 공모하여 이후 여러 차례 고려를 괴롭혔는데, 공민왕의 앞날이 평탄하지 않음을 예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해(1351) 12월에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원으로부터 돌아와 경령전(景靈殿)을 배알하고 강안전(康安殿)에서 고려의 31대 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공민왕의 반원 정책

그가 즉위한 1351년은 중국에서는 한산동이 백련교도의 무리들을 모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바다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으며, 국내에서는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권문(權門)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 큰 난관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의 치세 23년간 그래도 초기 십 수년간은 그의 뜻대로 정치개혁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원나라 황실이 한족의 저항으로 궁지에 몰려 간섭할 겨를이 없었으며,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던 방국진이나, 장사성, 한임아 등이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려에 방물(方物)을 보내고 협력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강자로서 혹은 중제자로서 이들을 달래고 어루만지면서 국정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위 초년에 감찰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君)의 봉록(俸祿)을 정지시키고, 호복과 변발이 선왕의 도리가 아니라는 상소를 받자 기꺼이 머리를 풀고 호복을 벗었으며, 조일신(趙日新/?~1352)의 무리가 변란을 일으키자,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인복(李仁復)에게 밀지를 주어 이를 소탕케 하였고, 이어서 변발(髮)·호복(胡服)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으며,

1356년 몽골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였습니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는 것 등은 널리 알려진 사실 입니다.

홍건적의 침입과 난신적자(亂臣賊子)들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있을 때(1360), 공민왕은 수도를 떠나 광주(廣州), 이천(利川)을 거쳐 음죽현을 지나 12월에 경상도 복주(福州/安東)에 이르게 되었는데, 대개는 북쪽에서 적이 쳐들어 오면, 강화도를 비롯해서 섬으로 피난하는 것이 상례(常例)였으나, 이 때는 바다에는 왜구(倭寇)가 득실대고, 홍건적 역시 수전에 익숙하기 때문에 내륙 산길을 따라서 남으로 파천(播遷)하게 되었습니다.

홍건적을 물리친 이듬해 1361년 2월 왕이 복주를 떠나 상주(尙州)에 이르자 목사 최재(崔宰)가 왕을 극진히 공진(供進)하였으나, 좌우 측근들에게 아무런 선물(뇌물)도 주지 않자 측근들이 목사를 헐뜯어 관직을 파면하였습니다.

이 때 간신(姦臣) 김용(金鏞/?~1363)이란 자가 있었는데, 공민왕이 숙위로 원나라에 갔을 때 시종한 공으로 공민왕이 즉위하자 응양군상호군이 되었다가 다시 밀직부사로 수충분의공신(輸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고, 여러 관직을 차지하고 있다가,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이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우자 이를 시기하여, 정세운을 죽이라는 거짓 왕명을 안우에게 내려, 안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였고,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行宮/왕이 머무는 거소)으로 나아가 왕을 뵙고자 중문에 이르자 문지기로 하여금 몽둥이로 머리를 쳐서 죽이게 하고서는 왕에게는 "안우 등이 제멋대로 주장(主將) 정세운을 죽인 것은 왕을 우습게 여긴 탓"이라 여겨서 그를 죽였다고 왕에게 거짓 고하였고, 이를 모르는 공민왕은 전교(傳敎)를 내려 드디어 "안우 등은 불충하게 제 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는데 안우는 이미 처단을 받았다. 만일 김득배, 이방실을 잡는 자가 있으면, 3급(級)을 올려 쓰리라"라는 방(旁)을 전국에 부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이방실은 용궁(龍宮)현에서 김용이 보낸 오인택과 박춘, 정지상에게, 김득배는 기주(基州/경북 영주)에서 변을 듣고 도망하여 산양(山陽)현에 숨었으나, 김유, 정지상 등이 찾아 목을 베고 상주(尙州)에서 효수(梟首)하니 이를 보고 슬퍼하지 않는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해 7월에는 조소생, 탁도경의 부추김을 받은 나하추가 군사 수만명을 거느리고 홍원 달단동에 진을 치고 고려를 위협하자 이성계가 이를 물리쳤고, 원나라에서는 덕흥군이 순제에게 아첨하고 기황후가 그의 친정 식구들이 몰락한데 대한 앙 갚음으로 12월 드디어 덕흥군을 고려왕에 봉한다고 서북면 만호 정찬(丁贊)을 통해서 고려에 통고했고, 고려에서는 김용이 이에 내응해서 공민왕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공민왕 12년(1363) 2월에 왕은 충주를 떠나 환도 길에 올랐으나 홍건적의 난으로 궁성이 불탔음으로 강안전의 수리를 기다려 흥왕사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머물면서, 3월에는 찬성사 이공수(李公遂)와 밀직제학 허강(許綱)을 원나라에 보내서 진정표(陳情表)를 올리고, 덕흥군의 고려왕 책봉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국내에서는 윤 3월 신미일 밤 5경에 김용의 사주를 받은 김수(金守), 조련(曹連) 등 50 여명이 행궁인 흥왕사로 달려와 문지기를 죽이고 바로 들어가 말하기를 "나는 황제(원의 순제)의 명령을 받들고 왔다"하고 지름길로 왕의 침전(寢殿)으로 들어가 입직내시를 죽이니, 숙위하던 군사들이 모두 도망하였는데, 내시(內侍) 이강달(李剛達)이 왕을 업고 샛문으로 나가 대비의 밀실(密室)로 달려가 이불을 뒤집어 씌어 숨겨 놓고, 공민왕의 비 노국공주가 그 앞에 가로막고 앉아서 화를 면했습니다.

적도들이 침전으로 들어갔을 때, 공민왕과 모습이 닮은 환자(宦者) 안도적(安都赤)이 자기 몸으로 왕을 대신하고자 왕의 잠자리에 누웠는데, 적도들은 이를 죽이고 왕을 죽였다고 좋아 날뛰면서 만세를 불렀고, 이어서 우정승 홍언박(洪彦博)의 집으로 달려가 그를 죽이고, 그 일파를 헤친 후 다시 행궁인 흥왕사에 모였을 때, 누군가가 왕이 살아 있음을 알렸고,

이에 적도들은 이를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주상을 놀라게 하지 말라"하고 도당 40 여명을 나누어 궁중의 모든 직책을 맡게 한 다음, 음식 만드는 자를 재촉하여 음식을 갖추어 올리게 하여 왕으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고 나오도록 유도하고는, 도당을 나누어 경성(京城)으로 들어가 그곳에 머물고 있던 재상들을 죽였습니다.

이때 좌정승 유탁(柳濯)은 여러 재상들과 초하루마다 나라의 복을 비는 일로 묘련사에 있다가 이 변을 듣고, 순군부에 달려 갔을 때, 적도의 괴수 김용은 일이 잘못 되었음을 눈치채고,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제공들은 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왕이 계신 곳에 가시오. 나는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뒤따라 가리다"하고는 그와 한편이었던 잡혀오는 적도들을 심문없이 그 자리에서 척살하여 그들의 입을 봉해 버렸고,

이윽고 최영, 우제, 안우경, 김장수 등이 경성으로부터 행궁으로 달려가 적도들을 섬멸하고 난이 평정되자 왕은 밀실에서 나와 그 날로 경성으로 침소를 옮겼습니다. 이를 깜쪽같이 속인 김용은 흥왕사 적도를 토벌한 공으로 흥왕공신(興王功臣)을 정할 때 1등 공신에 책록 되어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 받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흥왕적의 무리 90여명을 체포하고 이를 심문했을 때, 그가 제조(提調/최고책임자)가 되어 한 사람도 심문하지 않자, 드디어 의심을 갖게 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모든 사실이 발각되어 밀성(密城/密陽)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계림부(鷄林府/慶州)로 이송, 투옥 후 처형되어 그 수급을 경성으로 보내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그 도당 10여명도 참수하였는데, 이런 것들이 당시 고려 조정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의 고려 침입과 목화의 전래

원나라에서는 덕흥군이 최유와 환자(宦者) 박불화 등과 모의하여 황제를 충동하여 그가 고려왕에 책봉되고 기삼노보를 원자로하여 고려에 침공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경천흥을 서북면도원수로 삼아 이를 막아야 했는데, 이 때 왕은 다시 남쪽으로 파천을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 공민왕 13년(1364) 정월에 최유가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까지 왔으나,

최영과 이성계 등에게 패하고 돌아갔다가, 원나라에서도 일이 잘못됨을 알고 그 해 9월에 공민왕을 복위(復位)하고 원나라에 있던 고려 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는데 이 때 문익점(文益漸 / 1331~1400)은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元)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붓 대롱 속에 목화씨를 감추어 가져왔고, 이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하여 의생활에 새로운 혁신을 일으킬 줄은 당시로서는 아무도 몰랐다고 합니다.

공민왕 14년(1365) 2월 노국공주가 만삭이 되었으므로 죄수를 사면하고, 경사가 나기를 기다렸으나, 공주가 난산(難産)으로 고통을 당하자 다시 대사령을 내리고 천지신명께 기원하였으나, 이런 보람도 없이 공주가 훙(薨)하니, 왕은 이를 매우 슬퍼하여 4도감(都監)과 13색(色)을 설치하여 상사(喪事)에 이바지하게 하고, 참경회(懺經會)를 빈전(殯殿)에 설치하여, 평소에도 불교를 독실히 믿었으나 이 때에 와서 더욱 불사(佛事)를 일으켰으며, 정치에는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신돈, 그는 요승인가?

이런 경황 중에 신돈(辛旽/?~1371)이 등장하여 정치무대 전면에 나타났는데, 그는 영산현(경냠 창녕)에 있는 옥천사(玉泉寺)의 종의 아들로서, 자라서는 법명을 편조(遍照)라하고, 승려가 되어 서울에 와서 보시(布施)를 권하며 다니던 중 김원명(金元命)의 추천으로 왕을 접견하고, 아무리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라도 해진 납의(衲衣) 한 벌로서 지내니 도인 같은 그의 행동에 왕이 더욱 공경하고 감복해서, 의복과 음식을 정결히 하여 그를 대접하자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이승경과 정세운 등은 그를 죽여 없애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왕은 그를 비밀히 피하게 하여, 권신들의 건의를 무마할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이승경과 정세운 등이 죽고,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 앞에, 편조가 머리털을 기르고서 두타(頭陀/거사)가 되어 다시 왕을 뵈옵게 되자 왕은 그에게 청한거사(淸閑居士)란 칭호를 주고, 사부(師傅)라 일컬어 국정을 자문(諮問)하니 시류에 민감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갖은 풍상을 겪은 공민왕으로서는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은 친당(親堂)이 뿌리처럼 서로 엉켜 허물을 서로 헐 뜯거나 덮어주고,

초야의 신진들은 겉으로는 감정을 감추고 안으로는 명망(名望)을 추구했다가 몸이 귀하게 되면, 자기의 빈천한 과거를 부끄럽게 여겨 숨기기에 급급하고 드디어는 명문과 인척을 만들어 지난날의 뜻을 버리게 되며, 유생들은 유약하면서 문생(門生/과거합격자)과 좌주(座主/과거에 합격 시켜준 시관), 동년(同年/같은해의 과거 합격자)의 칭호를 쓰고 당을 만들어 사정(私情)을 따르게 되니, 이들 세 부류는 쓸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권력과 세속에 때묻지 않고, 정치적으로 아무런 부담이 없으며,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편조를 앞세워 정치개혁을 단행코자 했습니다.

이에 1365년 12월에 편조에게 "수정 이순논도 섭리 보세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도첨의사사사 판감찰사사 취성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 판서운관사(守正 履順論道 燮理 保世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領都僉議使司事 判監察司事 鷲城府院君 提調僧錄司事 兼 判書雲觀事)"라는 긴 벼슬을 그에게 내리고, 중의 행실을 버리고 세상 구제를 그에게 청하고, 왕이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겠다는 맹세하는 글을 썼는데 "사(師)가 나를 구원하고 내가 사를 구원할 것이다. 죽고 삶을 같이하여 다른 사람의 말에 의혹됨이 없을 것이니 부처와 하늘이 이를 증명할 것이다"하였고, 이에 신돈이 국정에 참여하여 권세를 잡은 지 30일 만에 원훈(元勳)과 명망(名望)있는 자를 파면시켜 내쫓고 재상과 대간이 모두 그의 입에서 결정되었다.라고 사서(史書)에서는 적고 있습니다.

이 때 최영도 왜구 토벌에 소흘하고 사냥을 했다 해서 계림윤(鷄林尹/경주)으로 좌천되었으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신돈이 판사가 되자, 지레 겁먹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불법으로 빼앗았던 토지와 노비를 그 본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이 많았으며, 천한 노비들이 양민이 되기를 호소한 자는 모두 이를 들어주어 이들로부터 "성인이 세상에 났다"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는 득(得)을 보는 자가 있는 반면, 손해를 보는 상대가 있고, 또한 그 상대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왕의 신임하나만 믿고 이런 난제들을 풀기에는 떠돌이 승려였던 편조로서는 그 벽이 보다 높고 두텁게 느낄 수 있었겠지요.

권력의 새판을 짜기 위해서는 천도가 첩경이라고 생각하고,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한 개경을 버리고 충주(忠州)로 서울을 옮기기 위해,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로 왕을 유혹, 스스로 오도도사심관(五道都事審官)으로 이를 실행 하려다 왕의 불신을 받으면서, 아무런 뿌리없이 휘두른 사정의 칼날이, 부메랑이 되어 이제는 자기를 향하게 되고, 역모(逆謀)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다는 죄목(罪目)으로, 수원(水原)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습니다.

사서(史書)에는 그를 요승(妖僧)이라고 폄하(貶下)하고 있으나, 천비(賤婢)의 소생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라 임금과 말을 나란히 하고 담소 하였으며, 그의 비첩(婢妾) 반야를 공민왕과 사통케하여 모니노(우왕)를 낳게 하고 대를 잇게 하였다는 것은 고려의 국운을 재촉했는지, 지연시켰는지는 아직도 역사의 장막에 가려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2) 배원(背元)과 친명(親明)

줄다리기 외교

1368년 원나라 황실이 명태조 홍무제에게 대도(연경)를 내주고 북원으로 쫓겨나자 고려에서도 공민왕 18년(명 홍무 2년) 공식적으로 원(元)나라 연호인 지정(至正)을 버리고,이듬해(1370) 6월부터 명나라 연호 홍무(洪武)를 사용하면서, 뱃길로 머나먼 남경(南京)까지 공물(貢物)을 바치기 위해 사행(使行) 길을 떠났고, 풍랑을 만나 많은 사람이 바다에 수장(水葬)되기도 하였으며,

잇속 빠른 정상배들은 친원파에 이어 친명파가 등장하고, 바다에는 왜구들이 처음에는 해안에서만 노략질을 하다가 뭍으로 올라와서 살인과 약탈로 분탕질을 하는 가운데 공민왕은 죽은 그의 비 노국공주를 위해 많은 영전을 지으면서 국고와 민생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5월의 가뭄 끝에 단비라도 내리면, 영전의 공사가 지연되는 것을 염려하여 비가 그치도록 기도를 올렸다고 하니 그의 총명과 함께 명운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징조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명나라가 건국초기에는 북원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서,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고려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는데,

홍무 2년(1369) 4월에 명 태조는 부보랑 설사(薛斯)를 사신으로 고려에 보내어 자기가 천하를 얻었음을 알리고, 예부터 고려는 중국과 혹은 신(臣)으로 혹은 손(賓)으로 사귀었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설사가 조서를 전하고 양(羊) 두 마리를 왕에게 바치고 돌아갈 때 왕은 말안장과 의복을 그에게 주었으나 받지 않았으며, 같은 시기에 북원(北元)에서도 오왕, 회왕, 쌍합달왕 등이 잇달아 사신들을 보내어 고려에 환심을 사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고려는 북원과의 관계를 끊고,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이성계, 지용수, 이인임, 양백연을 보내어 동, 서, 북면의 요해지에 만호와 천호를 두고 장차 동녕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며, 이때 서원군(瑞原君) 노은(盧은)이라는 사람이 멋모르고 북원의 조서를 가지고 황주에 이르렀을 때, 공민왕은 대장군 송광미를 보내어 그 일행 18명을 잡아 간첩혐의로 모두 처형하였고, 기황후의 생질(甥姪)들을 이와 연통했다 해서 또한 처형하였습니다.

목호(牧胡)의 난

공민왕 21년(1372) 명나라에서 비서감 유경원을 간선어마사로 삼아 개남과 같이 탐라에 보냈더니 탐라의 목호(牧胡/몽고의 목마 관리자)인, 필사초고독(必思肖古禿)·합적석질리(哈赤石迭里)·불화관음보(不花觀音保) 등은 "세조(쿠빌라이)가 방축(放畜)한 말을 원(元)나라의 적인 명나라에 보낼 수 없다"고 거절하고, 명의 간선어마사 유경원과 고려의 제주 목사 이용장(李用臟)을 죽이고 반역하여, 개남은 탐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서 명나로 돌아 갔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명태조에게 사신을 보내어 탐라를 정벌할 것을 주청하였고, 명태조는 머나먼 탐라를 정벌한 다는 것이 당시의 정황으로 봐서 불가 하였기 때문에 좋은 말로 고려를 위로 하였습니다.

공민왕 23년(1374) 명나라에서는 다시 예부주사 임밀(林密)과 자목대사 채빈(蔡斌)을 보내와서 탐라(제주)의 말 2천필을 바치게 하자, 한방언을 탐라에 보내어 말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이때도 목호들이 반발해서 다만 3백필만 보내왔습니다. 이에 고려에서는 탐라를 치기로 결정, 최영 등이 전함 314척, 군사 2만 5천 여명을 이끌고 탐라의 명월포에 이르자 적이 1천여기의 기병으로 항거, 가까스로 이를 격파하고 말 2천필을 확보하여 그해 9월에 지문하사 정비(鄭庇)를 남경에 보내어 말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말 50필을 보낸적이 있었는데, 숫자가 틀리고, 쓰지 못할 말들을 보냈다고 명태조가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자 고려에서는 말을 가지고 머나 먼 길을 다녀온 호송 책임자를 노고에 대한 치하는 고사하고 그를 처형 하였습니다.

한편 임밀과 채빈은 먼저 받은 말 3백필을 이끌고 돌아가자 고려에서는 동지밀직사사 김의(金義)를 보내어 요동까지 호송하게 하였는데, 임밀과 채빈은 이르는 곳마다 지체하였고, 채빈은 주벽이 심해서 행패가 심할 뿐 아니라, 경성에 머무는 동안, 재상들이 이들을 대접할 때도 천자의 나라에서 온 사신이라고 거만을 떨면서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러 시중이하 모든 관원이 봉욕(逢辱)을 당했습니다.

김의가 이들을 호송해 가는 도중에도 채빈의 주벽은 여전했고, 입만 벌리면 김의를 죽인다고 협박하자 이에 견디지 못한 김의가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러 행패부리는 채빈과 그 아들 집밀(執密)을 죽이고 갑사 3백명과 함께 말 2백필을 가지고 북원으로 달아났습니다. 김의는 원래 호인(胡人)출신으로 자신은 고려에 귀화했다가, 다시 자기의 본고장으로 돌아간 결과가 되었지만, 이것이 고려와 명나라와는 외교적인 마찰을 불러왔고, 고려의 지배층 사이에서도 비방과 반목의 불씨를 만드는 등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상한 풍속도 자제위(子弟衛)와 공민왕의 말로

공민왕은 후사(後嗣)를 얻기 위해 여러 비빈(妃嬪)을 들였으나, 그의 정력부족인지 변태적인 성도착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사람의 자녀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1372년 자제위(子弟衛)라는 희한한 관서를 만들어,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이 곳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는 한편 대언(代言) 김경흥(金慶興)으로 하여금 이들을 총괄하게 하였는데, 이들과 비빈들을 사통케하여 자식을 얻고자 기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홍륜(洪倫)·한안(韓安)·권진(權瑨)·홍관(洪寬)·노선(盧瑄) 등의 미남들이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비빈들과 사통 하고, 이때 공민왕은 문틈으로 이를 들여다 보는 괴상한 취미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홍륜과 사통한 익비가 임신하자, 내시 최만생이 이를 왕에게 알렸는데, 공민왕이 이를 듣고 취중에 이르기를, 익비가 자식을 낳으면 내 자식이다. 홍륜과 사통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홍륜을 죽이고, 너도 이 사실을 안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최만생 등이 술에 취해 잠자는 공민왕을 먼저 시해하였다고 사서(史書)에는 적고 있습니다.

재위 24년 수(壽) 45세, 성품이 엄격 중후하고 또한 자애로우며, 서예와 회화에서는 당대 제일을 자랑할 만한 풍류제왕도 권력의 틈세 에서 자신을 망각하고 부질없는 속세에 연연하다가 이렇게 비명횡사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공민이라는 시호는 명 나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앞에 충자가 붙지는 않았고, 노국공주의 묘역에 안장되어 파란많은 생을 이렇게 허무하게 마감하였습니다.

(3)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창

다시 친원으로 - 신진과 훈신의 대립

공민왕이 훙(薨)하고, 이인임 등이 공민왕과 신돈의 애첩(愛妾) 반야(般若) 사이에 태어났다는 모니노(牟尼奴)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는데 이때 그의 나이 10세, 나이가 어려서 정사는 재상들이 처리하였고, 밀직사 장자온과 전공판서 민백훤을 남경에 보내어 부고(訃告)를 전하고 시호(諡號)와 왕위계승을 청하게 하였고, 한편 북원에는 판밀직사사 김서를 보내어 공민왕의 죽음을 알리게 하였습니다.

우왕 원년(1375) 간관 이첨, 전백영이 상소하여, 김의가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 명나라에 보낼 말을 가지고 북원으로 도망간 것은 수시중 이인임과 사전에 내통한 것이고, 김의와 같이 호송해서 갔다가 김의를 따라 북원으로 도망가지 않고 돌아온 오계남과 장자온은 정료위(定遼衛)의 사람을 죽인 것과 정료위에 알리지 않았다고 각각 탄핵하였는데, 이 상소가 올라가자 이첨은 지춘주사로 전백영은 지영주사로 벼슬을 나추어 외직으로 내보냈습니다.

이때 북원에서는 순제의 아들 소종이 즉위하여 선광이라 개원하고, 카라코럼을 중심으로 몽고 일대를 확보, 서쪽으로 티베트와 운남까지 연결하고, 동쪽으로 만주의 나하추와 그리고 고려와 연결해서 중화회복의 기치를 들고 있을 때 였습니다. 이에 그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공민왕)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에 붙었기 때문에 너희 임금을 죽인 죄를 용서한다" 하였는데,

이때 이인임과 지윤이 북원의 사신을 맞고자 하니, 삼사좌윤 김구용을 위시한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 젊은 관료들이 도당에 글을 올려 이를 적극 반대하였고, 특히 정도전의 언사가 몹시 거칠어 결국 정도전은 회진(會津)으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우왕 3년 다시 북원의 연호 선광(宣光)을 시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진(新進)과 훈신(勳臣)간에, 외세를 업은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훈신인 이인임 등은 왕이 살해된데 대한 책임과, 이에 따른 재상으로서의 명나라의 질책을 몹시 두려워 했고, 신진 사류들은 이런 훈신들의 몸 보신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간관(諫官)이란 행정실권이 없는 청직으로, 대개는 기개 높은 젊은 선비가 맡게되고, 재(宰)·추(樞)의 요직은 고로(古老)·훈신들이 독차지하여 도당(都堂)을 채우고 있는데, 항상 이들 양자간에는 알력과 갈등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까지는 훈신들의 위세가 강하여, 탄핵했던 간관들이나, 젊은 관료들이 폄직(貶職)되는 수순을 밟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왜구의 침입과 영향

그러나 고려 후기사회를 크게 변동 시켰던 요인 중, 왜구의 침입을 빼놓을 수 없는데, 공민왕 재위기간 23년 동안 115회, 우왕 재위기간 14년 동안 무려 378회나 침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이로 인한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우선 바다가 이들에게 봉쇄됨으로써 세곡(稅穀)을 싣고 올 조운(漕運)이 막혀서 경향간의 물자 수송이 안되고, 해안지대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 할 수 없었으며,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자원조달의 수단으로 일정량의 곡식을 납품하거나, 이들의 목을 베어온 자, 혹은 포로를 잡은 자는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벼슬로 보상하였으니 필요이상의 관직을 만들어야 하고, 그래도 모자라자 종내는 직첩만 있고 보직(補職) 없는 관리가 수없이 배출하였습니다.

고려사절요 신우 원년 을묘에,...-전략-전라도 원수 김선치에게 일러 등정광(藤經光)을 꾀어서 죽이라고 하였다. 선치가 크게 주식을 갖추어 먹이고 기회를 타서 죽이려 하였는데, 꾀가 누설되어 등경광이 부하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서 도망가고, 겨우 3명만을 잡아죽였다.-중략-.처음에는 왜적이 주, 군을 침범하면서도 사람은 죽이지 않았는데, 이 뒤로부터 노여움을 격발(激發)하여 매양 들어와서 침범할 때마다 부녀와 아이들을 남김없이 무찔러 죽이니, 전라도와 양광도의 바닷가의 고을들이 텅 비어 버렸다....-후략

신우 2년 병진조에, -전략-첨설(添設)한 관직을 군사에게 상으로 주어, 봉익(奉翊)으로부터 7품, 8품에 이르기까지 수가 없으니 이때에 수레에 싣고 말로 헤아린다.(車載斗量)..-후략. 등등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당시 어려웠던 고려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으며, 이들은 한량(閑良)이 되었는데, 한량(閑良) 이란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걸쳐 특정한 사회계층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그러나 전체시기에 걸쳐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고,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 걸쳐서 한량이라고 부르던 사회계층은 직첩(職牒)·직함(職銜)은 있으나 직사(職事/補職)가 없는 무직사관(無職事官)과 직(職)·역(役)이 없는 사족(士族)의 자제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왜구 격퇴에 공이 큰 세 사람, 홍산 싸움의 최영, 황산 싸움의 이성계 그리고 화약 제조기술을 익혀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진포해전에서 위력을 떨친 최무선, 대략 이렇게 요약되나, 여기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이성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화주(영흥) 출신으로서 그의 휘하에는 전투에 능한 퉁두란 등 여진족의 전사가 많았고, 이성계 자신도 활을 굉장히 잘 쏘았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적고 있습니다.

무장 이성계

이성계가 여러 관직을 거쳐 1372년(공민왕 21)에는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으며, 1380년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가,

다음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습니다.

1388년(우왕 14)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최영과 함께 권신(權臣)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처형, 이때 명(明)나라의 철령위(鐵領衛) 설치 문제가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는데, 명나라는 이 때 만주에 웅거하고 있던 나하추로부터 항복을 받았고 그 여세를 몰아 북원으로 들어가 북원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이에 명나라는 만주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원의 영토였던 화주 이북의 땅을 내 놓으라고 고려에 통고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도당에서는 이를 두고 국론이 분열, 최영 등은 이 기회에 요동을 정벌하여 분쟁이 소지를 없애자는 것이고, 이성계 등은 이에 반대, 소위 4 불가론을 내 놓았다는데, 그 내용을 다시 한번 훑어 보면 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以小逆大一不可) ② 때가 여름이라 군대를 낼 수 없다(夏月發兵二不可) ③ 온 나라가 출정을 하면 그 틈을 타고 왜구가 그 허를 찔러 들어 온다(擧國遠征倭乘其虛三不可) ④ 장마철은 활과 노에 아교가 해어지고 대군에 역질이 돈다(時方署雨弓弩膠解大軍疾疫四不可) 등인데, 문제는 以小逆大이고 나머지는 구실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인으로서 전장 터를 수 없이 누비고 다녔던 그가 군사적인 힘의 우위를 몰랐을 리는 없었고, 당시의 사정으로 텅 빈 요동을 정벌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도 그는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닥쳐올 일들, 요동을 빼앗긴 명나라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고, 대군을 몰고 온다면 출정 역시 자신이 맡아야 하고, 그럴 때 과연 승산이 있겠는가를 따졌겠지요.

의견의 대립에서 실리 보다는 명분이 앞서는 것이 우리들의 오랜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결국 요동 정벌 군은 개경을 떠나 북진을 하게 되었고, 최영은 8도 도통사, 조민수 좌군도통사, 이성계 우군도통사, 압록강하구의 델타 위화도에 이르렸을 때 장마로 강물이 불어 더 이상 북진 불가, 회군요청, 받아들여지지 않음, 위화도에서 회군, 개경에서 최영의 근왕군과 대치, 이를 격파, 등등은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서 생략하겠습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이성계일파를 당할 어떤 세력도 없게 되고, 따라서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명의 압력으로 최영을 처형했으며, 우왕을 폐하고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웠다가(1388) 뒤 늦게 다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고 창왕이 그의 손자라 해서 폐립하고, 신종의 7대손 균(均)의 아들 요(瑤)를 세우니(廢假立眞) 이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입니다.

그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으로 즉위했다가(1389) 왕위에서 밀려나(1392)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에 유배되고, 2년 후 삼척에서 척살 당했습니다.

신진 사대부

이성계의 무인세력과 결탁한 이른바 신진사대부 계급들은 지방의 향리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과거를 통해서 중앙에 진출하였고, 따라서 군공(軍功)이나 음보(蔭補/조상의 덕), 재산을 바치고 벼슬을 얻은 사람들, 즉 한량(閑良)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되는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고, 향리(鄕吏)의 자제로서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으며, 성리학을 수용하고 특히 소학(小學)을 실천 덕목으로 삼으면서 불교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들이 중앙 정계에 등장해서, 권문세족과 대결코자 했으나 힘에서 밀려 그들의 주장을 펴지 못하다가 이성계가 권력의 중심에 서자 자연적으로 두 세력을 결합하게 되었습니다. 힘은 있으나 지식이 부족한 무인들과, 지식은 있으나 힘이 부족한 사대부들 간에 상호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이해 관계가 맞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추진한 것이 고려 말 최대의 모순을 가지고 있었던 전제의 개혁이었습니다. 농업국가를 지향했던 유교적인 전제국가에서 농토는 곧 사람들의 생명 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토지제도는 오늘날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의 토지는 소유권에 따라 크게 국유(國有)와 사유(私有)로 구분합니다. 특히 농토인 전답(田畓)은 원칙적으로 국유가 없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민들이 사유(私有)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라는 왕토(王土)사상이 지배하고 있어서, 원칙적으로 소유권은 국왕에게 있었고, 경작권은 농민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조권(收租權)이라는 게 하나 더 있었습니다. 국왕 소유의 농토를 경작한 농민들은 토지주인인 국왕에게 수확량의 얼마를 토지 임대료(사용료)로 내어야 되겠지요. 이를 조(租)라고 합니다.

과전법, 과연 개혁인가?

농민들로부터 조(租)를 받아들이는 것을 수조권(收租權)이라 하며, 그 수조권이 국가에 있을 때 이를 공전(公田)이라 하고, 개인이나, 단체가 가지고 있으면, 이를 사전(私田)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것이 생겨났나 하면, 당시는, 이 토지의 수입으로 왕실(국가)과 관청의 경비, 관리들의 봉급 등 대부분의 재정을 충당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단체나 관료들에게 예산을 배정해 주거나 화폐로 봉급을 주지 않고 토지의 수조권을 나누어 주어서 이에 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조권을 가진 관리나 단체가 수취한 양의 일부를 다시 국가에 내게 되는데, 이를 세(稅)라고 하여, 여기에서 조세(租稅)라는 말이 생겼으나, 사실상 세(稅)는 없고, 조(租)만 있어서 모든 것은 농민들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고려의 공사전의 토지제도는 경종 때 실시하고, 문종 때 완성한 전시과(田柴科)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는데, 전시과란 문무관리 직산관(職散官/현직관리와 퇴직관리)에게 그들의 18 품계(品階)에 따라 전지(田地)와 시지(柴地 / 땔감, 산림)의 수조권을 주고 생활하도록 한 것을 말하고, 이 수조권은 퇴직 후에도 유효하며, 본인이 죽으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여, 세습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 공해전, 공음(공신)전, 구분전, 둔전, 역전, 궁방전, 사원전 등 등의 사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토지제도가 무신의 난을 겪으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여, 고려 후기가 되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는데, 같은 토지에 여러 명의 수조권자가 있는가 하면, 불법으로 농민들의 토지(공전)를 빼앗아 사전으로 만들고, 많은 것은 산천(山川)을 경계로 정하여 대농장을 만들어 부를 축적하자 상대적으로 공전의 부족으로 국가재정은 어렵게 되고, 새로이 관리가 된 사람은 토지를 분급 받지 못한 사례가 속출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관리가 되고서도 봉급을 받지 못하는 결과와 같은 것으로서 신진 사대부들이 이런 부류에 속했고 따라서 이들이 갖는 불만 또한 대단했겠지요. 그래서 이들이 단행한 것이 사전개혁, 즉 과전법의 실시였습니다.

과전법(科田法)은 1391년(공양왕 3)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조민수(曺敏修)·이색(李穡) 등의 반대가 있자 이들을 축출하고, 1390년(공양왕 2)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1391년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전제개혁으로 종래의 귀족들은 토지를 잃고 경제적 무능 자로 전락하였으며, 반대로 신흥 사대부를 비롯한 신진 관료들에게는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어, 조선조(朝鮮朝) 개창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 때의 과전법도 소유는 국왕(國有)에게 있는 것이 원칙이며, 수조권(收租權)의 귀속 여하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하며,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직산자(職散者)의 고하에 따라(18등급)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의 땅을 지급하고 이를 과전(科田)이라 하였는데, 본인 1대에 한하도록 한 것 등은 고려시대 전시과와 다른 것이 별로 없고, 다만 시지(柴地)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과전법의 성립으로 경작농민(佃戶)이 지주(田主)에게 50 %의 조(租)를 바치던 병작반수제가 금지되고, 수확의 1/10 (1결당 30두)을 징수하여 농민들의 부담이 다소 줄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전법에 의한 토지개혁은 경자유전(耕者有田)에 의한 균등분배가 아니고, 수조권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하는 모순은 여전하였으며, 과전(科田)이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 등의 이름으로 점차 세습되었고, 공신·관리의 증가로 사전의 부족을 초래하여, 1417년(태종 17)에는 과전으로 지급될 땅 1/3을 하삼도(下三道:충청·전라·경상도)로 이급(移給)하게 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에는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하여 현직관료에 한하여 최고 110결 ~ 10결까지 줄여서 지급하였으며, 이로서 관료들은 퇴직 후 또는 사후(死後)에 대한 경제적인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재직 중의 수탈(收奪)이 심해지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토지의 크기 단위를 보면, 지금은 몇 평방미터, 아니면 몇 평 등으로 면적의 크기로 표시하나, 당시는 결(結)이라고 하여 생산단위의 크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벼 한줌을 1 악(握/한줌), 10 악을 1파(把/한아름), 10 파를 1속(束/한단), 10속을 1부(負/한 짐), 100부를 1결(結 / 20-30 석의 수확량) 등으로 표시했기 때문에 같은 1결이라도 면적으로 환산하면 토지의 비옥(肥沃) 정도에 따라 3천 평 정도에서 1만 2천 평 정도까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 조선 왕조의 성립

(1) 찬탈과 선양

과전법을 실시하여 경제적 실권까지 장악한 이들이 드디어 찬탈(簒奪)이 아닌, 선양(禪讓)의 형식을 빌려, 1392년 7월 개성 수창궁에서 이성계가 만조백관의 우뢰 같은 천세(千歲)의 하례를 받으며,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정하여 새 왕조를 창업,

이 과정에서 사대부들은 온건파와 혁명파로 갈리고, 건국 후 세자 문제로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 등이 제거되고,... 등의 이야기 역시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만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면 연호를 사용해야 하나, 연호는 명나라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그대로 쓰다가 조선이라고 고치고 이를 명나라에 보내어 신 왕조의 성립과 국호의 변경을 알리고 이를 승인해 줄 것을 주청했으나, 명나라에서는 이성계를 고려권지국사(高麗權知國事/고려왕의 대리자)라 부르고, 이를 승인해 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외교문서에도 조선국왕이라는 이름을 써지 못 하다가 태종 때(1401) 정식으로 조선 왕으로 책봉을 받아 요즘 말로하면,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는데, 또 하나 200 여 년 간 왕실을 괴롭힌 것은 종계(宗系 /왕실 족보)가 명나라의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되어 이를 바르게 고쳐 달라고 여러 차례 청원(?)했지만 번번히 거절 당하다가 선조 대에 이르러 겨우 실현을 보았습니다. 이를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합니다.

(2) 조선왕조 자존심의 훼손(毁損)과 종계변무

이성계가 이자춘(환조)의 아들로서, 휘(諱)를 성계로 했다가 즉위 후 단(旦)으로 고치고, 그의 4대조 까지 추존하였다는 것은 먼저 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에 고려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처음 안 것은 1394년(태조 3)이었습니다.

이인임은 고려 말 대표적인 권문으로서, 그의 조부가 문열공 이조년이며, 밀직사 이백년은 이조년의 맏형, 이조년의 아들 시중 이포는 그의 부친, 흥안 부원군 이인복은 그의 친형, 판서 이인미는 그의 동생, 인미의 사위 하륜은 그의 질서(姪壻), 판개성부사 인민은 막내동생, 인민의 아들 이직은 그의 초카,

원나라에서 여러 로(路)의 염방사를 지내고, 가문을 중흥시킨 문하시랑 평장사 이승경과 평양윤 이인기는 그의 종숙(從叔), 성산군 이원구는 그의 재종형(再從兄), 원구의 아들 이숭인(陶隱)은 그의 재종질(再從姪) 등 기라성 같은 인물 가운데, 그는 음보(조상 덕택)로 관직에 나아가, 공민왕 말년에 재상이 되었다가 우왕을 세우고 시중으로 있으면서 친원파의 거두로 활약하였습니다.

그가 소위 실세로 있을 때, 이성계의 세력팽창을 경계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최영 등의 적극적인 이성계 옹호로 뜻을 거두고 만년에 고향인 경산(성주)에 내려와 은거하고 있었는데, 후일 정권을 잡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서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제거된, 즉 이성계의 최고 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조선왕조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것이 두 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로 부각되어 태조 때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고쳐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쳐 준다는 약속만 하고 실현되지 못하여 이는 역대 왕들의 가장 큰 현안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18년(중종 13) 중국에서 돌아온 주청사(奏請使) 이계맹(李繼孟)은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의 주(注)에 명나라 태조의 유훈(遺訓)이라 해서 “이인임의 아들 단(旦 : 이성계)이 사왕(四王:恭愍·禑王·昌王·恭讓)을 시해하였다”고 기록된 체, 정정되지 않았음을 보고 하였습니다.

다시 남곤(南袞)이 주청사로 가서 시정을 요구하는 등 중종 때만 해도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그 뒤 1584년(선조 17) 종계변무주청사 황정욱(黃廷彧) 등이 가서 정정키로 확정을 보고, 1588년 유홍(兪泓)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와 일단락되었는데, 선조는 유홍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친히 모화관(慕華館)까지 나아가 명나라의 칙사(勅使)를 맞았으며, 종묘에 가서 종계의 개정을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으며, 백관에게도 벼슬을 올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쳤다고는 하나, 원문은 그대로 두고, 그 옆에 첨자해서 수정된 내용을 병기했고, 이 남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 선조는 이에 공이 많은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록 했는데,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라는 이름의 공신중에, 1등은 윤근수, 황정욱, 유홍 등 셋이 있고, 2 등 7 명 가운데 유일하게 중인(中人) 신분의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라는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이는 당대 너무나 유명한 유성룡이나 기대승 등이 3등인데, 반하여 중인 신분인 역관이 2등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상의 공적은 1등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는 그가 그 전 어느 해 사신들을 수행하여 북경에 갔다가, 청루(靑樓)에 팔려온 어느 낭자의 몸 값을 지불해 주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는데, 그 후, 그 낭자가 시집 가서 그의 남편이 예부상서가 되었고, 지난날 홍역관의 은혜를 잊지 못했던 이 고귀한 사모님(?)이 보은의 뜻에서 자기 남편을 설득시켜 이 엄청난(?)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회화적이면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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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拈華微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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