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20대 신종실록

똥하 2008. 11. 19. 20:06

 1.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신정권의 성립

   (1144~1204년, 재위기간:1197년 9월~1204년 1월, 6년 4개월)


   신종(神宗)시대는 비록 6년여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는가 하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아 고려 사회는 건국 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다.

   신종은 인종의 다섯 째 아들이자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4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민(旼), 이름은 탁(晫), 자는 지화(至華)이다.

   다섯 째 아들인 그가 50세가 넘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은 순전히 최충헌 형제와 그 측근들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의민을 제거한 후 명종을 내쫓기로 결심한 최충헌과 그의 아우 최충수, 외조카 박진재는 차기 왕으로 누굴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던 끝에 사공 왕진과 평양공 왕민 중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논의 과정에서 최충수는 왕진이 경서와 사기에 통탈하고 도량이 넓다며 그를 왕으로 세우자고 하였고, 최충헌은 명종의 동복동생인 왕민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박진재는 두 사람 모두 제왕이 될 만하지만 금나라에서 사공 왕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심을 살 염려가 있으므로 의종의 전례에 따라 왕민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박진재의 이 같은 판단에 따라 결국 왕민이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왕민을 차기 왕으로 결정한 최충헌은 곧 최충수, 박진재, 노석승, 김약진 등과 함께 군사를 집결시킨 뒤 6위의 군사를 전후좌우 4군으로 나누고 장졸을 파견하여 두경승을 비롯한 12명의 대신과 10여 명의 승려, 명종의 서자들 등을 체포한 후 모두 유배시켰다. 그리고 대궐로 사람을 보내어 명종에게 홀로 말을 타고 향성문을 나서라고 위협한 뒤, 명종이 향성문을 나서자 붙잡아 창락궁에 유폐시켰다. 또한 태자 도를 태자비와 함께 강화도로 압송하고, 1197년 9월 계해일 평양공 왕민을 데려와 고려 제20대 왕에 앉혔다. 그가 곧 신종이니 이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신종은 왕위에 오르자 곧 이름을 탁으로 개명했다. 그의 초명인 민이 금나라 왕의 이름과 같다 하여 바꾼 것이다.

   그는 즉위 전날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름을 ‘천탁’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그런데 즉위 후 신하들에게 적당한 이름을 지어 바치라고 했더니 참지정사 최당이 ‘탁’자를 택하여 바쳤다. 그래서 신종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이름을 탁이라고 고치게 되었다. 또한 왕의 이름을 탁으로 고쳐지자 탁자 성을 가진 자는 모두 외가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고, 만약 본가와 외가의 성이 같으면 외조모나 친조모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다.

   신종이 즉위하던 달에 최충헌은 상장국 주국에 오르고, 최충수와 박진재, 조영인, 기홍수 등의 측근들이 각각 응양군대장군, 형부시랑, 판입사, 판명부사 등을 차지함으로써 최충헌 세력은 병권과 인사 건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금나라에다 왕이 바뀐 사실을 통보하고 표문(表文, 왕에게 올리는 글)을 보냈는데, 금나라에서는 찬탈의 의혹이 있다면서 몇 번에 걸쳐 사신을 보내 명종을 대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 등이 명종은 요양 차 아주 먼 곳에 있기 때문에 30일 이상을 걸어가야만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하여 신종은 가까스로 금나라 왕의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선종은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정 대소사의 모든 결정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다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충헌은 아우 충수와 함께 신종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새 궁궐에 들어가면 화를 당한다는 풍설 때문에 좁은 옛 궁궐에 있는 것은 옳지 않으니 왕이 새 궁궐로 이어(移御)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토지 관리 및 인재 등용에 관한 개혁안이 봉사 10조의 중심 내용이었다. 하지만 말만 그럴싸할 뿐 최충헌 세력 스스로가 이 개혁안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음으로써 어떠한 개혁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권력에만 눈이 멀어 각자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들끼리 알력이 생겨 마침내 치열한 힘 싸움으로 이어졌다. 최충수는 최충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로 하다가 최충헌에게 죽임을 당하고, 박진재도 후에 지나치게 권력을 확장시키다가 최충헌에게 양쪽 다리의 심줄이 잘리는 형을 당하고 유배되어 죽는다.  

   최충헌은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혈육도 가차 없이 죽이는 잔인한 모습을 보이며 독재정치를 구현해 나갔다. 그는 항상 3천 명 이상의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평상복으로 대궐에 출입하였고, 자신의 안방에서 국가대사를 결정하여 왕에게는 알리지도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에 일부 원로들이 반발 움직임을 보이자 최충헌은 1199년 6월 평장사 최당, 우술유 등을 치사(致仕, 벼슬살이를 중단하는 것)케 하여 본인들의 청원 업이 약 20여 명의 대신들을 강제 퇴직시켰다.

   이 같은 그이 권력 독식은 고려 사회를 극도로 부패시켰고, 백성들은 권력층의 횡포와 굶주림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그러면서 명종 대에 시작된 민란이 곳곳에서 발생하여 온 나라가 전쟁터로 전락했다. 1198년에는 최충헌의 종만적이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였으며, 1199년에는 명주(강릉)에서 도적이 일어나 삼척과 울진 두 현을 함락시켰고, 동경(경주)에서도 도적이 일어나 명주현의 도적과 연합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또 1200년 4월에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같은 달에 밀성의 관노 50여 명이 관가를 습격하고 운문에서 일어난 난민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동경(경주)에서 이의민의 친족들과 동경 아전들이 싸움을 벌여 동경의 방수, 별장, 통인들이 모두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김해에서는 하층민들이 호족들의 횡포를 참다못해 반란을 일으켜 호족들을 내쫓고 관아를 포위하면서 관군과 대치하기도 하였다.

   이에 신종은 낭자 오응부와 합문지후 송공작 등을 명주에 보내고, 장작소감 조통과 낭장 한지 등을 동경에 보내 도적들을 달랬다. 또한 최충헌은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신종으로 하여금 죄수들을 대거 석방하도록 했으며,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았다.

   하지만 1202년에는 탐라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소부소감 장윤문과 중랑장 이당적을 파견하여 가까스로 백성들을 무마하고 난을 주동한 번석과 번수를 처형하였다. 그리고 경주에서는 별초군이 운문의 난민과 동화사, 부인사의 승려들과 결탁하여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영주 별초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져 영주 백성과 경주 백성 간에 대대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영주군의 승리로 골아갔지만 조정은 경주에서 계속되는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경주에 중앙군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감시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경주에서 패좌 등의 주동이 되어 다시 민란을 일으켰고, 조정은 김척후, 최광의, 강순의 등을 시켜 그들을 진압하였다.

   이렇게 소요가 이어져 정국불안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최충헌의 벼슬은 거듭 승진되었다. 1197년에 상장군에 오른 그는 같은 해 12월에 추밀원 지주사가 되고, 1199년 12월에 수태위상주국, 1200년 12월에 추밀원사와 병부상서, 어사대부 등을 겸임하게 된다. 또 이듬해 12월에는 태부참지정사 및 이부상서 판어사대부에, 1203년 12얼에는 중서시랑평장사 및 이부상서 판어사대사 태자소사에 올라 조정의 병권 및 인사권,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로써 최충헌은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고려 왕실은 점점 힘을 상실하여 왕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신종은 이러한 최충헌의 독단을 그저 지켜보면서 비참한 상태로 왕위를 유지하다가 1203년 12월 등창으로 병석에 누워 이듬해 1월 태자 덕에게 선위하고 둘째 아들 덕양후의 저택에서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신종실록’의 사관은 신종의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기고 있다.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임금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는 것과 임명하고 파직시키는 문제는 전부 충헌에 의해 좌우되었다. 신종은 허수아비처럼 왕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신종은 개성 남쪽에 묻혔으며, 능호는 양릉이다.

   

   신종은 선정왕후 김씨에게서 희종, 양양공 서, 효회공주, 경녕궁주 등 2남 2녀를 얻었다.

   선정왕후 김씨는 강릉공 김온의 딸이다. 그녀는 신종이 평양공으로 있을 때 결혼하여1197년에 신종이 즉위하자 원비에 책봉되었다가 1200년에 왕비에 봉해졌다. 그리고 1204년 아들 희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에 책봉되었으며, 최충헌에 의해 희종이 폐립된 후 많은 고초를 겪다가 122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능호는 진릉이다.

   신종의 둘째 아들 양양공 왕서는 신종 3년(1200년)에 덕양후에 봉해졌다가 다시 양양공에 봉해졌다. 그러나 1211년 최충헌이 희종을 폐할 때 강화도 교동현으로 유배되었다. 그에게는 위, 병, 인, 희 등의 네 아들이 있었다.


   2. 60년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은 최충헌


   최충헌(최충헌)은 우봉 사람으로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이며 초명은 란이다. 음서로 처음 벼슬에 올랐고 1174년에 발생한 조위총의 난 때 공을 세워 출세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그 후 누차 승진하여 섭장군에 올랐다.

   1196년에 녹사로 있던 그의 아우 최충수는 이의민의아들 이지영이 자신의 집비둘기를 강탈해간 것에 항의하다가 이지영과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사건 후 이지영에게 원한을 품은 최충수는 충헌을 찾아와 이지영과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자고 제의한다. 동생의 이러한 제의에 대해 최충헌은 처음에는 동생을 말렸지만 충수의 각오가 너무 확고하여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기로 작정한다.

   이의민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최충헌은 동생 최충수, 외조카 박진재와 모의하여 거사계획을 마련한 뒤, 1196년 4월 무오일 이의민과 이지영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최충헌은 자신이 직접 이의민의 목을 베 저자에 효수하고 장군 백존유와 결탁한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죽인 뒤 명종을 찾아가 이의민이 왕위를 노려 자신이 척결하였다고 보고하고 이경유, 최문청 등과 함께 이의민의 잔당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는 평장사 권절평, 손석, 상장군 길인 등이 거병을 도모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권절평의 아들 권준과 손석의 아들 손홍윤을 불러 술을 마셨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담소를 즐기다가 그들의 빈틈을 보이자 수하들에게 눈짓으로 명령하여 살해하였다. 그 후 수하들을 각처로 파견하여 권절평, 손석, 권윤, 유삼상, 최혁윤 등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상장군 길인은 장군 유광, 박공습 등과 함께 거병을 결심하고 도성 내에 머물던 환관 및 금위군과 노비 1천여 명을 모아 최충헌에 대항한다. 이들은 최충헌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궁문을 닫고 방비자세를 취하다가 백존유가 화공을 사용하려 하자 길인이 겁을 먹고 달아남으로써 싸움은 최충헌의 승리로 끝난다.

   승세를 굳힌 최충헌은 곧 참지정사 이인성을 비롯한 36명의 관료들을 체포하여 인은관에 가뒀다가 살해했으며, 최광원, 두응룡 등의 무신들은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이로써 정권을 장악한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올려 국정 전반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명종을 몰아내고 평양공 왕민을 왕으로 세워 왕권까지 완전히 장악한다. 이렇게 되자 국가의 모든 권력이 최씨 집안에 집중 되었으며, 이후부터 최충헌과 최충수의 힘 싸움이 전개되었다.

   최충수는 태자비를 쫓아내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세우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충헌은 즉시 충수에게 달려가 그를 만류하며 꾸짖었다.

   “지금은 우리 형제에게 일국의 세력이 집중되고 있으나 우리는 한미한 가문인데, 만약 딸을 태자비로 넣는다면 세상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부부 사이의 정은 뿌리 깊은 법인데, 결혼한 지 이미 오래되어 태자와 정이 깊은 태자지를 쫓아내는 일이 인정상 가능한 일이겠는가? 옛 사람의 말에 앞 수레가 전복되면 뒷 수레가 경계한다고 했네. 이의방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 나서 끝내 남의 손에 죽었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지금 왜 그 전철을 밟으려 하는가?”

   최충헌의 설득에 충수는 딸을 태자비로 넣는 것을 단념했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고 그 일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최충헌은 충수의 딸이 입궁하지 못하게 하라고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에 충수가 충헌의 수하들을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공언했고, 결국 충헌은 박진재와 힘을 합쳐 충수를 치기로 하였다.

   충헌이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를 몰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충수는 항복할 생각을 품었는데, 그의 수하들이 끝까지 싸우자고 하여 결국 개성은 최씨 형제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장이되고 말았다.

   결과는 충헌의 승리였다. 수적으로 약한 충수의 세력은 얼마간 항전하다가 도주했고, 충수도 수하들과 함께 달아났다. 하지만 충수는 뒤쫓아 간 충헌의 수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충수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충헌은 생포하지 않은 부하들을 심하게 원망하였다. 하지만 이미 충수의 목이 잘린 마당에 그 같은 후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도성의 백성들은 최씨 집안이 권력을 놓고 형제간에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고 손가락질하였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자 그의 종 만적이 6명의 친구들과 짜고 난을 도모하였다. 만적은 노비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땅에서는 경인년(정중부의 난)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 노예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대장이나 정승이 본래 종자가 따로 있겠는가. 시기만 만나면 누구든지 될 수 있는 것이ㅏ. 우리들도 어찌 채찍 아래에서 뼈 빠지게 천한 일만 하겠는가!”

   만적은 개성의 노비들이 모이면 일시에 난을 일으킬 수 있다고 정담하며 거사 일을 잡았다. 하지만 막상 거사 일에 모인 숫자는 불과 수백 명 밖에 되지 않아 거사는 미뤄졌다. 그들은 다시 보제사에 집결하여 조직적으로 난을 일으키기로 했는데, 그만 율학박사 한충유의 종 순정이 한충유에 고변하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부터 최충헌은 개경 전역에다 수하들을 배치시켜 백성들을 감시하도록 했으며, 궁궐에 들어갈 때도 수백 명의 군사를 대동하고 다녔다.

   또한 박진재의 세력이 자신 못지않게 커지자 그를 불러 양다리의 심줄을 잘라내고 유배시켜버렸다. 그 외에도 세력을 키우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 같은 공포정치를 실시하며 조정을 독식하던 그는 1203년에 중서문하 평장사에 올랐다가 1205년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 때 그는 이규보를 등용하여 정중부의 난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문인을 등용하였으며, 1209년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국정 전반을 그곳에서 처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1211년 내시낭중 왕준명 등이 궁궐 내에서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일을 방관한 희종을 내쫓고 명종의 아들 강종을 세웠다.

   이후 1218년에 나이 70세가 되어 스스로 치사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강종은 그에게 칠순이 넘어도 관직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궤장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 병이 들자 그는 궤장을 반납하였고, 병세가 악화되어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이렇게 그는 죽음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의 권력은 아들 최이(우)에게 세습되어 향후 60년 동안 최씨 무신정권은 계속된다.


   3. ‘신종실록’ 편찬 관련사항

  

   ‘신종실록’은 ‘희종실록’, ‘강종실록’과 함께 1267년(원종 8년)에 편찬된다. 편찬 작업은 이장용이 주관하고 유경, 김구, 허공 등이 실무를 맡았다.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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