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19세의 연하를 극복하고

똥하 2010. 10. 22. 11:43

역사적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은 많지만 19살 연하라는 엄청난 나이차를 극복하고 일생 동안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후궁은 만비가 유일하다.

 



 

명 영종의 아들 주견심은 17세의 나이로 헌종 황제에 등극한다. 헌종의 생모 주태후는 자신이 점 찍어 두었던 규수들 중 오씨를 낙점해 황후로 책봉시켰다.

 

 

그러나 헌종은 오황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후궁 만씨만을 가까이 하였다. 오황후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재색이나 소양 면에서 뛰어나지도 않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훨씬 늙은 만비가 자신보다 더 총애를 받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후는 만비가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해왔는지는 알지 못했다.

 

 

사실 헌종은 혼례 이전부터 이미 서른이 넘었던 궁녀 만정아와 연인 사이였다. 4살이란 어린 나이에 노비로 궁에 들어온 만정아는 10여 년 후 아리따운 소녀로 자라는데, 우연히 손태후의 눈에 띄어 홍수궁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 할머니인 손태후의 처소에 자주 놀러 갔던 어린 헌종은 자연스럽게 만씨와 자주 마주치게 되고, 그 때부터 헌종을 이용해 신분 상승을 이루기로 마음 먹은 만씨는 자연스럽게 헌종과 가까워지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손태후가 죽자 15세의 헌종은 만씨를 데려가 자신의 시녀로 삼았다. 이 때 만씨는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었지만 여전히 미모를 유지했으며, 스무 살 가량으로 생각할 정도로 젊어 보였다고 한다. 만씨는 헌종의 시녀가 된 기회를 틈타 그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였고, 황제 즉위 후까지 헌종이 유일하게 사랑한 여인이 된다. 헌종은 만씨를 황후로 봉하려 하였으나, 그의 비천한 신분과 나이, 태후들의 반대로 인해 오황후와 혼인하게 되고, 만씨는 별볼 일 없는 후궁 책봉을 받는데 그쳤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만 얻고 있다면 황후 자리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이를 믿고 오황후를 괄시했다. 결국 참다 못한 황후는 만씨를 끌고 와 직접 매질을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한 헌종은 만씨의 상처를 직접 본 후 자극을 받아 당장 오황후를 폐하기로 한다. 이 사건이 황후 책봉 후 겨우 1개월 만에 벌어졌다.

 

 

그러나 황제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만씨가 새 황후가 될 수는 없었다. 새 황후로 즉위한 현비 왕씨는 성품이 온화하였고, 자신이 만씨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횡포도 참고 넘기며 허수아비 황후가 되었다.

 

 


 

성화 2, 만씨가 장자를 낳아 귀비가 되지만 아이는 얼마 못 가 사망한다. 그 이후로 다시는 임신하지 못한 만귀비는 회임한 다른 후궁들을 매우 질투해 몰래 약으로 낙태시키려는 등 횡포를 부렸다. 헌종은 계속 자식을 얻지 못하다가 즉위 5년 만에 현비로부터 아들을 낳는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현비의 아들을 황태자로 봉했으나, 황태자는 이듬해 갑자기 병에 걸려 홀연히 죽고 만다. 건강하던 황태자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태감들은 몰래 조사를 벌여 이 또한 만귀비의 행각임을 밝혀냈으나, 모두 보복을 두려워해 아무도 알리지 못했다. 이러한 소동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만귀비의 악행을 전혀 몰랐으며, 그를 변함없이 아꼈다. 만귀비의 위세는 점점 드높아져, 나중에는 조정대신이나 황제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어느 날, 황제는 태감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자신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것. 게다가 이미 6살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태감은 태자와 생모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이 사실을 계속 숨겨왔다며 전말을 공개했다.

 

 

성화 3, 궁궐 창고에 가끔 들르던 황제는 그곳에서 일하던 궁녀 기씨를 만난다. 자신의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모습과 총명함에 반한 황제는 기씨와 합궁하고, 기씨는 곧 임신한다.

 

 


이 소문을 들은 만귀비는 진상을 알아보려고 궁비를 보내지만, 궁비는 일부러 거짓으로 임신이 아니라 배가 부풀어오르는 병에 걸렸을 뿐이라고 고한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만귀비는 기씨를 자신의 처소 근처로 옮겨 시시때때로 그를 감시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기씨는 임신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몰래 아들을 출산했다. 비밀을 유지하기 힘들어져 겁이 난 그는 문지기 장민에게 아이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차마 황제의 자식을 죽일 수 없었던 장민은 궁 밖에서 몰래 아이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이 아이는 폐비 왕씨의 손에 길러지며 만귀비의 위협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자신의 친자임을 확인한 헌종은 크게 기뻐하며 황태자로 삼았다.

 

 

그러나 같은 해, 후궁으로 봉해진 기씨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만귀비의 소행으로 짐작한 장민은 후환이 두려워 자살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태후들이 극진히 보살펴 만귀비도 쉽게 손을 쓰지 못했다.

 




 

어느 날, 만귀비는 황태자를 따로 불러내 놀아주며 음식을 권했다. 그러나 태후에게 만귀비가 주는 음식을 절대 먹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은 황태자는 배가 부르다며 거절했다. 다시 만귀비가 탕을 마시라고 권하자 눈치 빠른 황태자는 독이 든 것이 아니냐고 물어 만귀비도 손을 쓸 수 없게 하였다.

 

 

황태자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게 된 만귀비는 후환을 두려워해 황태자를 폐하고 다른 후궁의 자식을 옹립하도록 황제를 설득했다. 당시 만귀비는 이미 60이 넘었으나, 황제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기에 만귀비에게 매수된 조정 관료들까지 가세하자 결국 황태자를 폐하기로 결정해 버린다.

 

 

황제는 황태자 폐위를 의논하려고 대신들을 부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동악 태산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 일이 동궁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헌종은 황태자 폐위가 천의를 거슬렀다고 생각해 마음을 바꾸었다. 이로서 폐위될뻔한 태자는 겨우 지위를 보전할 수 있었다.

 

 

결국 만귀비는 태자 폐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성화 23년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악행은 꿈에도 모르고 죽을 때까지 만귀비를 지극히 사랑했던 헌종은 몹시 슬퍼하며 황후의 국장에 준하는 장례를 치러주었다. 만귀비의 죽음 후 슬퍼하던 헌종도 결국 같은 해 8월 병에 걸려 사망했다.

 

 



지금도 베이징 베이하이 부근의 베이징박물관 서쪽에 황태자가 6년간 숨어살았던 작은 골목이 남아있다고 한다. 만귀비가 죽이려 했던 이 황태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황제로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명 효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