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원의 황제들

똥하 2009. 9. 15. 07:24

원나라의 황제들

cool2889 2005.02.27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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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元祖)의 황제들
 
<원의 세계표>
 
- 추존황제를 포함해 총 21황제, 북원을 포함해 128년,북원을 제외하면 98년간 지속 - 태조 테무친 - 태종 오고타이 - 정종 쿠유크-(예종 톨루이) -헌종 몽케 - 세조 쿠빌라이 - (유종 친킴) - 성종 테무르 - (순종 타르마파드라) - 무종 하이샨 - 인종 아유르파리바드라 - 영종 시데파르라 - (현종 캄마르라) - 진종 예순테무르 - 아수기바 - 명종 코시르라 - 문종 투크테무르 - 녕종 이린치바르 - 혜종 토콘테무르 - 소종 아유르시리타드라 - 토구스테무르
 
 
[초대]
칭기즈칸(成吉思汗)
1182~1227
 
휘:테무친(鐵木眞)
묘호:태조[太祖]
시호: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運城武皇帝)
황후:광헌익성황후 홍길자씨(光獻翼聖皇后 弘吉刺氏)
 
-아시아,아니 전세계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불세출의 영걸 정복자-
 
원래는 몽골부의 작은 부족장의 아들이었다.아버지는 예수게이 바토르(바토르는
몽골어로 영웅 또는 장군이라는 뜻).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약혼녀 보르테의
부락에 갔다가 타타르부 씨족에게 습격당해 아버지를 잃은 뒤 부족이 와해되어 어머니
호엘룬,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부르칸 산으로 숨어들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 호엘룬이 한때 메르키트 족장 예케 칠리두의 아내였던 탓에,이복 동생 벡테르
와 벨구테이 형제로부터 항상 멸시를 받아 왔다.15세가 되던 해 결국 동생 벡테르를
죽이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지만,이 불운은 그 한 대(代)로는 끝나지 않았다.
 
세세 숙적인 메르키트 부족의 부족장 토크토아 베키와 그의 아우 시르겔 보코는,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습격하여 테무친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하고
수많은 몽골부족을 살상했다.
 
복수의 칼을 갈던 그는 의형제인 자무카와 함께 힘을 합쳐 메르키트부족을 토벌하는
데에 성공한다.그리고 아내 보르테를 되찾았지만,보르테는 아홉 달 후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실치 않은 큰아들 주치를 낳게 된다..주치(출적)..나그네라는 뜻이다.
 
한때 그의 목숨을 구해 준 소르칸 시라 노인의 아들들인 침바이,칠라운 형제,
그에게 무기 만드는 법을 전수해 준 제르메와 수부타이 형제.
그의 의형제인 자무카와 보르추.
항상 뒤에서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던 무칼리.
고려출신으로 한때 그의 뺨에 화살을 꽂기까지 했던 명궁 중의 명궁 체페 노얀.
그의 아우인 보로쿨.이들은 테무친에 있어서 목숨을 걸고 몽골건국을 같이 했던
공신들이자 너커르들이였다..그러나 가장 믿었던 안다(몽골말로 의형제라는 뜻)
자무카가 배신을 하게 되고,당시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두 부족,
케레이트부와 나이만부를 토벌하여 몽골을 통일하는 과정에 큰 방해가 되자
그는 눈물을 머금고 자무카를 처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복자의 길을 걷게 된다.
 
케레이트부의 쾨쾨추를 토벌한 뒤,타타르부의 무진 술투,
나이만부의 타양칸을 처단한 것을 마지막으로 몽골을 통일한 그는,부르칸 산의
신령한 기운을 받아 칭기즈 칸이라는 이름을 받고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한다.
칭기즈 칸(성길사 가한)은,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군주라는 뜻이다.
 
몽골의 대칸으로 즉위한 뒤 그는 강력한 기동력과 공격력을 자랑하는 정예 기마병으로
아시아 대륙을 휩쓸기 시작한다.그는 일단 중원으로 눈을 돌려 금나라의 무능한 군주
위소왕이 정사를 잘못하는 틈을 타 금을 북경에서 내몰고 북경을 차지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북중원 전체를 몽골의 영토로 만들었다.이 전투에서 금이 자랑하던 맹장 완안복흥
(完顔福興),곽하마(郭河馬)이하 수많은 장수들이 죽거나 몽골의 편으로 돌아서,황하 이남 변경
으로 도망친 금나라의 국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게다가 황실 근위대장이던 출호고기,
거란의 황족출신으로 요녕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야율유가 등이 모두 반기를 들거나 몽골의
편에 섰고,금은 결국 30여 년도 더 버티지 못하고
1234년 멸망하게 된다.사실 비화조(불화살 연노)를 앞세운 금나라의 군사력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라 할 수 있었으나 칭기즈 칸의 노련한 기마 전술에 그들은 맥을
못추고 당할 뿐이였다.
 
그러나,농경지와 도시뿐인 중원 땅은 그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는 그는 항상 말을 달리고 가축을 풀어놓고 사냥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그는 정복지 북중원을 너커르 무칼리에게 맡기고,저 거란의 마지막 황자
야율대석(耶律大石)이 꿈을 펼쳤던 땅-푸른 초원이 너르게 펼쳐져 있는
실크로드의 서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야율대석이 세운 서요는 덕종(야율대석),인종(야율이열)에 이어
세 번째 황제 야율지거기가 즉위하면서 황혼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야율지거기는 사위였던 나이만의 왕자 쿠츨룩에게 배신당해 독살당하고
쿠츨룩은 아버지 타양칸의 원수인 칭기즈 칸을 노리다가 오히려 몽골군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서요의 복속국가로써 약소국에 불과했던 이슬람의
코라즘 왕국에 쿠틉 알딘 무하마드(4대 국왕,재위 1200~1221)라는 영웅이 나타나 오히려 서요를 복속시키고 여명의 샛별이라는 대도시,부하라를 수도로 하여 그 국세를 사방에 떨치고 있었다.
한때 서요에 버금가는 대국이였던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역시 그 세가 미미하게 된 지 이후라 서하 황제 양종 이안전은,칭기즈 칸에게
서둘러 공물을 바치고 복속을 선언했다.그러나 코라즘은 달랐다.술탄 무하마드는
칭기즈 칸이 보낸 대상단과 화친의 사절을 매를 때려 내쫓고 칭기즈칸을 비아냥
거리는 서신을 보내오기까지 이르른다.그 사촌으로 가일지방의 영주였던 이날축은 한술 더 떠 칭기즈칸이 아끼는 너커르 유순을 비롯,그 부하 400여 명을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지른다.
 
격노한 칭기즈 칸은 순식간에 코라즘 왕국을 기마부대로 휩쓸기 시작했다.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코라즘의 수십만 대군은 하나로 모이지 못했고,이날축과 술탄의
외숙 토가이가 이끄는 사나운 투르크멘족 용병들도 칭기즈칸의 말발굽 앞에서는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결국 술탄 무하마드는 수도 부하라를 빼앗기고 이리저리
떠돌다 칭기즈 칸의 추격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고,그 아들 제라르 알딘은 마지막
까지 저항하다 델리 술탄국으로 도망쳤다.이로써 칭기즈 칸은 광대한 서역의
땅을 손에 넣고,명실공히 몽골은 세계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코라즘 정복 후,킵차크 초원을 정복하겠다고 떠나간 큰아들 주치가 돌아오지 않자 칭기즈 칸은
큰 상심에 빠지게 된다.자신과 같은 운명을 걷고 있던 항상 고독했던 큰아들을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칭기즈 칸은 아들 주치가 결국 킵차크의 사라이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칭기즈 칸은 아들 주치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평생을 전장터에서 함께 싸우던 너커르 체페 노얀마저 잃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그에게 복속을 맹세했던 서하의 양종이 죽고,아들 이덕왕(李德王)이 즉위하면서 서하는 몽골에 조공을 바치지 않고 거만한 태도로 대하기 시작했다.그도 그럴것이,칭기즈 칸은 이덕왕의 누이의 미모를 보고 빼앗아 가 첩으로 삼았지만,그녀가 라마교도인 것에 격분해 그녀를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서하의 조약 파기행위에 격노한 칭기즈칸은 서하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물론 서하의 군사력은 몽골에 상대조차 되지 않았지만,아들과 심복을 동시에 잃은 상심을 겪고 전투를 이끌기에 칭기즈 칸은 이미 너무 늙어 있었다.결국 서하 정복 도중 세계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영웅 칭기즈 칸은,셋째 아들 오고타이에게 서하정복의 유지를 남기고 예순 한 살을 일기로 그 위대한 일생을 마쳤다.
 
[제2대]
오고타이칸(曰蛤台汗)
1229~1241
 
묘호:태종[太宗]
시호:영문황제(英文皇帝)
황후:소자황후 내마진씨(昭慈皇后 乃馬眞氏)
 
-다정다감하고 유연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던 정복자의 후계자-
 
칭기즈 칸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오고타이는,술을 너무 좋아해서 주광황제라 불렸던 인물이다.
느긋하고 따듯한 성품을 지녔던 그는 항상 싸움과 분쟁을 일으키는 두 형 주치와 차가타이를 중간에서 말리는 역할을 훌륭히 했고 결국 칭기즈칸은 능력은 다소 떨어지나 무난한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선임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오고타이 칸은 명재상 야율초재(耶律草才)의 보좌로 몽골 제국과 정복사업을 훌륭하게 이끌어갔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유고를 이어 서하를 공격하여 결국 다시 복속을 받아내고,조카인 바투(주치의 아들), 예수몽케(차가타이의 아들),아들인 구유크,그리고 동생 톨루이의 아들인 몽케와 쿠빌라이를 동유럽에 파견해 러시아,우크라이나,그루지야는 물론 헝가리까지 침공해 들어가 동유럽을 휩쓸어 모두 몽골의 영토로 삼아 버렸다.
게다가 아바스조의 칼리프 알 무스타짐의 태도가 불손하다 하여 조카 훌라구(쿠빌라이의 동생)를 시켜 아바스조를 정복하게 하였다. 아바스군은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수도 바그다드는 몽골의 손에 떨어지고 알 무스타짐 일가는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후 훌라구는 호르무즈(현재의 이란 반다르압바스)를 수도로,일칸국을 세워 아랍세계를 지배하는 첫 몽골의 칸이 된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은 너무도 술을 좋아한 나머지 몸이 약해져 바투의 유럽 정벌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회군하게 된 몽골군 덕에 서유럽은 독립을 지킬 수 있었으나 오고타이 칸은 후계자 지명에 있어 실수를 하고 말았다.
 
원래 오고타이칸이 후계자로 지목했던 인물은 그의 셋째아들인 코르추였다.그러나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아내인 내마진 황후 토라가나(원래 메르키트부 호두의 아내로 부족이 망한 후 노예로 끌려온 것을 그 미모를 보고 오고타이가 아내로 삼았다)는 능력이 부족하여 일찍이 물망에서 제외되었던 자신의 큰아들 쿠조를 밀었다.오고타이 칸은(공처가였다고 함)아내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아들 코르추 사후 후계자로 지목했던 조카 몽케 대신 아들 쿠조를 후계자로 선언하고 말았다.그 유언은 결국 50여 년간 지속된 몽골의 내란의 불씨가 되고 ,나아가 오고타이가의 전멸을 불러오고 만다.
 
[제3대]
쿠유크(쿠조)칸(貴由汗)
1242~1248
 
묘호:정종[定宗]
시호:간평황제(簡平皇帝)
황후:흠숙황후 내마진씨(欽淑皇后 乃馬眞氏)
 
-황제의 재목이 되지 못했던 자-
 
오고타이의 큰아들.어머니는 토라가나 황후.아버지를 닮아 성정이 느긋하고,몽골인 답지 않게 아름다운 풍채까지 지닌 황자였으나,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여 일찍이부터 동생들에 밀려 후계구도에서 밀려나 있었으나 그조차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 덕에 황제가 되었지만 즉각 사촌들의 반발에 휩싸였다.6년 동안 재위했으나 정복전쟁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아버지가 중용했던 재상 야율초재와 그 아들 아율주의 간언조차 별 주의있게 듣지 않았다.서역출신의 모슬렘 재상 압둘 하프만을 기용하여 몽골제국의 재정은 튼튼히 했지만,아버지보다 더 술을 좋아하고,아내 카이미시 카툰에게 완전 죽어 지냈던 공처가였던 그는,성정까지 거칠어져 결국 사촌 세이반(쿠빌라이의 동생)과 말다툼하던 도중 지병인 고혈
압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몽골의 대칸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는 초라한 최후였다.
 
그후 아내 카이미시 카툰은 그의 조카로 오고타이의 4남 코르단의 아들 시레문과 모의해
섭정을 선포하고 톨루이의 아들들:몽케,쿠빌라이,훌라구: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다가,바투와 쿠빌라이의 기습 공격에 발각되어 시레문은 죽음을 당하고 카이미시 카툰은 두 아들 카단,나구와 함께 유폐되었다가 능욕을 당하고 자결했다.
그리고 몽케가 대칸에 오르게 되어 몽골제국의 적통은 오고타이계에서 톨루이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추존황제]
톨루이칸(拖雷汗)
 
묘호:예종[睿宗]
시호:경양황제(景襄皇帝)
황후:현의장성황후 겁열씨(顯懿莊聖皇后 怯烈氏)
 
-잔인했던 자-
 
몽골을 통틀어 가장 잔인한 자라고 불렸던 철면피.코라즘전에서는 매제인 토크차르와 조카 무아투칸(차가타이의 아들)이 전사하자 광기에 휩싸여 지나가는 도시마다 백성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살상했던 경력까지 가지고 있어,같은 몽골족 사이에서도 그 잔인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극악무도하여 아버지의 눈밖에 나 일찌감치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아내인 소르콕타니 베키는 자애로운 기독교도로써 자녀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양육했고 결국 톨루이의 둘째아들 쿠빌라이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성군 원 세조가 되었다.
 
셋째 아들 훌라구가 일칸국을 세우기 전에 죽었으며,둘째아들 쿠빌라이가 즉위한 뒤 황제 예종으로 추서되었다.
그의 자식들로는 장남 몽케,차남 쿠빌라이,삼남 훌라구,사남 세이반,오남 아리크 부케가 있었다.
 
[제4대]
몽케칸(蒙可汗)
1248~1260
 
묘호:헌종[憲宗]
시호:환숙황제(桓肅皇帝)
황후:정절황후 홍길자씨(貞節皇后 弘吉刺氏)
 
-우유부단했던 자-
 
톨루이의 장남.어머니는 소르콕타니 베키라 불린 겁열황후.사촌 형 바투를 따라 항상 전장터에 종군하였다.
쿠조칸 사후 킵차크 칸 바투에게 옹립되어 황제가 되었다.바투는 권력에 별 관심이 없어 일찌감치 사라이(킵차크한국의 수도)로 돌아갔지만,항상 동생 쿠빌라이를 의심하여 그의 남송정벌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게다가 시비르 지역에는 반란의 기운마저 싹트고 있었다.오고타이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에 큰 앙심을 품고있던 오고타이칸국의 칸 카이두(오고타이칸의 5남 카시의 아들)는,사사건건 대칸 몽케의 명령에 복종 하지 않고 반기를 거세게 들었다.
 
죽음에 임박해 몽골제국의 분열을 깨달은 몽케는 정식 후계자로 그의 아들 아스타이나 톨루이의 후계자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게가 아닌,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칭기즈 칸의 위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쿠빌라이를 지목하여 원나라의 대계를 확립하게 하는 데에 공헌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으로 양양성에서 농성하던 남송의 장군 여문덕(呂文德)과 쿠빌라이는 화친하였고,남송정벌은 일시 중단되었다.
 
[제5대]
쿠빌라이 세첸칸(忽必烈可汗)
1260~1294
 
묘호:세조[世祖]
시호: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황후:소예순성황후 홍길자씨(昭睿順聖皇后 弘吉刺氏)
 
-세계제국의 위대한 대군주-
 
톨루이의 차남.어머니는 소르콕타니 베키.몽골의 5대칸이며,원제국의 초대황제.
원 세조(元 世祖)하면,원에 대해 잘 모르는 자도 아~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를 떠올릴 것이다.
 
형 몽케의 사후 재빨리 조카 아스타이와 동생 아리크부게를 수도에서 쫓고,아리크부게의 추종자들을 죽인 뒤 유언을 받들어 황제가 되었다.그리고는 수도를 카라코람에서 북경으로 옮겨 북경을 대도(大都)라 명명하였다.
이후 북경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가 되었다.
 
위구르족 출신 염희헌과 맹장 바얀[白顔]의 보좌를 받은 쿠빌라이 칸은 그 자신의 무력도 뛰어났을 뿐더러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할 줄 알았으며 유목민답지 않게 느긋하고 인자한 성품과 형 몽케가 가지지 못한 결단력까지 갖춘 영웅이였다.
 
황제가 된 쿠빌라이에게 당면한 일당의 숙제는,아직도 강남지방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남송을 토벌하는 일이었다. 남송의 집권자 가사도(價社道)는 황제 탁종(度宗)의 처남으로써 십여 년 간 남송의 권력을 잡고 썩을 대로 썩어 있었으나
강서성 지방의 문천상(文天相),항주의 진의중,애산의 장세걸,수군도독 범문호,그리고 양양성의 여문환(呂文煥:여문덕의 동생)등 쟁쟁한 맹장들이 버티고 있었다.그래서 몽케가 파견했던 몽골의 맹장 우량카다이의 군대마저 패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바얀을 총대장으로 하여 염희헌,아류(우량카다이의 아들),이항,아라캉,이송걸 등의 맹장들을 파견하여 양양에서 여문환의 항복을 받아내 그 군세를 단단히 다진 뒤,남송 가사도의 횡포를 토벌하러 온 정복군의 면모로 한족의
마음을 사로잡아 범문호의 수군을 몽골의 편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그리고 태건(泰建),장순(張順)등의 수군을 격파한 뒤 수도 항주로 진격,남송 황제 공종은 자결하고,공종의 동생 단종과 상흥제를 받들어 애산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문천상과 장세걸의 군대를 1279년 애산 앞바다에서 전멸시켜 남송을 멸망시키고 명실상부하게 중국을 통일하여 세계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제국에는 일찍 몽골에 굴복한 순서로 민족별(몽고인-서역인-북부 한인-남부 한인)차별이 있긴 하였으나,
쿠빌라이 자신은 민족에 그리 구애받지 않았으며,게다가 종교에 구애받지 않았고 상업을
중시하여 교역이 크게 발달했으며 서유럽을 꼼짝못하게 할 정도로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오고타이칸국의 칸 카이두는 쿠빌라이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것에 격분하여,차가타이칸국의 칸 바라크(차가타이의 손자),섭정 오르가나(차가타이의 손자며느리),왕자 무바라크(오르가나의 아들),그리고 아리크부게의 아들인 유브풀,황족출신 맹장인 나얀,그리고 킵차크칸국의 칸 망구 티무르와도 손을 잡고 쿠빌라이에 대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고,고원의 총사령관이였던 쿠빌라이의 둘째아들 노무칸과 셋째아들 곡추를 사로잡아 인질로 삼기까지 한다.
 
카이두의 세력은 차가타이 칸국의 내분과 반란군 내의 결속력 약화로 곧 와해되고 노무칸과 곡추는 풀려났지만, 그 자신의 저항은 쿠빌라이칸이 사망한 뒤인 1301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쿠빌라이는 황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에 큰 책임과 통감을 느낀데다,쿠빌라이칸의 훌륭한 후계자로써 (섭정으로써)선정을 펼쳐 정복전에 큰 내조를 한 장남 친킴마저 세상을 떠난다.
 
쿠빌라이 칸은 막내딸 계리미실(제국대장 공주)을 고려의 충렬 왕에게 시집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81세를 일기로 친족간에 화목하라는 유언을 손자 테무르(친킴의 셋째아들)에게 남긴 뒤 그 위대한 일생을 마쳤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인으로 원제국에서 쿠빌라이 칸의 18년동안의 총애를 받았던 마르코 폴로는,저서 동방견문록에서 이 동방의 위대한 황제를 신격에 부합하도록 격찬하였다.
 
[추존황제]
친킴칸(眞金汗)
 
묘호:유종[裕宗]
시호: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
황후:휘인유성황후 홍길자씨(徽仁裕聖皇后 弘吉刺氏)
 
쿠빌라이의 장남.태자로써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제6대]
테무르 올제이투칸(鐵木爾汗)
1294~1307
 
-젊은나이에 져버린 쿠빌라이의 영민한 후계자-
 
묘호:성종[成宗]
시호:흠명광효황제(欽明廣孝皇帝)
황후:정자정의황후 홍길자씨(貞慈靜懿皇后 弘吉刺氏)
 
친킴의 셋째아들.두 형 캄마르라와 타르마파르라가 잇따라 요절하여 1293년 스물여덟 나이로
쿠빌라이의 황세손이 되었다.젊은 황제답게 영민하고 똑똑하여 항상 친족의 반란에 괴로워하던
조부 쿠빌라이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즉위한 뒤 숙적 카이두를 토벌하고 오고타이 한국의
영지를 크게 축소시켜 그 세력을 꺾은 뒤,차카타이한국의 칸 두와와 킵차크의 칸 망구 티무르에게도 충성서약을 받아 평화를 지켰다.
 
쿠빌라이에게 바얀과 염희헌이 있었다면 그에게는 명재상 하라하슨[哈刺合遜]이 있었다.
그의 보좌로 젊은 황제는 훌륭히 거대한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1307년 마흔두 살 젊은 나이로 황자도 황녀도 아무도 남기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지만
고려에도 크게 우호적이었고 쿠빌라이의 유지를 잘 계승했던 그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분명히 몽골제국의 또다른 기둥이 되었을 것이다.
 
[제7대]
하이샨 쿠르크칸(海山汗)
1307~1311
 
묘호:무종[武宗]
시호:인혜선효황제(仁惠宣孝皇帝)
황후:인헌장성황후 역걸렬씨(仁獻莊聖皇后 亦乞烈氏 - 명종의 생모)
문헌소성황후 당올씨(文獻昭聖皇后 唐兀氏 - 문종의 생모)
 
테무르의 조카로,테무르의 둘째 형 타르마파르라(추존 순종順宗)의 차남.형은 위왕 아목가이며 동생이 인종 아유르파리바드라이다.
테무르처럼 28세 되는 1299년부터 북방 전장터에 나가 많은 수훈을 세웠으며 북방영주파의 지지와 테무르의 유지를 받아 1307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외모도 성격도 여성스러웠던데다 몸이 약해 라마교에 크게 의지했던 그는 라마교를 몽골의 황실종교로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쿠조칸 이래 넘쳐났던 몽골의 재정을 파탄시켜 버렸다.
그는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지대은(至大銀 혹은 지대은초)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고,몸이 더욱더 약해진 황제는 절망해 여색에만 탐닉하다(몽골 황제 중 가장 후궁이 많았다)서른 하나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렸다.
 
[제8대]
아유르파리바드라 쿠얀투칸
1311~1320
 
묘호:인종[仁宗]
시호:성문흠효황제(聖文欽孝皇帝)
황후:장의자성황후 홍길자씨(莊懿慈聖皇后 弘吉刺氏)
 
무종의 동생.병약한 형과는 달리 씩씩한 유목민의 기상을 타고났다.
무종의 유언으로 황제에 올랐으나,그 조건은 황태자로써 무종의 장남 코실라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9년 동안 재위하며 황제라는 자리에 매력을 느낀 그는 코실라와 그 동생 투크테무르를 유배시켜버리고 자기 아들 시테파르라로 하여금 제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암살과 가문의 단절로 나타나고 만다.
 
[제9대]
시테파르라칸
1320~1324
 
묘호:영종[英宗]
시호:예성문효황제(睿聖文孝皇帝)
황후:장정의성황후 역계렬씨(莊靜懿聖皇后 亦啓烈氏)
 
아버지는 인종황제,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탓에 황제가 되었다.그 탓에 하이샨 칸을 옹립했던 북방 영주파를 비롯,조정 중신들은 그를 황제로 여기지 않았고 그는 항상 불안한 나머지 라마불교에만 탐닉했고 결국 하이샨 칸의 전철을 밟아 재정은 파탄나고 각지에서 재해가 일어났으며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이며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황권은 바닥을 기었고 킵차크와 일칸국도 황제를 업신여기고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그 사태를 그저 두고볼수만 없었던 애국자들과 궁중 대신들은 황제암살의 음모를 기도하였고
결국 무종 하이샨칸의 추종자였던 북방영주파와 궁중대신들에게 암살당하였다.
그 뒤는 아버지 인종의 사촌인 예순 테무르가 잇게 되었다.
 
[제10대]
예순테무르칸
1324~1328
 
묘호:진종[眞宗]
시호:태정황제(太定皇帝)
황후:태정황후 홍길자씨(泰定皇后 弘吉刺氏)
 
아버지는 진왕 캄말라,그가 제위에 오른 뒤 부친을 현종(顯宗)으로 추증했다.그 자신은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유능한 신하들의 보좌만 있다면 제국을 잘 이끌어 나갈수 있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황제로 옹립한 북방영주파와 궁중대신들 중에는 그럴만한 인물이 한 명도 없었다.
 
그는 항상 5촌 조카가 되는 투크테무르(圖帖木爾)를 경계했다.사실 당시 황족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그는 몽골의 기상을 주체하지 못해 항상 외몽고 사막에서 말을 달리던 인물이었다.
어린 아들 아수키바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그를 제거해야 했던 태정제는 그를 변방으로 내쫓았지만 그 일로 원한을 품은 투크테무르에게 결국 사후에 복수를 당하게 된다.
 
여동생 보탑실리는 고려의 충선왕의 아내였다.제위에 오른 뒤 충선왕을 북경으로 불러들여
온갖 특혜를 주고 고려에 많은 원조와 지원을 해 주었다.
이미 제위에 오를 때도 나이가 상당했던 그는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때
그의 아들 아수키바의 나이는 겨우 아홉살에 불과했다.
 
결국 아수키바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태정제가 우려했던 투크테무르에게 폐위되었고,그는 비록 사후였으나 투크테무르의 복수로 폐위되어 시호도 묘호도 삭호당하고 찬탈자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제11대]
아수키바칸
1328
 
시호:천순황제(天順皇帝)
 
원나라 유일의 폐제(廢帝).
 
겨우 아홉 살로 제위에 오른 그는 물밀듯이 대도로
진격하는 사나운 투크테무르의 군사에 밀려 황궁에서 도망친 뒤
구사일생으로 북경에서 탈출하였다는 소문만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제12대]
코시르라 올제이투칸(和世汗)
1328~1329
 
묘호:명종(明宗)
시호:익성경효황제(翼聖景孝皇帝)
황후:정유휘성황후 홍길자씨(貞裕徽聖皇后 弘吉刺氏)
 
무종 하이샨의 장남.엔티무르에 의해 천순제가 폐위되자 황제가 되었다가
1년도 못 가 엔티무르와 반목해 독살 당했다.
 
[제13대]
투크테무르 올제이투칸(圖帖木爾汗)
1329~1332
 
묘호:문종(文宗)
시호:성명원효황제(聖明元孝皇帝)
황후:홍길자씨(弘吉刺氏)
 
-스물여덟로 꺾여버린 몽골의 마지막 영웅-
 
쿠빌라이,테무르칸 이후로 가장 위대했던 황제.유목민의 훌륭한 기상을 타고난 젊은이로
어릴때부터 북방영주파와 대립하였다.하이샨 칸의 아들이지만 북방 영주파는 원래
하이샨 칸의 추종자들이었으나 인종황제에게 푸대접을 받아 예순 테무르-훗날의 진종-
에게로 돌아섰다.그는 배신자라며 북방 영주파에게 이를 갈고 그 반대파인 궁중파의
태평장군(훗날의 태평왕)엔티무르[燕鐵木兒]와 손을 잡았다.
 
진종에게 경계를 받아 북방에서 말을 달리며 기회를 엿보던 그에게 엔티무르는
진종의 죽음을 전한다.그는 곧바로 쿠릴타이(부족장 회의)를 열어 북방 영주파를
누르고 천순제 아수키바를 폐위한 뒤 형 코시르라를 옹립,허수아비 황제 명종(明宗)으로
만든 뒤 자신은 황태제로써 전권을 쥐었다.
 
그러나 명종과 엔티무르의 사이가 벌어져 결국 형 명종은 죽음을 당하고,
엔티무르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그는 자신을 허수아비로 세우려는 엔티무르의
계획에 결코 나긋나긋하지 않았다.오히려 엔티무르는 그에게 압도되었으며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규장각을 세웠으며,학문서 경세대전(經世大典)을 편찬하는 등
몽골황제 중 유일하게 탁월한 문장력과 정치력도 소유했다.
한족의 우수한 문화를 답습하려 노력했고 한편으로는 유목민 특유의 기상과 날카로운 이빨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운명은 몽골의 마지막 영웅을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그가 죽자 제국의 전권이 엔티무르의 손에 들어갔고 대원제국은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14대]
이린치바르칸
1332~1333
 
묘호:녕종(寧宗)
시호:충성사효황제(沖聖嗣孝皇帝)
황후:홍길자씨(弘吉刺氏)
 
명종 코실라의 차남.엔티무르에 의해 정략적으로 황제에 옹립되었지만
재위 48일 만에 급사하고 말았다.
독살설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제15대]
토콘테무르칸(妥權帖睦爾汗)
1333~1370
 
묘호:혜종(惠宗)
시호:순황제(順皇帝)
황후:순황후 기씨(順皇后 奇氏)
 
명종 코실라의 장남.엔티무르에게 아버지를 잃고 숙부 투크테무르칸에게도 미움을 받아
고려,티벳과 광서성 일대를 떠도는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한족,고려인들과 같이
자라난 그는 타민족에 대한 편견이 없었으며 훗날 기씨황후를 황후로 맞아들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엔티무르는 자기 딸을 억지로 그와 결혼시킨 뒤 그를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하고,자신은
태평왕(太平王)이 되어 실제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그러나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인
엔티무르에게 복수의 칼을 갈던 그는,쿠빌라이 칸 시절 맹장 바얀의 후예인 바얀[伯顔]
과,그 조카 토크타와 손을 잡고 결국 엔티무르 일문을 멸족시키고 부친과 동생의 원수를
갚았다.
 
초창기의 혜종은 성군이었다.소수민족에 너그러웠으며,
숙부 투크테무르칸을 미워했지만 그의 훌륭한 정책을 계승하려 애를 썼다.한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요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를 집필하고,한때 원나라 문화의
최성기를 이루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고려에서 공녀로 온 기씨(奇氏)성을 가진 아름다운 미소녀를 본 그는,소녀에게 푹 빠져
결국 그녀를 황후로 세웠다.엔티무르를 제거한 것도,실은 그녀를 황후로 세우기 위해
엔티무르의 딸을 폐위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기씨소녀 역시 처음에는 고려의 앞선문화
를 원나라에 도입하는데에 힘을 쓰고 국본이라는 황태자를 임신하는 등 황후로써 손색이
없었으나,점점 그녀에게 빠져 안이해져만 가는 황제는 이미 유약한 군주가 되어 있었다.
 
영종 시데바르라 칸 이후로 원의 재정은 상당히 궁핍하였고,혜종도
재정면에는 그리 큰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다.게다가 천재지변까지 겹쳐 결국 혜종 말년 중국 각지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말았다.홍건의 총대장 주원장은 순식간에 남경을 정복하고,북경을 위협하게 되었다.결국 1368년,그가 황제에 오른 지 36년 만에 북경은 함락되었고,
그는 상도(上都:카라코룸)과 응창(應昌)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지병이 악화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성군이 되도록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던
그는 백성들이 전화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에서 세가 불리함을 알자 전쟁을 치르지 않고
북경을 주원장에게 내주었다.주원장은 그의 태도에 감복하여 명나라를 세운 뒤 그에게
순제(順帝)라는 시호를 추증했는데,대세에 순응하여 희생을 치르지 않았다는 뜻이였다.

 
[제16대]
아유르치리타드라칸
1370~1378
 
묘호:소종(昭宗)
시호:선광황제(宣光皇帝)
황후:홍길자씨(弘吉刺氏)
 
-무참히 꺾여버린 원대했던 코리안드림-
 
혜종과 기황후의 맏아들.고려인의 기상을 이어받아 능력이 뛰어났다.
고려인 핏줄로 대원의 황위를 계승하여 위대한 황제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홍건적에 밀려 응창까지 후퇴한 그는 응창에서 명군을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대패하여 아들 마이트레야바라를 위시하여 수백의 친족들이 명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중원 영토를 완전히 상실하는 치욕을 겪고 말았다.
 
그러나 만슈리아,감숙지역과 티벳,운남,귀주지역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를 황제로
모셨으며,1372년 주원장은 서달이란 장수에게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몽골고원을
공격하도록 했지만,직접 진두지휘한 그와 그의 심복으로 원말의 마지막 맹장이던
쿠쿠테무르는 톨강에서 15만의 명군을 모조리 전멸시키는 기지를 발휘해 몽골의 마지막 불꽃을 타올렸다.
 
1378년 중원에 포로로 끌려간 가족들을 그리다 카라코룸에서 죽었다.
그가 죽고 곧 쿠쿠테무르도 죽어 마지막 불꽃을 타올리던 원의 세력은 급속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17대]
토쿠스 우스길 테무르칸
1378~1388
 
-대원제국 마지막 황제-
 
혜종과 기황후의 둘째아들.
소종 시절 잘라이르부족의 나하추[納哈出]와 함께 원군의 좌우익을 맡은 맹장이었다.
형이 죽자 제위를 계승,명나라에게 빼앗긴 내몽고 쿠룬 부유르를 탈환하고
한때 금방이라도 북경을 위협할 태세를 갖추어 형의 유지를 잘 잇는 듯 했다.
 
그러나 좌익을 담당했던 잘라이르 나하추가 이끄는 20만 대군이 명의 풍승에게 괴멸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나하추는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으나,명의 꾀임에 넘어가
원을 배신했던 것이다.그후 나하추는 명의 장수가 되어 운남 정벌에 참여하다가 병사했다.
 
믿었던 나하추의 배신에 치를 떨던 그는 동부 노르호반 지역으로 후퇴하여
어머니의 나라 고려에 연락을 취해 명을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친원과 친명파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하고있던 고려는 원군을 파견할 힘이 없었으며
결국 원군 없이 1388년 명의 장수 남옥을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병력의 절대적인 열세로
인해 패배하고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부하인 이스테르에게 살해되었다.
 
이스테르는 쿠빌라이칸의 동생인 아리크 부케의 후손으로,오이라트 부족의 지지를
받아 대원제국의 황제가 아닌 몽골제국의 칸으로 그 위를 이었다.
원(元)이라는 국호는 폐지되었으며 그의 사후 오이라트의 야선(에센,也先)이 대원 천성대가한을 칭했을
뿐 몽골의 칸 그 누구도 원나라를 계승하려 하지 않았다.
 
이로써 유라시아를 지배했던 세계역사상 유일의 초강대국 대원제국은 15대 128년만에
그 장엄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황제와 황후의 시호는
너구리(shepred)님 지식을
참고했습니다-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일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