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21대 희종실록

똥하 2008. 11. 19. 20:07

  1. 왕권 회복을 꿈꾸는 희종과 최충헌 제거 계획

   (1181~1237년, 재위기간:1204년 1월~1211년 12월, 7년 11개월)


   희종(熙宗)은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로 1181년 5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덕(悳), 이름은 영(韺), 자는 불피(不陂)이다. 1200년 4월에 왕태자에 책봉되고,1204년 1월에 병사에 누운 신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희종 역시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 의해서 이뤄졌다. 하지만 희종은 신종과 달리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측면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명분이 분명했다. 이 같은 사실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희종 즉위년인 1204년에 장군 이과일 등 30여 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하기 위해 급사동정 지귀수의 집에 모여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었고, 1209년 4월에는 청교역리 3명이 최충헌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하기도 하였다. 이 때 주모자들은 공첩을 위조해서 각 사찰에 집회 공문을 보냈는데, 귀법사에 공문을 전달하러 갔던 자가 그곳 승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거사계획이 탄로 났던 것이다.

   귀법사 승려로부터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최충헌은 영응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범인 색출 작업에 들어갔고, 청교역의 관리들이 음모를 주동했음이 밝혀졌다. 이에 청교역리들이 잔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우복야 한기도 공모자라고 말하는 바람에 최충헌은 한기와 그의 세 아들을 죽이고, 장군 김남보를 비롯 9명을 공모자로 몰아 함께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 당시 범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교정도감은 그 후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무신들의 합좌기구인 중방은 이 순간부터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최충헌은 스스로 교정도감의 별감으로 있으면서 그곳에서 모든 국사를 처리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최이(우), 최항, 최의가 교정도감 직을 세습하며 왕권을 대신하게 된다.

   청교역리들의 최충헌 살인 모의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만인 1210년에는 직장동정 원서와 재상 우승경이 최충헌을 암살하려 한다는 투서가 날아들어 다시 한 번 살상 극이 벌어진다. 투서를 입수한 최충헌은 즉시 원서와 우승경을 체포하여 문초하였고, 원서는 자신은 결백하다며 투서는 유익겸의 짓일 것이라고 하였다. 유익겸은 언젠가 원서에게서 은병 2개를 빌려간 일이 있는데 몇 해를 지나도 갚지 않았고, 이에 분개한 원서는 그의 집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원서의 고백에 따라 최충헌이 사람을 보내 유익겸의 집을 수색하게 하였더니 그곳에서 정말 투서의 초안이 발견되어 원서와 우승경은 죽음을 면하였다.

   이렇듯 사람들이 최충헌의 권세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려 했을 만큼 최충헌은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활동의 민가 1백여 채를 허물고 자신의 집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대궐과 맞먹을 정도였다. 이 저택의 북쪽에 ‘십자각’이라는 별당을 지었는데, 이 공사를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리고 백성들 사이에는 최충헌이 남자아이 다섯 명과 여자아이 다섯 명을 잡아다가 오색 옷을 입혀서 집터의 네 귀퉁이에 묻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때문에 아이 가진 부모 중에는 먼 곳으로 도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건달들이 아이를 유괴하여 숨겨두고 이 소문을 언급하면서 아이들의 부모에게 돈을 강탈해가는 사건도 잇따랐다.

   이 때문에 최충헌은 어사대를 시켜 다음과 같은 방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사람의 목숨이 가장 귀중한 것인데 어찌 생매장하여 재앙을 물리치려 하겠는가. 만약 어린아이를 잡아가는 자가 있거든 관아에 고발토록 하라.”

   방이 붙은 뒤에는 아이를 유괴하여 돈을 요구하는 사건은 점차 줄었지만, 웃지 못할 이 일을 통해 최충헌의 권력 남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눈에 거슬리는 자는 가차 없이 반역으로 몰아 죽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압력을 행사하여 빼앗았으며, 개인적인 일을 위해 국법이 필요하면 왕을 위협하여 반드시 관철시켰다.

   하지만 최충헌의 이 같은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도 다시금 그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진해됐다. 더구나 이번에는 왕도 가담했다.

   1211년 그동안 최충헌의 왕권 능멸을 지켜만 보고 있던 희종은 측근 내시들과 모의하고 최충헌 세력을 제거하고자 거사를 결행한다. 비교적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되었을 법한 이 사건은 그해 12월 경자일에 벌어진다.

   그날 최충헌은 왕을 배알하기 위해 수창으로 찾아들었고, 희종을 그를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중관(中官)의 내관들이 왕이 술과 음식을 내렸으니 함께 먹자고 말하면서 최충헌의 수하들을 궁궐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였다. 그들이 순순히 내관들을 따라오자 미리 잠복하고 있던 10여 명의 승려와 무사들이 그들을 습격하였다. 이 때문에 순식간에 내전 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최충헌의 수하 몇 명이 칼에 맞아 쓰러졌다.

   이렇게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최충헌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객이 들이닥친 것으로 판단하고 희종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하지만 희종은 내실의 문을 닫고 최충헌을 내실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희종은 내시들이 최충헌의 목을 베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희종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안 최충헌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한 김에 지주사 다락에 몸을 숨겼다. 그때 최충헌을 죽이기 위해 승려 몇 명이 내전 쪽으로 달려왔고, 세 번이나 그 주변을 기웃거렸지만 최충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에 내전에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약진과 최이의 장인 정숙침이 내전으로 달려가 최충헌을 구해냈다. 그때 최충헌의 수하들과 장수들과 승려들의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편 궁궐 바깥에서는 최충헌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교정도감 군사들이 궁성 밖에 집합해 궁궐 진입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최충헌의 생사 여부를 몰라 궁성 진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최충헌과 동행했던 노영의란 자가 대궐 지붕 위에 올라가 “우리 대감은 무고하다.”고 소리치자 군사들이 그제야 궁궐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최충헌은 가까스로 목숨의 위기를 모면했다. 최충헌을 구한 김약진은 궁궐로 군사를 몰아 임금을 비롯한 모든 내인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최충헌은 상장군 정방보 등을 시켜 사약 정윤시와 중관들을 체포하여 인은관에 가두고 국문하라고 하였다. 국문 결과 주모자는 내시낭중 왕준명으로 밝혀졌고, 참정 우승경과 추밀원사 홍적, 장군 왕익 등이 공모했음이 드러났다.

   최충헌은 이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시키고, 이들의 모의를 후원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다. 이 때 희종의 나이 혈기왕성한 31세였으며, 재위 7년 11개월이었다.

   강화도에 유배된 희종은 다시 자란도에 이배되었으며, 태자 왕지는 인주로, 덕양후 왕서는 교동으로, 시녕후 왕의는 백령도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최충헌은 아들 최이와 평장사 임유를 시켜 명종의 아들 한남공 왕정을 왕으로 세웠다.

   희종은 그 후 유배지에 머물다가 노년에 법천정사로 옮겨 1237년(고종 24년) 8월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호는 처음에 정종(貞宗)이었으나 뒤에 희종으로 고쳤다. 능호는 석릉이다.


   2. 희종의 가족들


   희종은 성평왕후 임씨에게서 창원공 지, 시녕후 위, 경원공 조, 대선사 경지, 충명국사 각응 등 다섯 아들과 안혜태후(고종의 비), 영창, 덕창, 가순,정희 등 5명의 딸을 얻었다. 이들 가족 중 성평왕후와 창원공 지, 시녕후 위, 경원공 조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다. 대선사 경지와 층명국사 각응 등은 이름만 전할 뿐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성평왕후 임씨(?~1247년)

   성평왕후 임씨는 종실 영인후 진의 딸인데 왕씨 성을 사용하지 않고 외가의 성을 따서 임씨라고 하였다.

   그녀는 희종이 태자로 있을 때 입궁하였으며, 1211년 함평궁주에 봉해지면서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소생으로 창원공 왕지를 비롯한 5녀가 있었으며, 1247년에 죽으니 소릉에 안장하였다.


   창원공 왕지(?~1262년)

   창원공 왕지는 희종의 장남으로 1211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그해 12월 최충헌에 의해 희종이 폐위될 때 인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창원후에 봉해졌다가 다시 창원공으로 작위가 격상되었으며 126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시녕후 왕위(생몰년 미상)

   시녕후 왕위는 희종의 둘째 아들로 1211년에 시녕후에 책봉되었으나 그 해 12월 왕준명 거사사건으로 희종이 폐위될 때 백령현으로 유배되었다.

   그에게는 아들 왕굉이 있었으며, 사공의 벼슬을 받았다.


   경원공 왕조(?~1279년)

   경원공 왕조는 희종의 셋째 아들로 1211년에 경원후에 책봉되었다. 그해 희종이 폐위되었지만 그는 어린 탓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그는 옛 역사에 정통하고 예법에 밝았으므로 종실의 칭송을 받았다. 원종은 예법에 대해 궁금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 때 왕이 홍대촉(紅大燭, 붉은 색의 큰 초로 임금만 사용했다)을 사용하도록 했는데, 이 때부터 양반이나 평민들도 홍대촉의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에게는 혜, 균 등의 두 아들이 있었으며, 왕혜는 광평공에 책봉되어 함녕궁주에게 장가들었다. 그는 1279년에 원나라 사신 납탑합백나와 함께 경상도로 가서 일본을 정벌하는 데 사용할 병선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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