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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예불

똥하 2011. 12. 7. 17:49

절집안에 '삼사'(三事)라는 말이 있다. 수행에 기초가 되는 가장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행위 인 예불.공양.울력의 세가지를 이르는 말로서 절에서 수행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반드시 함께 해야 하는 일이다. 세 가지를 간단히 말하자면 울력은 공동노동, 공양은 하루 세 번 끼니를 잇는 일, 예불은 부처님에 대한 인사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세 가지는 수행생활을 떠받치는 세 발과 같아 무겁고 가벼움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예불이 제일 앞자리에 온다. 울력은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비일상적이고 불규칙한 활동이며 공양은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본능적이고 공리적인 행위인 반면, 예불은 하루의 시작과 끝이 거기에서 비롯되고 맺어질 뿐만 아니라 규칙적인 의지가 작용하는 신앙행위인 까닭이다. 따라서 예불은 수행생활의 첫걸음이자 밑바탕이다.

불교인과 비불교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삼귀의(三歸依)이다. 삼귀의를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불교인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설령 그가 아무리 불교에 해박하더라도 불교인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불교는 삼귀의 위에 세워진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삼귀의는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불(佛)·법(法)·승(僧), 곧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 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네를 일컬어 삼보(三寶)라 한다. 이 세 가지 보배에 귀의하는 것이 삼귀의이다. 삼귀의를 고백하는 전통적인 언어는 이런 것이었다. "지혜와 복 덕을 갖추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歸依佛 兩足尊). 모든 욕심을 떠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歸依法 離欲尊). 뭇 중생 가운데 으뜸이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歸依僧 衆中尊)." 말하자면 삼귀의는 삼보를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삼보에 던지겠다는 신앙고백인 것 이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불교의 출발점이자 어떤 의미에선 귀결점이기도 한 것이 다.

예불을 글자 그대로 풀어 '부처님에 대한 인사'라고 말했지만, 거기에는 좀더 진지하고 본 원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삼귀의를 고백하고 다짐하는 행위가 예불인 것이다. 예불을 하는 동안에 염송하는 예불문을 뜯어보면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법당에서 예불이 진행되는 동안에 참석자들은 여덟 번의 큰절을 하게 된다. 예불문을 한 구절씩 염송할 때마다 한 번의 큰절을 하는데, 예불문의 본문이 여덟 구절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여덟 구절을 내용에 따라 몫을 지워보면 네 부분으로 나뉜다. 맨 앞의 두 구절, 그 다음 한 구절, 이어지는 네 구절, 마지막 한 구절. 처음 두 구절은 불보(佛寶), 곧 부처님에 대한 예배로서 첫 구절은 위대한 길잡이요 스승인 교조 석가모니불, 둘째 구절은 과거·현 재·미래의 삼세와 온 우주에 충만한 모든 부처님께 절함을 밝힌다. 다음 한 구절은 법보 (法寶),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예배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와 온 우주에 충만한 모든 가르침에 절함을 나타낸다. 이어지는 네 구절은 승보(僧寶)에 대한 예배로서 차례로 한 구절씩 여러보살, 아라한, 가르침의 등불을 이어온 인도. 중국. 우리나라의 뛰어난 스님들에 절함을 밝힌 뒤, 끝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와 온 우주에 충만한 모든 승가에 귀의함을 표한다. 그리고 마지막 한 구절은 삼보가 보살피는 힘으로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성불 (成佛)하기를 기원한다. 결국 여덟 구절 예불문은 삼보에 대한 예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예불문은 기원을 드리는 마지막 구절을 빼곤 모두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라는 말로 시 작된다.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들어 귀의해 예배합니다"가 그 뜻이다. 귀의는 '돌아가(歸) 의지한다(依)'는 단순한 뜻만을 지닌 말이 아니다. '귀명'(歸命), 곧 '목숨 들어 돌아가 의지한 다'는 좀더 심각한 의미가 담긴 말이다.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인 목숨을 들어 귀의의 대상 과 일체를 이루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귀명' (歸命)이란 말을 '환귀본명' (還歸本命)으로 풀 기도 한다. 본원적인 생명으로 돌아감. 잠시도 머무름 없이 변화하여 일시적이며 미망으로 가득 찬 불완전한 자신을 돌이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던 근원적인 생명, 참된 자기로 돌아 가겠다는 다짐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불문의 뜻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들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네께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내 본원적인 생명과 일체이신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네께 귀의하여 예배합니다." 로 요약된다.

예불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몸으로는 절을 하고, 입으로는 예불문을 염송하 며, 마음으로는 그 뜻을 새겨 다짐하는 것이다. 요컨대 예불이란 몸과 입과 마음을 통해 불 교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인 삼보에 목숨 들어 돌아가겠다는 날마다의 간절한 신앙고백이자 자신이 바로 그 삼보와 일체인 본원생명으로 생애를 걸고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무거 운 자기선언인 것이다.

예불은 하루 세 번 이루어진다. 아침예불, 사시마지(巳時摩旨), 저녁예불. 이것을 '삼시예 불'(三時禮佛)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예불은 아침과 저녁에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시마 지 또한 예불인 것이다. '사시마지'에서 '사시'는 12간지 가운데 여섯 번째 오는 두 시간, 곧 요즈음의 9시에서 11시를 가리키고, '마지'란 불보살에게 올리는 공양, 곧 밥을 이르는 말이 다. 따라서 사시마지는 낮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 된다. 굳이 이 시간을 택하는 이유는 교조 석가모니가 하루 한 번 이 시간에 공양을 했던 때문이다.

삼시예불이라고는 해도 역시 아침과 저녁에 행해지는 것이 예불의 본령이다. 그렇다고 아 침예불과 저녁예불의 형식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아침예불이 잘 갖춰 입은 정 장이라면 저녁예불은 산뜻하고 간편한 캐주얼 차림이다. 아침 예불에는 도량석(道場釋)이 있 지만 저녁예불에는 그것이 없다. 아침예불의 쇳송은 15분쯤 길게 이어지지만 저녁 예불의 쇳송은 종을 다섯 망치 치면서 간단한 글귀를 염송하는 것으로 끝난다.

" 이 종소리 듣는 중생들 번뇌가 끊어지고

지혜는 자라나고 깨달음 생겨나며

지옥의 고통 면하고 삼계의 윤회 벗어나서

원컨대 성불하여 중생들을 건지소서

聞鐘聲 煩惱斷

智慧長 菩提生

離地獄 出三界

願成佛 度衆生."

또 아침예불에는 행선축원(行禪祝願)을 하거나 발원문을 낭독하는 순서가 있되 저녁예불에는 그런 절차가 없다. 범종을 울리는 횟수도 다르다. 아침예불때는 범종을 스물여덟 번 올리지만 저녁예불 때는 서른세 번 친다. 아침 예불 때는 큰 법당에서 제일 먼저 예불을 마친 뒤 그 밖의 다른 전각에 예불을 드리는 반면, 저녁예불에는 각 전각 의 예불을 끝낸 뒤 큰 법당에 모여 마무리 예불을 올린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이렇게 다른 것이다.

절의 하루는 예불과 함께 열린다. '인기가판사'(寅起可辦事)라 하여 전통적으로 절에서는 인시(寅時)에 일어나 하루의 일과를 준비하고 시작하는데, 그 첫 일과가 에불인 것이다. 인 시면 새벽 3시부터 5시, 따라서 아침예불은 새벽 3시부터 시작된다.

새벽예불의 첫 순서는 도량석이다. 소임을 맡은 스님이 염불소리에 맞추어 목탁을 치며 도량의 구석구석을 도는 일이 도량석이다. 도량이란 모든 불보살이 도를 이룬 곳, 또는 도를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곳을 말하니 바로 절을 뜻한다. 따라서 도량석은 그 염불소리와 목탁 소리로써 절의 대중들과 산천초목과 삼라만상을 깨우는 일이다. 더불어 도량석에는 도량을 맑게 하고 잡귀를 몰아내며 삼보를 지키는 여러 신들을 일깨워 맞이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 다.

대개 도량석을 맡는 스님은 법당의 관리와 그 안에서 진행되는 여러 의식의 집행을 담당 하는 노전(爐殿) 또는 부전(扶殿) 스님의 몫이다. 이들이 남보다 먼저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가 자명종이 세 번 울리면 도량석을 시작한다. 도량석을 하는 동안에 염송하는 염 불의 내용은 소임을 맡은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경전의 한 부분을 욀 수도 있고, 보탬이 될 만한 옛스님들의 글을 독송할 수도 있다. 다만 시간이 대략 15분 안팎이 걸리도록 그 길이를 조절한다. 보통은『천수경』(千手經)이라는 경전을 염 송한다. 길이도 적당하고 어느 예식에서나 거의 빠짐없이 외게 두는, 두루 쓰이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도량석에 쓰이는 목탁의 그것과는 크기가 사뭇 다르다. 대개 그 절에서 가장 큰 목탁이 도량석 목탁인데, 보통 목탁보다 대여섯 배 이상 크고 무겁다. 이렇게 크고 무거운 목탁을 한 손에 들고 15분 정도 움직이는 것은 상당히 힘든 노릇이다. 때문에 대개는 목탁의 손잡 이에 옥양목이나 광목을 폭대로 묶어 만든 굵은 띠를 어깨에 메고 치게 된다. 혹시 굵은 띠 에 묶여 법당 안쪽의 기둥이나 스님들이 거처하는 큰방 기둥에 걸려 있는 큰 목탁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도량석 목탁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도량석 목탁은 그 크기만큼 소리도 우람하다. 그러나 멋없이 큰 소리만 내는 것은 아니다. 목탁은 대추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친다. 단단하여 오래가고 무엇보다 소리가 좋은 것이 다. 요즈음은 목탁을 만들 때 거개가 그 속을 기계로 파내지만 제대로 된 것은 끌로 손수 파낸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된, 커다란 대추나무 목탁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우렁차되 시 끄럽지 않고, 단단하되 날카롭지 않으며, 맑되 가볍지 않고, 부드럽되 둔탁하지 않다. 도량석 을 하면 이런 소리에 천지만물이 귀를 열고 일어나 잠깨는 것이다.

예불의 다음 순서는 종송(鐘頌)이라고도 하는 쇳송이다. 쇳송은 큰방 툇마루 앞이나 법당 한구석에 걸린 작은 종이나 반자(飯子), 또는 금고(金鼓)를 치면서 장엄염불(莊嚴念佛)을 외 는 일이다. 금고나 반자는 얇은 쇠로 북처럼 둥글고 속이 비게 만들어 그 거죽을 쳐 소리를 내는 법구(法具)의 하나다. 한 면이 트인 것을 반자, 그렇지 않은 것을 금고라고 하는데, 요 즈음은 이들을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고 거의 종을 치면서 쇳송을 한다. 장엄염불은 극락세 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아미타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며 불보살과 부모 등이 나에게 끼 친 은혜를 명심하여 잊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쇳송 또한 대략 15분 정도 계속된다.

쇳송의 중심은 종소리보다 염불에 있다. 스님들의 염불솜씨는 타고난 목소리에 따라 천차 만별이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이의 기량에 따라 장엄염불 소리 또한 천변만화한다. '초성 좋 은' 스님의 쇳송은 때로는 강물 위에 떨어지는 함박눈처럼 잦아들다가 여름 아침의 강안개 처럼 부드럽게 풀리기도 하고 때로는 오월 하늘을 떠가는 구름처럼 유유히 흐르다가 숲속에 내리는 가을비처럼 촉촉하고 차분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염불은 담담 한 소리이다. 높고 낮고 길고 짧고 하는 변화는 있지만 그 안에 굴곡없는 한줄기 흐름이 있 는 무욕의 소리, 무심의 소리다. 어쩌다 이런 쇳송을 귀동냥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법 열(法悅)이다.

범종. 법고. 목어. 운판, 이른바 사중사물(寺中四物) 혹은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 불리는 이 네가지를 울리는 것이 쇳송에 이어지는 예불의 절차다. 이들 네 가지 법구는 한 곳에 설 치된다. 범종각(梵鐘閣) 또는 범종루(梵鐘樓)이다. 그곳이 단층집이면 범종각, 2층의 다락집 이면 범종루라 부른다. 먼저 법고를 울리고 나면 그것을 받아서 운판과 목어를 차례로 짧게 두드리고, 그 뒤를 이어서 범종을 친다.

법고(法鼓)는 절에서 사용하는 큰 북이다.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 그 말에 담겨 있 다. 법,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여 중생들, 다시 말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번뇌 를 물리치고 해탈을 이루게 한다는 의미를 법고는 함축하고 있다.

법고는 자연사한 소의 가죽으로 만든다고 율장(律藏)에 기록되어 있다. 자비를 내세우는 절집에서 산 생명을 함부로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암소와 수소의 가죽으로 한 쪽씩을 댄다고 한다. 음과 양의 조화를 위해서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소리, 화합의 소리, 조화의 소리를 낸다는 상징적 의미를 위해서다. 법고는 그 소리를 듣고 땅 위에 사는 짐승 들이 해탈하기를 염원하면서 친다고 한다. 그런 짐승의 하나인 소의 가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커다란 법고를 치는 일은 보기와는 달리 힘든 일이다. 10분 남짓 울리는 동안 혼자서는 힘에 부쳐 번갈아 치기도 한다. 때문에 법고를 치는 일은 대개 젊은 스님들의 몫이다. 그래서 법고의 울림은 씩씩하고 힘차다. 굵은 저음의 소리가 아래로 깔리면서 멀리 퍼져간다.

가을날 저녁에 듣는 법고소리가 좋다. 날씨나 계절에 따라 소리에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습기가 많은 여름날의 법고소리는 무겁게 처진다. 겨울의 그 소리는 갈라지기 쉽고 봄날의 울림은 자칫 들뜨기 예사이다. 낮 동안 알맞게 팽창했다가 가벼운 습기가 도는 가을날 저녁 의 북소리가 그래서 좋은 것이다.

운판(雲版)은 그 이름 그대로 뭉실뭉실 피어나는 구름 모양으로 만든 쇠판이다. 그 겉을 북채 모양의 가는 막대로 쳐서 소리를 낸다. 치는 시간이 채1분이 되지 않고 소리 또한 별 다른 감흥이나 특징이 없어 실용성보다는 상징성이 강하다. 구름이 하늘에 떠 있으므로 허 공을 나는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해탈을 바라면서 울린다는 것이다.

목어(木魚)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법구이다. 배에 해당하는 부분을 파내고 그 안쪽 의 좌우를 나무 막대로 두두려 소리를 낸다. 목탁의 원형도 목어다. 목탁의 손잡이는 물고기 의 꼬리, 가운데로 길게 갈라진 틈은 입, 그 끝에 뚫린 양 옆의 동그란 구멍은 두 눈이 변해 서 된 것이다. 그래서 목탁을 목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 어느 큰스님 아래서 여러 제자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만 유독 긋으름을 피우고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함부로 했다. 그러다가 그만 몹쓸병으로 일찍 죽고 말았다. 어느 날 그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난 물고기가 슬픈 표정으로 뱃머리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살펴보니 바로 어리석음을 일삼다가 일찍 죽은 제자가 물고기의 몸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제자의 부탁에 따 라 등 위의 나무를 잘라 물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절 안에 걸어두고 그 모양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행자들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중국에서 유래된 목어에 얽힌 전설이다. 이렇게 모든 수행자가 열심히 수행에 임하라는 경계가 목어에 담겨 있지만, 특히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만큼 그 소리를 듣고 물속의 모 든 생명들이 해탈하기를 기원하면서 목어를 친다고 한다. 또 물고기는 자는 때에도 눈을 뜨고 있으므로 그를 본받아 잠을 쫓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으로 울린다고도 한다.

범종은 절에서 쓰는 종을 말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범종각에 걸린 큰 종을 가리킨다. 아침 예불 때 28번 종을 울리는 것은 욕계(欲界)의 6천(天), 색계(色界)의 18천, 무색계(無色界)의 4천, 합하여 28천의 하늘나라 중생들이 들으라는 것이고, 저녁예불 때 서른세 번 치는 것은 서른세번째의 하늘, 33천의 천상세계에 까지 그 소리가 들리라는 뜻이다.

종과 종소리에 담긴 뜻을 에밀레종, 곧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종명(鐘銘)은 이렇게 풀고 있다.

무릇 지극히 완전한 진리는 형상 밖의 만물에도 두루 미치므로 보려 해도 능히 그 근원을 볼 수 없으며, 참된 진리의 위대한 소리는 천지간에 울리므로 들으려해도 들을 수 없는 것 이다. 이런 까닭에 방편으로 가설을 세워 세 가지 진리의 길을 통해 오묘한 이치를 보게 하 고 신종(神鍾)을 내어 달아 온 진리를 포함한 둥근 소리, 일승원음(一乘圓音)을 깨닫게 한 다.……(종은) 안이 비어 있어 능히 울리되 그 소리에 다함이 없고, 무거워 가볍게 움직일 수 없어 그 몸체를 들어 올릴 수도 없으니 모양은 마치 묏부리처럼 우뚝하고 소리는 흡사 용의 울음과 같아서, 위로는 산마루 하늘까지 사무쳐 울려퍼지고 아래로는 지옥을 지 난 깊은 곳까지 또렷이 잠긴다.

범종은 덩치가 크지만 그 소리는 미묘하고 민감하다. 같은 범종이라도 치는 사람에 따라 그 소리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그 종에 익숙한, 노련한 귀를 가진 스님이라야 종이 가진 소리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다. 범종소리에는 정확히 계절과 날씨와 치는 사람의 감정이 담겨있다. 그만큼 미묘하고 민감하게 변화한다. 겨울에는 특히 조심스럽다. 얼어 있기 때문이 다. 이때 단번에 크게 울리면 종이 깨어지기 쉽다. 때문에 겨울에 종을 칠 때는 처음에는 살 살 달래듯 가볍게 치다가 차츰 소리를 높여 제 소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범종소리는 적당한 습기가 있을 때라야 울림이 좋고 멀리 퍼진다. 한 줄기 소나기가 걷힌 여름날 저녁,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스님이 치는 범종이라면 단 하나의 소리로 연주하는 장엄한 음악을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