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스크랩]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如何是祖師西來意)

똥하 2009. 4. 19. 18:11



보리달마 대사 (菩提達摩 大師 : Bodhi Dharma)

보리달마(菩提達摩)는 산스크리트어 bodhi dharma를 소리번역한 것이며, 흔히 달마라고 한다. 그는 남인도의 한 작은 나라에서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붓다의 제27대 직계 제자인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대야말로 모든 도리에 통해있다. 이제, 달마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라는 존자의 인가와 함께 얻게 된 이름이다. 이리하여 달마는 제28대 조사(祖師)가 되었으며 또한 존자로부터 엄숙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은 불법의 진수를 얻었더라도 곧바로 이를 전하기 위하여 멀리 가서는 아니 되며 당분간은 남인도에 머물러 있다가 존자 입적후 67년이 지나면 중국에 건너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서는 종교적인 능력이 뛰어난 상근기의 사람들만을 선택하여 가르쳐야 할 것이며 도를 성급히 전하고자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또 언제까지나 중국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며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곧 인도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유계(遺誡)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었다. 그것은 뒤의 선승들이 덧붙인 픽션이다. 결국 달마가 전해 온 선종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려운 신흥종교이고, 전래되어온 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 혹은 이미 불교를 전해온 승려들의 원성을 살 것을 예언의 형태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법보기>에 의하면 달마는 여섯 번이나 독이 든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결국 독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했던 것으로 되어있다.

스승의 명을 받아 남인도에 머물면서 민중을 교화하던 달마는 마침내 중국으로 가야 할 기회가 무르익었음을 알고 반야다라존자의 탑에 이별을 고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3년의 세월이 걸려 남해(현 黃州)에 도착했던 때가 양나라 보통 원년(520년)이라고 한다. 돈황에서 출토된 <낙양가람기>에 의하면 달마는 실크로드를 통하여 낙양에 온 페르시아의 승려로 나이 150세였다는데, 그 달마와 선종 조사인 달마가 동일인물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광주에 도착한 달마는 곧 금릉으로 가서 불심천자(佛心天子)라 불린 양무제를 만났다. 무제는 중국 역대 제왕 가운데서도 최고의 불교 외호자로 이름이 높다.

“짐은 즉위 이래 절을 짓고 경을 베끼게 하고, 승려를 출가케 한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소. 그 공덕이 어느 정도이겠소?”
“공덕이 없소이다.”(別無功德)
“어째서 공덕이 없다는 말이오?”
“그것들은 단지 인천(人天)의 작은 과보일 뿐, 유루(有漏)의 인(因)이 될 뿐이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형체에 따르는 그림자와 같이 참다운 것은 아니라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다운 공덕이오?” “많은 지혜가 뚜렷하고 묘하여 스스로 공적함이니, 이와 같은 공덕은 세상의 이치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오.” “성스러운 진리는 무엇이오?”
“성스러운 것은 없소.” “짐을 마주하고 있는 자는 누구요?” “모르오.”(不識)
무제와의 대화는 <조당집>과 같은 오래된 사서(史書)에도 보이고 있지만, 만약 역사적 사실이라면 불심천자에 대해서는 대단한 불경(不敬)이었다. 애써 새로운 이국의 종교에 호의적이었던 권력자에게 달마는 자신의 입장을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았던 것이다.

달마의 이처럼 의연한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달마가 다른 나라에 법을 전하고자 한 뜻은 무엇이었을까? 선문(禪門)에서는 이를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라 한다.

또한 그 먼 남인도로부터 중국까지 올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은 초기의 선(禪)수행자들에게는 지극히 소박한 물음이었던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것이 선의 진리에 대한 물음이 되고 선수행자들 간의 좋은 공안이 되었다. 달마는 스승인 반야다라존자로부터 법을 잇고부터, 이미 중국이야말로 대승불교에 적합한 땅임을 예언하고 있었으므로 중국으로가서 교화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었을 것이다.

달마는 그러한 미래를 위하여 중국말을 배웠음에 틀림없다. 다른 문화의 전달에는 언어문제가 어느만큼 장애가 되며, 또 이를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면 중국인이 전부였던 초기의 선수행자들 사이에서 이방인인 달마가 겪었던 이러한 특이한 고생은 간과될 수 없을 것이다.

달마가 <능가경>을 전한 것, <이입사행론>을 설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언어 문학에 대한 소양 없이는 선불교의 이입(移入)은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법을 전할 제자를 만나기 위해 화북지방에 이른 달마는 숭산의 소림사 석실에 들어가서 좌선을 시작했다. 그렇게 묵묵히 단좌(端座)한 모습을 당시 사람들에게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의 의도를 헤아릴 길이 없었으며 그저 그를 ‘벽관바라문(壁觀波羅門)’이라고 부르며 외경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벽관’을 ‘면벽(面壁)’으로 혼동하고 있다. 이것은 ‘벽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벽이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면벽구년’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돈황 문헌 중에서 달마의 어록으로서 대표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는 <이입사행론>의 첫머리에

이와같이 안심(安心)하고 이와같이 행동을 하게 하여 이와같이 사물에 순응하고 이와같이 방편을 쓴다. 이것은 곧 대승안심(大乘安心)의 법이니 그릇됨이 없도록 하라…(중략)…이와같이 안심하는 것은 벽관이다.”는 구절이 보인다.

결국 벽관은 안심과 동의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벽관은 벽을 향하여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벽과 같이 견고한 마음으로 번뇌가 붙지 못하도록 진리를 지켜서 움직임 없는 경지에 머무른 것, 곧 안심법문(安心法門)의 내용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화북 사람들이 달마라고 하는 이국의 승려에게서 느꼈던 것은 그러한 견고부동의 불법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달마야말로 가까이 하기 어려운 벽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달마는 중국에 와서 9년이 지나자 다시 인도로 돌아가기로 하고 제자인 도부(道副), 총지비구니(持比丘尼), 도육(道育), 혜가(慧可)에게 각기 자기의 법문 중에서 가죽, 살, 뼈, 골수를 얻었음을 증명하였다. 특히 수를 얻은 혜가에게는 사법(嗣法)의 신표로서 전법의 가사, 능가경을 주고

“내 이 땅에 온 일.
법을 전해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네.
한 꽃에 다섯잎이 열려서
열매는 저절로 익으리라.“

라는 예언적 전법게를 주었다.

사전(史傳)에 의하면 서기 528년 10월 5일, 달마는 그를 시기하던 광통(光統)율사, 보리유지 삼장 등이 보낸 독에 의해서 피살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150세 때였다. 웅이산(熊耳山)에서 장사지내고 탑을 정림사(定林寺)에 세웠다. 후에 위(魏)의 송운(宋雲)이 서역에 갔다 오는 길에 총령이라는 산중에서 짚신 한짝을 들고 인도로 가는 달마를 만났다.

이를 전해 들은 효장제(孝莊帝)가 묘를 열어보니, 텅 빈 관속에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선수행자들이 즐겨 이야기하는 ‘총령중의 짚신 한짝을 든 달마’가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죽어서까지도 스승의 명을 따르고자 인도로 돌아가는 달마의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여하시조사서래의”의 공안이 있어 마땅하리만큼 달마의 뜻은 깊디 깊은 것이었다.       
출처: 불일회보 103호/ ** Y-Club(양재클럽)



출처 : 양재클럽(Y-Club)
글쓴이 : 카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