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부처님의 일대기

똥하 2010. 4. 15. 17:39

부처님 일대기(一代記)

부처님의 존명은 석가모니<Sakyamuni,(釋迦)로 BC 623년에서 ~BC 544까지 약 80년간을 사바세계에 계시면서 당신께서 증득하신 무상각(無上覺)으로 무명(無明) 중생을 구제하고자 불교를 여신 시방의 스승이시다.

  

석가모니(釋迦牟尼)·석가문(釋迦文) 등으로도 음사하며, 능인적묵(能仁寂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보통 석존(釋尊)·부처님이라고도 존칭한다. 석가(Sakya)는 민족의 명칭이고 모니(muni)는 성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 함은 석가족(族) 출신의 성자라는 뜻이다.

  

본래의 성은 고타마(Gotama:瞿曇),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悉達多)인데, 후에 깨달음을 얻어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되었다. 또 달리 진리의 체현자(體現者)라는 의미에서 여래(如來:Tathagata), 존칭으로서의 세존(世尊:Bhagavat)·석존(釋尊) 등으로도 불린다. 부처(붇다 : Buddha)의 뜻은 깨달은 각자(覺者)이다.


이는 지혜로서 시방의 제실상의 일체를 있는 그대로 보아,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고, 끊어야 할 것을 모두 끊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 일체승자(一切勝者) 일체지자(一切知者) 일체능자(一切能者)라는 뜻도 있다.

  

부처님의 의미를 해석하여 여래(如來)라는 총명(總名) 외에 경전에 따라서는 60가지, 108가지, 270가지의 부처님 칭호가 있다. 대체적으로 상용의 여래십호(如來十號)를 통하여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 여래십호(如來十號)


(1) 응공(應供) : 응당히 남의 공양을 받아 공덕을 나누어 줄수 있는 도를 이루신 자격이 있는 분. 아라한(阿羅漢)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2) 정변지(正遍知) : 사성제(四聖諦)를 비롯한 일체법(一切法)을 모두 알아 바르게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분. 정등각(正等覺) 등정각(等正覺)이라고도 번역한다.

(3) 명행족(明行足) : 천안, 숙명. 누진 삼명(三明)의 지혜와 신체 행동 등의 일체가 원만하신 분.

(4) 선서(善逝) : 미혹의 세계를 뛰어 넘어 온갖 삼매와 대지혜에 들어 다시는 생사고해에 돌아오지 않는 분.

(5) 세간해(世間解) : 세간 출세간의 일체사를 다 아시는 분.

(6) 대의왕(大醫王) : 병에 따라 신묘한 신묘한 약을 처방해 낫게 하는 명의와 같이 마음의 법을 자유자재로 설하는 분.

(7) 무상사(無上士) : 모든 이 가운데 더 위없이 가장 높은 분.

(8) 조어장부(調御丈夫) : 온갖 가르침으로 일체중생을 조복제어하여 열반에 들게 하시는 분.

(9) 천인사(天人師) : 하늘과 중생일체와 인간의 스승이신 분.

(10) 불(佛) : 불타(佛陀)의 약칭으로, 깨달은 분.

(11) 세존(世尊) : 온갖 공덕을 갖추어 세간을 이익 되게 하므로 세간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분.


※ 부처님 일대기(팔상도)


부처님의 일대생 중 큰 여덟 사건을 간추려 정리한 것을 팔상록이라 하고 팔폭의 그림으로 나타내면 팔상도(八相圖)라 한다. 


○ 제 1 강도솔상(降兜率相) : 도솔천상에서 강림하시는 모습


모든 부처님들께서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코자 내려 오시기전 머물러 하생의 때를 성숙시키시는 바, 부처님께서도 도솔천에서 천인들을 교화하시다 때가 이름에 백상(白象)을 타시고 사바세계로 강림하시었다. 이때 악마가 자취를 감추고 일월성진의 빛이 무색할 정도로 오색서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 제 2 탁태상(託胎相) : 모태에 잉태하시는 모습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카필라성(Kapilavastu:迦毘羅城)을 중심으로 하여 샤키야족(釋迦族)이 이룬 작은 나라가 있었다. 하나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Suddhodana:淨飯王)와 마야(Maya:摩耶)왕비는 나이가 들도록 자녀의 탄생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야왕비께서 흰 코끼리가 오른 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시었다.


○ 제 3 출태상(出胎相) : 출생하시는 모습


태몽을 꾸신 후 곧 바로 태기가 있었다. 태기가 있은 후 출산 일이 가까워 옴에 당시의 풍속대로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하여 그해 4월 8일날 코올리성으로 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룸비니(Lumbini) 동산을 지나시게 되었는데 무우수(無憂樹) 나무아래서 잠시쉬면서 그 나뭇가지를 잡으려 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탄생하시었다. 탄생의 순간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난 후, 한 손은 하늘방향으로 한 손을 땅방향으로 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탄생하시었을 때, 히말라야산에서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와 당시 왕자의 상호(相好)를 보고, 집에 있어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전세계를 통일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며, 만약 출가를 하게되면 반드시 불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생후 7일째에 어머니 마야왕비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이모 마하파제파티에게서 자라게 되시었다. 성장하면서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익히며 성장하였다. 왕자로서의 생활은 당연히 부족함이 없는 매우 풍족한 생활이었다.


○ 제 4 출가상(出家相) : 도를 닦기 위하여 출가하시는 모습 


16세가 되어선 당시의 풍습을 따라 선각왕의 딸 야쇼다라(耶輸陀羅)를 맞이하여 결혼하시었다. 그리고 곧 아들 라훌라(羅羅)를 얻게 되었다. 하나 그때 성문의 나들이에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 모습과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과 사문(沙門)을 목격한 이른바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불리는 사건을 접하신 후 출가를 결심하였다. 나날을 출가의 결심으로 보내다 급기야 29세시에는 고(苦)의 본질 추구와 해탈(解脫)의 무상진리를 추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부귀한 지위들을 모두 버리고 백마를 타고 출가하시게 되었다.


○ 제 5 항마상(降魔相) : 악마들의 유혹을 이기시는 모습


출가하여 남방으로 내려가 갠지스강(江)을 건너 비야리마가다국(國)의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알라라칼라마’선인에게서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선정을 배워 통달하고 무상의 깨침이 아님을 아시고 다시 길을 나서, ‘우다카라마푸타라’라는 선인으로부터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이라는 선정(禪定)을 배워 통달했으나 이 역시 무상의 깨침이 아님을 아시고 고행에 들어가시었다.


29세에 출가하여 35세가 되도록 6년간 당시 출가자의 수행풍습이었던 고행(苦行)에 전념하여 신체가 해골처럼 야이도록 진력하였으나 해탈을 이룰 수 없었다. 고행으로 도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달으시고 함께 고행을 하던 도반들로부터 떠나 부다가야 부근의 산림으로 들어가 허기진 육신을 추슬러 선정을 수행하고자 걸식에 나서려던 중 수자타 여인이 바치는 죽 공양을 받으시고 난 후, 보리수(菩提樹:Bodhi-tree) 아래 자리 정하여 새로이 선정수행에 드시었다.


이때 미혹한 악마(마구니)들이 자신들의 세계가 적어짐을 불만스럽게 여겨, 악마가 부릴 수 있는 유혹과 공포로 시험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조금도 이들의 시험에 흔들림이 없이 제도하여 이겨 나가셨다.


○ 제 6 성도상(成道相) : 도를 이루시는 모습


보리수 아래서 일체의 번뇌와 시험하는 마구니의 마장을 물리쳐 이기어 선정을 계속하던 중, 여명이 드리운 하늘에 떠 있는 샛별을 보고 무상의 깨달음을 여시어 무상도(無上道)를 증득하시었다. 35세 되시는 12월 8일이었다.


○ 제 7 초전법륜상(初轉法輪相) : 최초 설법을 하시는 모습


석가모니부처님은 성도 후 삼칠일간을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의 법열에 잠겨 있을 시 범천을 비롯한 시방의 제천이 찬탄하며 법을 청하자 이에 무언의 설법을 하시며 머물러 계시었다.


이후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베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시어서는, 일찍이 고행을 같이 하였던 5명의 수행자에게 고락의 양극단을 떠난 중정(中政)의 도(道) 즉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에 관하여 설하였다. 그들은 모두 법을 알아들어 제자가 되었다.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초전법륜으로 최초의 불교 교단(samgha:僧伽)이 성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부처님의 교화를 통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석가모니부처님은 적극적으로 설법을 계속하여, 제자의 수도 점점 증가하였다. 그리고 각지에 교단이 조직되어져 갔다.


○ 제 8 입멸상(入滅相) : 열반에 드시는 모습


혹서의 중부 인도(印度) 각지를 45년간의 긴 세월동안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부처님은 드디어 80세의 고령에 이르시었다. 그때 여러 차례의 중병이 들었을 때에도 교화(敎化)여행을 계속하였다. 하루 열반을 결심하시고 유법(遺法)을 설하시었다.


"나를 등불로 삼지 말고 너 자신과 법을 등불로 삼고 나를 귀의의 섬으로 삼지 말고 너 자신과 법을 귀의의 섬으로 삼아라{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자귀의법귀의(自歸依法歸依)}. 그리고 멀리 숲속에서 두타행을 하고 있던 가섭이 뒤늦게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도착한 가섭에게 행시(行示)로 곽시쌍족(槨示雙足)의 최후법을 설하시고 열반입법에 드시었으니 그날이 음력2월 1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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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취지에서 세존(世尊:또는 釋尊)으로도 불리는 등 많은 호칭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를 뜻하며,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제자로서 다수의 붓다를 상정하여 소위 '부처'로 통용된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Gotama:산스크리트로는 Gautama)는 석가모니의 성이다. 일부의 경전에서는 BC 1~AD 2세기 무렵 서북인도에 침입하여 인도에서 널리 사용된 사카력(曆)을 만들어낸 사카(Saka)족도 석가로 쓰는 예가 있으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항에서는 전설화된 석가모니의 생애를 가능한 한 역사상의 실재인물로 묘사하고, 그가 거의 신적으로 초인화된 인물로 신앙을 갖게 되기까지의 배경과 경과도 취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사상, 즉 가르침에 대해서는 '불교' 항목이나 개별적인 교리 항목으로 넘기고 세부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의 가르침으로 취급할 수 있는 개별항목은 '무상·무아·법·사성제·삼법인·연기·열반·자비·중도·팔정도' 등이다.




- 시대적 배경


BC 1500년경 서북인도의 펀자브 지방에 침입한 아리안족은 서서히 동남으로 이주하여 갠지스 강 상류에 정착했고, BC 9세기 무렵까지 베다 문화를 형성했다. 이후 다시 동쪽의 중류 지방으로 이주하여 원주민과의 혼혈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사회의 구성과 문화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브라만교의 전통적인 습속이나 의례를 지키는 기풍이 약화되고 새로운 사고가 양성되어 BC 6세기 무렵에는 새 계급이 출현했다. 비옥한 갠지스 강 유역에서 산출되는 농산물 등의 물자가 풍부해짐에 따라 점차 상공업이 성행하게 되어 다수의 소도시가 성립하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종래의 부족적 계급제도를 무너뜨렸고, 이와 동시에 소도시를 중심으로 점차 군소국가가 구성되어 귀족정치나 공화제적 정치가 실행되었으며, 이런 국가들은 이윽고 국왕이 통치하는 대국으로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시의 발전은 화폐의 유통을 성행하게 했으며, 상공업자들은 각기 조합을 구성하여 도시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적 지위의 향상과 더불어 종래의 고정적 사상이나 종교에 만족할 수 없었던 토착부족이나 혼혈화된 새로운 부족의 지위도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사상을 품은 사람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갠지스 강 중류의 마가다와 코살라라는 두 대국을 중심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들 혁신적인 자유사상가들은 사문(沙門:노력하는 사람)이라 불렸다. 이들은 보통 6사외도(六師外道)로 분류되는데, 그중에도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푸타, 유물론자인 아지타, 회의론자 또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인 산자야, 도덕부정론자인 푸라나, 결정론자인 마칼리 등이 특히 잘 알려져 있었다.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도 그런 사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 탄생


석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네팔과 인도의 국경 부근에 있는 한 지방인데, 현재의 지명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의 북방이다. 북으로는 히말라야 산맥, 남으로는 갠지스 강으로 유입하는 많은 지류가 있어서 풍부한 물을 이용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국이었으며, 일종의 공화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다만 남쪽의 대국인 코살라국에 인접한 탓으로 주권은 코살라국에 종속되었지만, 자치권은 인정되고 있었다. 그런 석가족의 우두머리인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석가모니의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마야(Maya)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정반왕이라는 호칭에서 나타나듯이 석가족 집단의 우두머리는 라자(raja:왕)라고 불렸지만, 이는 통치자를 의미하는 군주의 칭호가 아니라 단순히 행정상의 수장(首長)이라는 직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BC 6세기 혹은 BC 5세기에 석가족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약 100년의 시차로 견해가 갈리는 많은 이설(異說)이 있고, 특히 남방의 불교도는 BC 624년에 태어난 것으로 믿고 있다. 석가모니의 탄생은 태몽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석가모니를 낳기 전 아름답고 은처럼 하얀 코끼리가 그녀의 옆구리를 통해서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출산일이 다가오자 왕비와 수행원은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데바다하에 있는 친정으로 가던 중에 두 도시의 주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던 룸비니(Lumbini)라는 동산에서 석가모니를 낳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부인이 살라나무에 오른쪽 팔을 올려 가지를 붙잡았을 때, 그 오른쪽 옆구리로부터 석가모니가 탄생했다고 한다. 석가족의 토템인 살라나무 숲은 룸비니라는 지모신(地母神)을 받드는 곳이었으므로 출산의 장소로는 적격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는 것은 왕족 계급인 크샤트리아가 신의 양팔로부터 발생했다는 〈리그베다 Rigveda〉 이래의 전승과 관련되어, 석가모니가 크샤트리아 계급의 출신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적 위인은 보통의 방식으로는 태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또 인도에서는 오른쪽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설이 성립했다고도 볼 수 있다. 탄생 장소는 현재 룸민데이라 불리며 네팔의 영토에 속한다. BC 3세기의 유명한 아소카 왕이 그 탄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석주가 후대에 그곳에서 발견되어 석가모니의 출생지임이 확인되었다. 생후 7일째에 어머니 마야 부인은 산후의 상태가 악화되었던 탓인지 사망했고, 석가모니는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에 의해 양육되었다. 생후 5일째 또는 7일째의 명명식에서 싯다르타(Siddhartha)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트로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므로 아마도 후대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의 성(姓)인 고타마는 '가장 탁월한 수소'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부족사회에 있었던 동물숭배, 특히 인도에서의 뿌리 깊은 소에 대한 숭배 관념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의 탄생에 관한 또 하나의 유명한 전설은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의 예언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날의 별자리에 따라 길흉을 점치는 것은 당시의 풍습이었으므로 정반왕도 이 방면의 대가들을 불렀다. 아시타는 이 아이는 위대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든가 아니면 부처(覺者)가 되어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자신은 이미 늙었으므로 성장한 후의 그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탄생 전설은 석가족의 관심이나 의례를 고대 인도 당시의 표현형식으로 전하고 있는 점이 많고, 경전 역시 마찬가지로 고유한 표현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그 하나하나를 해명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석가모니의 탄생일에 관해서는 2월 8일, 베사카 달의 후반 8일 혹은 후반 15일 등 여러 전설이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를 취급한 것으로서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4월 8일이라 하는데, 이는 번역자가 인도의 베사카 달이 음력 4월에 상당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음력 4월 8일을 탄생일로 믿고 있으나, 남방의 불교도는 베사카 달의 보름날에 탄생·성도·열반이 있었다는 전승에 근거하여 '베사카 제(祭)'를 성대히 시행하고 있다(스리랑카에서는 '웨삭제'라고 함).



- 젊은시절


브라만교의 문화는 이미 쇠퇴해가는 경향이 있었으나, 갠지스 강의 중류지역은 둘째 계급인 왕족과 셋째 계급인 서민들 사이의 신흥계급이 실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 군소국가들이 서로 할거하면서 세력을 다투고, 비정통파의 사상가들도 많이 출현하여 논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국가를 통일하길 바라는 한편, 사상의 혼란에 대해서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석가모니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가모니가 속하는 나라는 예속적인 국가였으며, 그 세력을 미루어 보더라도 국가를 통일할 만큼의 힘도 없었다. 그는 사색에 잠기길 좋아하는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소극적이었으므로, 정반왕은 그 성격을 밝게 하고자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증지부 增支部 Anguttara nikaya〉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 자신이 뒷날 그의 양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몹시 세심하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심하게 양육되었다. 내 아버지의거처에는 연꽃이 덮인 못들이 있었다. 하나는 푸른 연꽃의 못이고, 또 하나는 붉은 연꽃의 못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연꽃의 못이었는데 이것들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카시에서 산출된 최상품의 천으로 내 두건을 만들었고, 카시산(産)으로 내 상의와 속옷과 외투를……나에게는 3개의 궁전이 있었다. 겨울에 지낼 곳과 여름에 지낼 곳과 우기(雨期)에 지낼 곳이었다. 비구들이여, 비가 내리는 4개월 동안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오직 악사들에 둘러싸여 즐기면서 궁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반왕은 문무에 걸쳐 특출난 능력을 보였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그런 경향을 지니지 않았다. 왕은 그를 결혼시키기로 생각하고 야쇼다라(Yaodhara)를 그의 배필로 맞게 했다. 석가모니의 청년시대를 말하는 전기는 상당히 늦게 성립된 것이어서 그 진위를 판별하기란 매우 곤란하다. 경전에는 사촌동생인 데바닷타 등과 무예를 겨루고서 승자가 되어 아내를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2가지 혼인방식이 묘사되어 있다. 승자가 됨으로써 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과 많은 여성들 속에서 아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는 인도의 서사시에도 자주 등장하므로 오히려 당시의 풍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서사시적으로 각색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도 생각된다. 왕인 아버지는 호사와 안락을 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를 만족시키려고 전력을 다했어도 젊은 왕자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었고, 다른 관심사에 몰두했다. 석가모니는 나중에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스스로 늙어가는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 없는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노쇠함을 보고는 골똘히 생각하여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한다. 나 역시 늙어가며 늙음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이 바로 늙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늙음을 피할 수 없는데도,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하는 것이리라. 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청년이면서도 청년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병들 것이며 병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건강하면서도 건강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나 역시 죽을 것이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내가 이렇게 관찰했을 때, 나는 생존해 있으면서도 생존의 의기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관심사는 다음에 소개할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전설과 직결된다. 싯다르타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곤란에 봉착하여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큰 희생을 치러야 할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 라훌라(Rahula)가 태어나자 그는 "라후(障害·惡鬼)가 생겼다. 속박이 생겼다"라고 말한 데서 '라훌라'라고 이름 지었다고 경전에 나타나 있다. 이무렵의 일로 유명한 것이 사문유관의 전설이다. 어느 날 마부와 함께 동문을 거쳐 외출했을 때, 싯다르타 왕자는 허리가 굽고, 막대기에 의지하면서 걸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백발의 노인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왕자에게 마부는, 그는 늙었으며 모든 사람은 오래 살면 노인이 된다고 했다. 그는 되돌아가서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념은 다른 문으로 나섰을 때 목격한 광경에 의해서도 계속된다. 어느 날 남문을 거쳐 다시 외출했을 때는 심한 병으로 쓰러져서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허위적거리고 있는 병자를 어떤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것을 보았으며, 마부로부터 이는 병든 사람이며 모든 사람들은 병들기 쉽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서문으로 나섰을 때는 장례식의 행렬과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북문을 거쳐 나섰을 때는 한 사문이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평화롭고 침착한 태도에 감명받은 왕자는 고통 속에서도 그토록 평정함을 견지할 수 있는 연유를 깨닫기 위해 결국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동서남북에 늙음·병·죽음·출가를 배치한 것은 시적 묘사에 지나지 않고, 세속의 삶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대비하여 출가의 동기를 교묘하게 묘사해낸 것이다. 충분히 성장한 나이에 이른 그가 노인과 병자와 장례식 혹은 시신을 보지 못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이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자면 심리학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현상이라도 그것은 어느 날 예기치 않게 복합적인 상황으로 인해 사람에게 심리적 위기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전설에서 늙음·병·죽음은 대체로 인간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인간이 직면하는 공통적인 고통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연민에서 그는 출가하여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비록 사실이 아니라 후대에 성립된 전설이긴 하지만, 석가모니가 인생의 고뇌를 어떻게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출가로 유도하려는 암시를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석가모니의 젊은시절에 대한 전설은 그가 원래부터 사색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지만, 당시의 약육강식이라는 국가간의 다툼을 보고 석가족의 운명을 생각할 때, 젊은 싯다르타 왕자로서는 아무래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나라는 코살라국에 의해 공략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가 출가한 뒤에는 마침내 코살라국에 병합되었다. 자신의 나라를 둘러싼 불길한 분위기를 석가모니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 상극의 와중에서 비록 향락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지라도 심증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혜택을 누리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정을 버리고 출가 생활을 지향하는 의지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 출가 수행


본래 사색적인 성격인데다가 석가족이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점이 그의 출가에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여기에 아들 라훌라의 탄생은 출가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더이상 지체했다가는 가정의 속박으로 인해 출가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당연히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가란 사문이 되는 것이므로, 그가 출가했다는 것은 브라만에 대항하는 신흥사상가들의 길을 걷고자 한 것이다. 사문은 일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항상 편력하면서 숲에서 수행하고, 마을로 가서는 법을 설했다. 석가모니는 "나는 29세에 선(善)을 구하여 출가했다"고 술회했다 하여, 일반적으로 이것이 인정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그가 출가하는 정경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자마자 그는 마부이며 시종인 찬나에게 그의 백마 칸타카에 안장을 얹게 하고는 침실로 가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 올 것을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나 찬나가 이끄는 말을 타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날 밤으로 그는 시종 찬나와 함께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새벽녘에는 아노마 강을 건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모든 장신구들을 찬나에게 주고, 찬나와 칸타카를 아버지에게 되돌려보내 출가의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지나가는 사냥꾼과 옷을 바꿔입어 고행자의 모습처럼 보이게 했다.


석가모니의 전기는 그가 본격적인 수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빔비사라 왕을 만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빔비사라 왕은 그가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교제를 하게 된 인물인데, 여기서 그와의 만남을 전제해 둔 것은 전기작가의 문학적인 복선일지 모른다. 어쨌든 고행자가 된 싯다르타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곳은 영적인 고행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그리고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에 도착했다. 라자그리하는 왕사성(王舍城)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는 지명이며 현재의 라지기르에 상당하는 곳이다. 낯선 고행자의 잘생긴 외모와 침착한 인품에 감명받은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는 언덕 기슭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갔다. 왕은 그 고행자가 예전에 왕자였음을 알아낸 후 그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했고, 자신의 왕국을 분배하여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싯다르타는 왕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자 포기했던 그 모든 것들이 다시는 아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빔비사라는 그에게 깨달음을 성취하면 다시 라자그리하를 방문해주기를 요청했으며, 싯다르타는 이에 동의했다. 싯다르타가 가르침을 구하러 나서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선인이었는데, 그는 명상에 전념하는 수행자였다. 싯다르타는 얼마 가지 않아 그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여 그로부터 대등한 취급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지식이고 오로지 말로 통하는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영원한 평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곁을 떠나게 된다. 다음에는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의 곁으로 갔다. 그에게서는 이전보다 더 높은 신비적 경지를 배웠으나, 싯다르타는 이것에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여 그의 곁을 떠났다. 경전에서는 알라라 선인이 추구했던 경지를 무소유처(無所有處)라 하고, 우다카 선인의 그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한다. 이것은 초기의 불교사상에서 명상 수행의 정신적 경지를 단계적으로 표시하는 4무색정(四無色定)에 포함되는 것인데, 당시의 명상 수행자들은 여기에 역점을 두어 선정을 닦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중에서도 "잘 정신차려 무소유를 기대하면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함으로써 번뇌의 흐름을 건너라"(〈수타니파타 Suttanipata〉, 1069)고 하여 무소유처의 명상을 가르치고, 비상비비상처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자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 자도 아니며, 생각이 없는 자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자도 아니다. 이렇게 행하는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무릇 세계가 확대되는 의식은 생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수타니파타〉, 874)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최초의 불교 사상이 발전해가는 과정이 발견된다. 아집을 버리는 무소유의 경지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서, 또는 허무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도 있었던 탓인지, 이것도 타파했음이 석가모니의 전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라고 불리는 그들에게 만족하지 않은 석가모니는 고행주의자를 찾아 편력한다. 알라라·우다카의 곁을 떠난 석가모니는 마침내 힌두교의 성지인 가야에 도착한다. 네란자라 강 근처에 있는 우루벳라는 마을 부근의 숲에는 많은 고행자들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수정주의로부터 고행주의로 향하는 하나의 전환을 시도했던 것이다. 경전은 이런 수행의 시기에 대한 석가모니 자신의 많은 회상을 싣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전기(轉機)가 된 하나의 큰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석가모니를 단적으로 묘사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간다라의 고행상(2~4세기)이지만, 경전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금욕주의).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모든 수족은 마치 울퉁불퉁한 뼈마디들로 되어 있는 쇠약해진 곤충처럼 되었고, 내 엉덩이는 마치 물소 발굽과 같았고, 내 등뼈는 공을 1줄로 꿴 듯이 불거졌고, 내 늑골은 무너진 헛간의 서까래 같았고, 내 두 눈의 동공은 마치 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물이 반짝이는 양 눈구멍 속에 깊이 가라앉은 듯했고, 내 머릿가죽은 마치 덜 익은 채 잘려 쓰디쓴 조롱박이 태양과 바람에 의해 쭈그러지고 오그라든 것처럼 되어버렸고…… 내 뱃가죽은 등뼈까지 붙게 되었다. 내가 대소변 등 생리적 요구로 움직이고자 할 때는 즉시 그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으며, 내 사지를 손으로 어루만지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이같이 수행하는 석가모니가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수타니파타〉425~449). 고행으로 명상하고 있는 석가모니의 곁으로 악마 나무치가 다가와 이런 식으로 유혹한다. "그대는 이제 곧 죽을 그러한 얼굴을 하고 있다. 베다를 학습하는 자로서의 청정한 행동을 하고 성화(聖火)에 공물을 바쳐야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러한 고행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나로서는 세간의 선행을 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신앙이 있고, 노력이 있고, 또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전념하는 나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생명의 보전을 묻는가?"라고 답하여 그 결의를 피력했다. 악마와의 문답은 많지만, 여기서는 전통적인 바라문 우위의 관습에 대해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여 그것들을 초극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석가모니를 볼 수 있다. 다른 악마와의 문답에서도 석가모니 자신 속에 있는 정신적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부터 전래된 사상이나 번뇌와의 대결 등이 뒤섞여 있는 갈등이다. 거기서는 탐욕, 배고픔과 목마름, 쾌락 등 여성명사로 표현되는 악마도 보이며, 고행에 대한 석가모니의 고뇌도 묘사된다. 이런 악마의 유혹은 그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절정에 달한다. 악마는 석가모니 자신의 마음에 있는 또다른 일면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혹에 직면할 때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대결하여야 비로소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석가모니는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도의 고행 생활이 6년간 계속되었다고 말하지만, 더 오랜 기록에서는 7년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고난의 수행은 6년 또는 7년 동안 계속되었다. '깨달음' 6년 혹은 7년에 걸친 고행이 결국 목적을 달성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극도로 여윈 몸으로는 안락을 얻기 어렵다. 이제 나는 실질적인 음식인 우유죽을 섭취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함께 수행해 온 5명의 동료는 그가 우유죽을 먹는 것을 보고서 혐오하여, 그는 탐내고 노력하길 포기했다고 말하며 떠나 버렸다.


이 사건은 우루벳라의 세나니라는 마을에 사는 처녀 수자타(Sujata)가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나무의 신이 나타났다고 믿고서 석가모니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던 것이라고 예로부터 전해져 있다. 그러나 격렬한 고행으로 쇠약해져 있던 석가모니에게 이 우유죽은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체험은 나중에 그의 교리에서 중도(中道)로 반영된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중에 보드가야라고 불린 장소에서 명상에 잠겨, 드디어 "아사타 나무 아래서 깨달음(보리)을 열었다"라고 표현되는 성도(成道)의 날이 도래했다. 경전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악마를 등장시켜 그의 가장 위대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욕망 세계의 지배자요 유혹자인 악마 마라는 그를 굴복시켜 깨달음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지닌 큰 무리를 이끌고 석가모니에게 접근하여 갖은 방법으로 방해했지만, 석가모니는 전혀 동요됨이 없이 명상에 잠겨 있을 뿐이어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정진에 관한 가르침'인 〈파다나수타 Padhanasutta〉에 의하면, 마라는 그에게 접근하여 "당신은 야위었고 창백하며 거의 죽을 것 같다. 살아라, 그대여, 삶은 더 좋은 것이다. 가치있는 행위를 하라! 그러한 분투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유혹한다. 이에 대해 석가모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욕망은 첫째, 너의 군대, 둘째, 고결한 삶에 대한 혐오, 셋째, 굶주림과 목마름, 넷째, 갈망, 다섯째, 무감각과 게으름, 여섯째, 겁많음, 일곱째, 의심, 여덟째, 위선과 냉혹함, 아홉째, 칭찬과 명예와 그릇된 영화, 열째,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이다. 마라여, 이들이 너의 대군들이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그들을 이겨낼 수 없으나 오직 그들을 정복함으로써만 사람은 최상의 기쁨을 얻는다. 나는 네게 도전하노니, 만약 패배한다면 내 삶을 비난하라! 싸움에서 죽는 것이 패하여 사는 것보다 더 나으리라……." 결국 마라는 낙담하고 사라졌다. 이 싸움은 신화화된 선과 악의 투쟁, 즉 내적인 갈등이었다. 이 갈등의 극복으로 그는 정각(正覺)을 얻어 비로소 부처가 되었던 것이다. 아사타 나무가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 남방불교에서는 이 날을 베사카 달의 보름날이라 하는데, 태양력으로는 5월경이 된다. 중국에서 번역된 경전에서는 2월 8일이라 하지만, 이는 음력 12월 8일에 상당하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날을 성도일로 경축해왔다. 석가모니의 나이 35(또는 36)세였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진리(法)를 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망설인다. 그러자 '범천'으로 번역되는 브라마 신이 나타나 빨리 설법하기를 권한다.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전설이다. 아마도 석가모니의 심중에는 설법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망설임이 오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망설임과 설법하려는 결의가 경전에서는 인도의 최고신으로 권위있는 범천이 권유한다는 형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결의와 아울러 어떻게 설명하고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 또 새롭게 발견한 법에 대한 기쁨을 음미하면서 깨달은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7주간의 명상에 잠겼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추구한 것은 인생의 모순을 계기로 하여 인간의 고뇌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자를 거쳐 고행주의자로 편력하면서도 전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양측에 분명히 인생도피의 경향이 강했음을 시사한다. 우유죽을 먹은 것도 이런 입장에서 이해된다. 즉 신체를 고행으로 심하게 괴롭혀도 문제의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 고행으로 체험한 결과를 토대로 삼아, 몸은 현실생활의 상태로 두면서 불안을 해소하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항상 현실생활에 입각한 입장에서의 해결이 중시되었다. 이는 고행을 칭찬하고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종교보다도 좋은 수행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점과도 연관된다. 그런데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경전들마다 설하는 바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에 의하면, 석가모니는 12지인연, 즉 연기(緣起)의 도리를 관철하여 깨달았다고 한다. 이 도리에 의해 그는 모든 것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고서,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불변하고 항구적인 것 또는 사람의 안이나 밖에 영혼이라든가 자기 또는 자아와 같은 절대적인 실체가 없음을 가르치게 된다. 석가모니 생존시에 체계화된 연기설이 성립되었을 것임은 확실하지만 당시는 훨씬 간단한 연기관(緣起觀)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연기의 이법(理法)을 깨달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조직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45년 동안 전도의 과정에서 성숙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현실의 생활 속에서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거기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고자 노력했다.


여러 전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석가모니가 인간의 이법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법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 그 자체에 입각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중에 불교사상이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는 그 맹아가 여기서 발견된다. 석가모니가 항상 고정된 방식으로 설법하지 않고, 때에 따라 설하고 삶에 부응하여 설하는 소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나중에 체계화되어 가긴 했지만, 연기의 본질적인 사고방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음은 당연했다.

- 설법과 전도


석가모니는 7주간의 명상 끝에 이 법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자기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두 선인과 이 기쁨을 나누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생각한 사람은 베나레스로 떠나 갔던 5명의 동료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법을 전하고자 전도 여행길에 나섰다. 당시의 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프르가다바는 녹야원(鹿野苑)으로 번역되는 곳으로 현재의 사르나스인데, 이곳은 수행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 거기에 와 있던 옛 동료인 5명의 수행자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석가모니가 오는 것을 보고 그를 맞이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정식으로 설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설법이었다. 예전의 동료였던 5명은 그 법에 귀를 기울여 부처와 동일한 경지를 깨닫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것을 유명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처음에는 친한 보살에게 법을 설하여 그것이 이해되자, 석가모니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하기에 이른다.


이 베나레스에서 상인의 아들인 야사와 그의 친구 3명, 다시 그들의 친구 50명도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서 출가했다. 그러나 사문은 한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석가모니는 "한 길을 둘이서 가지 말라"고 설하여 각각의 제자들을 전도의 여행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그 자신도 몇 사람의 제자들을 데리고 편력한다. 드디어 불을 섬기는 브라만으로서 마가다국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카사파라는 이름의 3형제와 그들의 무리 1,000명을 귀의케 했다. 또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도 귀의하여 증대하는 불교 수행승들을 위해 나중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또 가섭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카사파도 제자로 삼았는데, 그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 교단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사람은 2대 제자로서 유명한 사리불(舍利弗 riputta)과 목건련(目連 Moggallana)의 귀의였다. 이들은 당시 불가지론자인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스승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사지라는 석가모니의 제자가 탁발하며 지나가는 것을 본 사리불은 탁발이 끝나길 기다려 그에게 질문했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일단을 설하는 그의 말에 감복하여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의 제자 250명을 이끌고 집단으로 전향했다고 한다. 산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본래의 불교가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넘어 회의론 및 불가지론을 일단 통과한 입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당시 이미 유명하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석가모니 곁으로 무리를 끌고 전향했던 사건은 마가다에서 석가모니를 일약 유명하게 했다. 나아가 이 사건은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받고자 귀의하는 자가 늘어나는 단서가 되었다. 경전에서는 "1,250명의 제자와 함께 머물고 계셨다"는 표현이 정형화되어 있는데, 그 숫자는 카사파 3형제가 이끄는 1,000명과 사리불 등을 비롯한 250명을 총칭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당시에 그만큼의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항상 전도 여행을 계속하여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舍衛城), 여기에 인접하는 바지국, 그리고 석가모니 생존시에 코살라국에게 멸망된 석가족의 나라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던 것 같다. 당시 갠지스 강 중류지방에는 사문들의 탁월한 지도자 6명이 잇달아 출현했다. 불교측에서는 이들을 '6사외도'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는 그들의 제자들과 문답하여 많은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제자들 속에는 사촌동생인 아난(阿難 Ananda)과 아나율(阿那律 Anuruddha), 자신의 외아들인 라훌라도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부왕인 정반왕과 자신의 부인이자 라훌라의 어머니인 야쇼다라도 귀의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불교의 이단자로 간주되었던 사촌동생 데바닷타도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실천에 관해 가장 보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불교에서는 가장 사악한 반역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부처가 되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석가모니에게 무엇보다도 비극이었던 것은 실질적인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사리불이 돌연히 죽고, 목건련도 바라문에게 맞았던 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교단의 지도자인 이 두 사람의 죽음은 실로 애통한 일이었다. 한편 일반 신자들 중에서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 코살라의 국왕 파세나디(Pasenadi),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기증한 것으로 유명한 수다타(Sudatta)가 있었다. 특히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수다타는 코살라국의 수도 사바티에 사는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라자그리하에서 만난 석가모니에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되어 석가모니를 사바티에 초청하고 그를 위해 제타(Jeta 祇陀)라는 왕자와 원림[祇園]에 수도원, 즉 정사를 세웠다. 이것이 기원정사이다. 이곳은 사실상 석가모니가 활동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설법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밖에 비사카(Visakha)라는 여인이 기증한 녹모강당(鹿母講堂), 코삼비에 있는 정사로서 흔히 미음(美音)정사라고 번역되는 고시타원, 베살리의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 등 많은 정사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왕이나 부유한 상인이 불교 신자로 귀의했던 점이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동시에 신자가 증대되는 원인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석가모니는 어느 사문 지도자보다 일찍이 출가승들의 집단생활을 도입했다. 그것을 상가(Samgha)라 한다. 흔히 말하는 승가(僧伽)가 이것이며, 불교의 교단을 가리킨다. 베나레스에서 5명의 수행자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을 때를 승가의 성립으로 삼고 있는데, 그 승가에는 큰 특색이 있었다. 즉 출가 이전에 속했던 사회적 계급을 불문하고, 하루 또는 한 시간이라도 일찍 출가하여 계(戒)를 받은 자를 윗자리[上座]에 앉혔다. 이렇게 출가하여 수계한 이후의 햇수를 법랍(法臘)이라 한다. 이리하여 교단 내부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교단에서의 이러한 평등주의는 기존의 사회 제도를 비판한 것인데, 그것이 교단 내부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석가모니의 적극적인 이 

상주의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승가에서 수행자 개인은 3개의 옷과 하나의 밥그릇[鉢盂]만을 소유하도록 한정되었고, 기증된 것은 모두 승가의 공동소유로 삼았다. 비가 쏟아지는 계절인 우기가 되면 수행자들은 정사를 중심으로 한 곳에 머물러 그간의 생활에 대한 반성과 학습에 전념했는데, 이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드디어 우기가 끝날 때면 포살(布薩 uposatha)을 실행하여 이제까지의 생활을 반성하고 참회했으며, 그 마지막 날에는 자자(自恣)를 실행하고 새로운 의복을 분배했다. 한편 제자 아난의 진력에 의해 여성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사부대중(四部大衆) 또는 사중(四衆)이라 불리는 불교 신도의 구성이 완결되었다. 사중이란 남성 출가자인 비구(bhikkhu),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bhikkhuni)·우바새(upasaka)·우바이(upasika)라고 재가(在家)의 남녀 신자를 말한다. 높은 이상을 내걸었던 승가의 정신은 인도의 고대사회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 입멸


석가모니는 80세의 노령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45년 동안의 전도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노령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안 석가모니는 생애의 종말이 다가옴을 느끼고서 수도 라자그리하를 떠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 쪽을 향해 최후의 여행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질서에 관한 지침을 남겨주기를 바라는 아난에게 석존은 이제까지 남김없이 법을 설해 왔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처럼 감추어둔 진리는 없음을 밝히고, 유명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유훈을 설한다. "아난아, 너 스스로를 너의 섬으로 삼고, 또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서 살아라. 법을 너의 섬으로 삼고, 법을 너의 의지처로 삼아라. 그밖의 어느 것도 너의 의지처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섬의 기원어가 '등'이라는 뜻도 지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 설법을 '자등명 법등명'으로 번역했다.


석가모니의 최후를 기록한 경전의 묘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죽음). 도중에 대장장이 춘다(Cunda)가 공양한 음식이 쇠약해 있는 석가모니에게 심한 설사까지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나를 위해 2그루의 살라 나무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 누울 자리를 깔아달라. 아난아, 나는 피곤하다. 옆으로 눕고 싶다"고 말하고, 옆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했다. 특히 그는 슬픔에 싸여 울고 있는 아난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 울지 말아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가깝고 소중한 모든 것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지워진 것은 무엇이나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 또 석가모니를 친견하기 위해 찾아온 수바다(Subhadda)라는 이름의 고행자가 석가모니의 안녕을 걱정하는 아난으로부터 거절당하는 대화를 우연히 들은 석가모니는 그 고행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하여 그는 석가모니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임종이 다가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명확히 알고자 원하는 어떠한 의심이나 질문이 있다면 물으라고 3번이나 말했다. 그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자 석가모니는 비구들에게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겠다. 조건지워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대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설법이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해 있을 때 바로 곁에서 부축하고 있던 자가 아난과 아나율이라는 사촌동생이었던 점도 인상적이다. 석가모니의 사후 교단의 지도자가 되는 가섭이 석가모니가 임종했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쿠시나가라로 달려온 것도 비감이 넘치는 장면이다.


편안하게 숨을 거둔 석가모니의 임종은 아름다웠다. 그날을 북전(北傳)에서는 2월 15일, 남전에서는 베사카 달의 보름이라 한다. 베사카 달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둘째 달이고 보름은 15일이므로 실제로는 같은 날이다. 한국에서는 음력 2월 8일을 열반절로 기린다. 흔히 불멸(佛滅)의 연도라고 통칭되는 것으로서, 석가모니가 열반한 입멸(入滅) 연도에 대해서는 고래로 수많은 설이 있으나, 그것들은 남전과 북전으로 크게 양분된다. 석가모니의 탄생 연대도 이 입멸 연대로부터 역으로 계산한 것이다.


남전(南傳)에 의한 대표적인 것은 BC 543(또는 544)년 설로서, 현재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지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는 특히 학술적인 근거가 희박하나 오랫 동안 널리 통용되어온 전승이어서, 현재 한국의 불교 종단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이것을 채택하고 있다. 북전에 의한 대표적인 설은 중성점기설(衆聖點記說)인데, 이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매년 율장에 점을 하나씩 계속 찍었다고 중국에 전해진 전설이다. 이에 의하면 입멸 연도는 BC 483년으로 계산된다. 일본의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 최근 일본 일부에서 승인되기 시작한 것은 BC 386년 또는 BC 383년 설인데, 아소카 왕의 즉위를 불멸 116년이라고 하는 캐시미르 지방의 전승을 유력한 자료로 삼은 계산이다.


한편 아소카 왕의 출현은 불멸 후 218년이 된다고 하는, 스리랑카의 사료(史料)를 토대로 BC 486년이 불멸 연도라고 계산하는 설도 있다. 그러나 많은 불전과 논서에서 전하는 아소카 왕의 즉위 연대는 불멸 후 100~160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어떠한 추정도 단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다만 연대에 무관심했던 인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만큼이나 상세하게 연도를 추정할 수 있다는 자체가 경탄할 만하다. 1주일 후 그의 시신은 쿠시나가라에서 말라족에 의해 화장되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을 놓고서 말라족과 마가다·베살리·카필라바스투와 같은 몇몇 왕국 지도자들의 사절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도나(Dona)라는 늙은 사문이었던 브라만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그는 평화를 설파했던 분의 유물을 놓고서는 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합의를 통해 유물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8부분으로 나뉘었다. 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그 유물을 안치하고서 석가모니의 유덕을 경모하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이것이 스투파(stupa), 즉 불탑(佛塔)이다.


이 불탑은 후대에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는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사상사적 측면에서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건은 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가르침을 집성한 결집(結集)이다. 석가모니가 입멸하자 제멋대로인 견해를 저마다 그가 설한 것인 양 내놓을 우려가 있음을 염려한 가섭은 제자들 중에서 500명의 정통 비구들을 선발하여,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 교외에서 경(經 sutta)과 율(律 vinaya)의 결집을 행했다. 아난이 암송하는 경 하나하나를 전원이 찬성함으로써 경장(經藏)이 편찬되고, 우팔리(Upali)가 암송하는 율의 조항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율장(律藏)으로 편찬되었다. 이로써 석가모니의 일반적 가르침인 경과 출가자의 교단생활을 규정한 율이 정식으로 제정되었다(→ 삼장).


- 당대의 평가


그는 위대한 교사요, 사람들의 조련사로서 독특한 명성을 가졌다. 코살라의 왕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었던 살인자요, 악한인 앙굴리말라(Angulimala)에 대한 그의 대화와 교화는 그의 위대한 능력과 재능이 드러난 본보기이다. 사람들은 그를 보거나 그의 가르침을 듣고서 매혹되었으며, 반대자들은 그가 어떤 '유혹적인 속임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서는 매우 빠르게 개종했다. 이런 사실은 코살라 국왕의 논쟁으로써 석가모니를 꺾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갔던 이들이 결국에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자비와 지혜로 가득 찬 그는 각자의 소질이나 수준에 따라 그들의 구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았음이 인정된다. 그는 단 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도 먼 거리를 갔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자들에게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던 그는 언제나 그들의 행복과 진보에 대해서 물었다. 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면 그는 매일 환자들의 병실을 방문했다. 언젠가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방치한 병든 수행승을 돌보면서, "병든 이를 돌보는 자는 나를 시중 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회개혁자로서의 석가모니는 인도에서 오래 전에 확립되어 고수하고 있던 카스트 제도를 비난했고, 인간의 평등을 인정했다. 또 그는 경제적인 부와 도덕적 진보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형벌을 통해 죄를 억압하려는 것은 헛되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므로 사람들의 경제적 조건이 증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전륜왕사자후경 轉輪王獅子吼經〉을 비롯한 초기의 여러 경전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바른 직업에 종사하고 진실을 말하며,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여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신뢰를 얻어 명예와 재산을 획득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러나 재산을 일방적으로 획득하는 데 그치고 단지 자신의 자본으로 보존해두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으며, 자신이 이용하는 동시에 타인과 같이 향수케 하여 유효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부채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는 "광야를 여행할 때의 길동무처럼 가난한 가운데서 나눠주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원한 법이다"라고 말하여 서로 협조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당시의 불교도는 국가의 문제에 관해서 국왕은 힘으로써 민중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벗어나서, 먼저 출가자들 사이에서만이라도 완전한 이상사회를 구축한 연후에, 그 정신적 감화를 통해 일반사회의 개혁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것이 석가모니가 승가를 제정한 정신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국가를 완전히 무시하고 사회적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이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연히 국가의 지도자를 문제 삼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몇몇 경전에서 국왕의 자질을 거론하고 있으며, 바지족의 공화제 정치를 칭찬했다고도 전한다. 불교 교단의 운영 방식에는 당시의 공화정치나 조합을 모방한 점이 있음이 인정된다. 국가에 대한 그의 지론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가란 진리인 법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석가모니는 엄격한 교사였다. 강대한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은 어떻게 석가모니가 비구들의 공동체에서 그러한 질서와 계율을 유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왕으로서도 인민은 물론이고 자신의 왕실에서조차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는 서로의 사랑·애정·존경에 기초하여 질서와 계율을 유지시켰다. 그에게는 많은 신통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는 신통력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기적). 어느 때 제자들 중의 1명이 대중 앞에서 신통력을 과시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꾸짖고서 재가신도들 앞에서 신통을 행하지 말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신통이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석가모니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종합해보면, 그는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비참한 광경을 보고서, 이성적인 사상체계와 생활방식으로 인간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결심했으며, 그것을 실천했던 위대한 지혜와 자비의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는 위대한 지혜의 소유자요, 위대한 자비의 실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교단 내부의 문제까지도 그의 지시에 따라 해결했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를 사모하는 귀의자들에게 그의 입멸은 커다란 지표를 상실하는 사건이었다.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으라"라는 유언이 있었지만, 석가모니 부처에게 의지하려는 경향은 더 커져가기만 할 뿐이었다. 인간인 석가모니 부처가 사모의 정을 품고 있던 제자들에 의해 초인간적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먼저 경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가 이미 신격화된 표현으로 불리게 된다. 이어서 그는 '부처'로 불리고 '고타마'라는 인간으로서의 성(姓)은 결코 사용되지 않으며, 이윽고 부처의 10가지 호칭, 즉 여래10호(如來十號)가 정해진다. 그것은 ① 완전한 인격자인 여래(如來), ② 존경해야 할 사람인 아라한 또는 응공(應供), ③ 바른 깨달음을 연 사람인 정변지(正遍知) 또는 정등각(正等覺), ④ 밝은 지혜와 실천을 구현하고 있는 사람인 명행족(明行足), ⑤ 행복한 사람인 선서(善逝), ⑥ 세간의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인 세간해(世間解), ⑦ 최상의 사람인 무상사(無上士), ⑧ 거친 자를 제어하는 사람인 조어장부(調御丈夫), ⑨ 신들과 인간의 스승인 천인사(天人師), ⑩ 세상에서 존귀한 분인 세존(世尊)이다. 모든 것을 완수하여 불가능한 일이 없는 부처는 신체적으로 뛰어난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 해석되기에 이르는데, 그 특징은 '32 상(相)'과 '80 종호(種好)'라고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인도인들이 신봉하는 신의 특징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이상적인 신체적 특색을 부처에게도 적용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런데 법을 깨달은 자가 부처이므로 그가 아무리 초인적인 취급을 받더라도 석가모니 이외에도 부처가 되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하기 이전에 7인의 부처가 있었다는 과거불(過去佛) 사상이 등장했다. 부처가 신격화됨과 아울러 부처에 대한 신앙도 강조된다. 아소카 왕 시대에는 이미 그러한 경향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편 석가모니 부처 사후의 교단 지도자들은 석가모니 한 사람만이 부처이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부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며, 아라한과(果)라는 경지를 얻는 것만이 최고의 경지라고 생각하여 석가모니와 구별했다. 이로부터 부파 불교의 고정관념이 시작된다. 이것은 현재 남장 상좌부의 기본적 사고의 하나로 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 그뒤에 탑을 세움으로써 시작된 사리탑 또는 불탑에 대한 신앙은, 석가모니 부처의 육신이 남긴 사리에 대한 존경뿐 아니라 그가 남긴 모든 것에 대한 신앙으로 전개되었다.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남긴 머리카락이나 가르침에도 신앙의 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후대에는 경전을 사리탑에 봉안하여 신앙하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있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 자신에게 귀의했겠지만, 그가 입멸한 후에 이루어진 귀의는 모두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이다. 아무리 진리인 법이 부처의 입을 통해 설해진 것이었다 하더라도 불멸 이후의 귀의는 법 그 자체에 대한 귀의와 동일시되고, 우주의 진리는 부처 그 자체라고 간주되었다. 불탑 숭배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소위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가 크게 전개되어, 법신·보신·화신이라는 3신설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법신(法身)이란 우주의 진리 그 자체를 부처의 신체라고 간주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다. 진리, 즉 법의 영원성을 자각한 대승불교도가 부처에 대한 귀의를 표명하여 발전시킨 사상이다. 보신(報身)이란 부처가 되기 위해 과거에 위대한 수행을 완수한 그 보답으로 나타난 부처의 훌륭한 모습을 의미한다. 아촉불이나 아미타불 등의 구체적인 부처들은 보신이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누구라도 부처가 됨을 의미한다. '부처가 될 가능성'(佛性)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그 가능성이 번뇌에 덮여 있어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사고의 발전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부처가 된다고 설하는 데까지 전개된다. 또 무한한 선행을 거듭 쌓은 결과로 미래에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는 사상도 생겼는데, 이를 수기(授記)라고 한다. 끝으로 화신(化身) 또는 응신이란 부처가 중생제도를 위해 수많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현실 세계에 내려와 나타내는 신체이다. 여기에도 상좌부 계통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입장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보살의 입장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양측 모두 석가모니 부처를 숭배하고 있지만, 후자로부터는 석가모니 부처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기본적 명제를 제창하면서 부처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대승사상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사상적 발전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의 영원성을 구하고자 노력한 결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석가모니의 전기가 집성된 것은 그가 입멸한 지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현존하는 것들 중에서 산스크리트 계통의 것으로는 〈마하바스투 Mahavastu〉·〈랄리타비스타라 Lalitabistara〉, 마명(馬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아슈바고샤(Avaghoa)의 〈붓다차리타 Buddhacarita〉가 있다. 중국에서 번역된 〈불본행집경 佛本行集經〉 60권은 〈마하바스투〉와 유사한 점이 있어서 이의 번역이 〈불본행집경〉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근래에 이러한 견해는 오해라고 밝혀져 있다. 〈랄리타비스타라〉는 〈보요경 普曜經〉 8권과 〈방불대장엄경 方佛大莊嚴經〉 12권에 상당하며, 〈붓다차리타〉는 중국에서 〈불소행찬 佛所行讚〉으로 변역되었다. 산스크리트 원전 없이 한역(漢譯)으로만 전하는 것은 〈과거현재인과경 過去現在因果經〉 4권, 〈중허마하제경 中許摩詞帝經〉 13권, 〈불본행경 佛本行經〉 7권, 〈중본기경 中本起經〉 2권 등이다. 한편 팔리어로 쓴 전기의 집대성은 〈니다나카타 Nidanakatha〉인데, 이는 그 이전에 성립된 전기들을 하나로 조직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느 것이나 후세에 집대성한 것이어서 그 내용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밖에 그 이전의 오래된 자료로는 단편적인 것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지만, 팔리어 문헌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하는 〈수타니파타〉, 〈상응부 相應部 Samyutta-nikaya〉의 〈사가타바가 Sagathavagga〉, 그리고 〈비나야 Vinaya〉, 즉 율장을 비롯하여 더욱 발전된 니카야(Nikaya) 종류, 또 한역으로는 〈아함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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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도6.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팔상성도 벽화의 여섯 번째는 수하항마상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불퇴전의 다짐을 하면서 목숨을 건 수행에 들어갔을 때,『과거현재인과경』과 『방광대장엄경』의 내용과 같이 갑자기 마왕의 세계가 크게 흔들렸다. 마왕 파피야스(papiyas)는 욕계에 속하는 천상 중에서 최고의 것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으로 파순(波旬)이라고 음역한다.


이 마왕 파순이 사바세계를 훑어보니까

보리수 밑에서 사문이 정진을 하고 있는데 그 정진의 힘이

대단히 강해서 마왕의 세계 전체가 흔들린 것이다.

파순은 벌벌 떨면서 그의 대신들과 일천 명의 아들과

모든 권속을 불러 모아놓고서 말하였다.


“세간에 있는 사문 고오타마가 지금 보리좌에 앉아 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여

나의 세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그의 도가

이루어지기 전에 달려가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쳐부수어 반드시 그를 항복시켜라.”

이에 마왕 파순은 요염하고 교태로운 아름다움이

모든 천녀들 가운데 으뜸인 세 딸을 보내 유혹하기도 하고,

온갖 마군의 무리를 동원하여 모든 방법으로

사문 고오타마를 향해 공격하였다.

마왕은 아홉 가지 이변(異變)을 일으켜

성도(成道)를 방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벽화의 내용으로 주로 등장하는 장면은,

마왕이 세 딸을 보내 유혹하는 장면과

지신(地神)이 땅으로부터 솟아 증명하는 장면,

그리고 도판과 같이 태자가 마군의 무리에게

“앞에 있는 병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가 너에게 항복할 것이고

만약 움직이지 못하면 너희가 반역을 깨달아 나에게 항복할지니라.”하니

파순의 대중이 달려들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결국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 등을 그려서 항마를 상징한다.


싯다르타 태자는 일체의 마군을 항복받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자

오직 청정한 한마음으로 경계의 벽을 허물고 덮이었던

세계를 꿰뚫어 모든 것이 조화롭게 드러나는

생명의 참모습(諸法實相)을 여실히 보게 되었다.

그때에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밝은 새벽별을 보는 순간

무상정등정각을 완성하고 큰 소리로 사자후하였다.


“이제 어둠의 세계는 타파되었다.

내 이제 다시는 고통의 수레에 말려들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며 이제 여래의 세계를 선포하노라.”

그래서 수하항마상을 항마성도상(降魔成道相)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팔상도4.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벽화의 네 번째는 유성출가상이고,

다섯 번째는 설산수도상이다.

유성출가상의 그림을 보면 태자가 종마 칸타카를 타고

시종 찬다카는 칸타카를 잡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태자가 북문을 나섰을 때 출가 사문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수행 생활만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한 후 부왕에게 아뢰었을 때,

물론 부왕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태자로부터 출가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달래고 타일렀지만 이미

반석같이 굳어진 태자의 결심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야쇼다라는 아들을 낳았다.

태자 싯다르타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라훌라(rahula, 장애, 속박이라는 뜻)”하고 한탄하였다.

부모나 부부의 은애(恩愛)도 차마 뿌리치기 어려운 고통인데

이제 또 아들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그 정을 끊기가

비할 데 없이 어려움을 혼자 고백한 말이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이미 결정된 태자는 발길을 돌려

시종 찬다카를 불러 성의 모든 권속이나 일체의 석가족들이

알지 못하게 종마 칸타카를 끌고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는 시종 찬다카가 데려온 종마

칸타카에 올라 타고 성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카필라 성을 바라보면서 사자처럼 외쳤다.


“나는 이제 차라리 스스로 절벽 위에서 이 몸을 던져

큰 바위에 떨어질지언정,모든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을지언정,

또한 스스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않아 죽을지언정,

만약 내가 마음에 다짐한 대로 중생들을 고통의 바다에서

해탈시키지 못한다면 결코 카필라 성에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하였다.

이러한 출가의 장면을 출가의 의미로 상징화하여

성을 뛰어 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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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도4.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벽화의 네 번째는 유성출가상이고,

다섯 번째는 설산수도상이다.

유성출가상의 그림을 보면 태자가 종마 칸타카를 타고

시종 찬다카는 칸타카를 잡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태자가 북문을 나섰을 때 출가 사문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수행 생활만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한 후 부왕에게 아뢰었을 때,

물론 부왕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태자로부터 출가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달래고 타일렀지만 이미

반석같이 굳어진 태자의 결심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야쇼다라는 아들을 낳았다.

태자 싯다르타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라훌라(rahula, 장애, 속박이라는 뜻)”하고 한탄하였다.

부모나 부부의 은애(恩愛)도 차마 뿌리치기 어려운 고통인데

이제 또 아들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그 정을 끊기가

비할 데 없이 어려움을 혼자 고백한 말이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이미 결정된 태자는 발길을 돌려

시종 찬다카를 불러 성의 모든 권속이나 일체의 석가족들이

알지 못하게 종마 칸타카를 끌고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는 시종 찬다카가 데려온 종마

칸타카에 올라 타고 성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카필라 성을 바라보면서 사자처럼 외쳤다.


“나는 이제 차라리 스스로 절벽 위에서 이 몸을 던져

큰 바위에 떨어질지언정,모든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을지언정,

또한 스스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않아 죽을지언정,

만약 내가 마음에 다짐한 대로 중생들을 고통의 바다에서

해탈시키지 못한다면 결코 카필라 성에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하였 

다. 

이러한 출가의 장면을 출가의 의미로 상징화하여

성을 뛰어 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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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생애를 팔상도 중심으로 설명


들어가는 말


佛敎는 말 그대로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불타(불타:Buddha) 즉, 깨달은 사람(覺者)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과 성품이 있는데 이를 佛性이라 한다.


저마다 불성을 간직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 부처님의 생애를 알고 그 삶대로 사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진리를 깨쳐 부처님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불자로서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은 바로 부처님의 생애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는 것은 불교에 입문한 후 그 조교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부처님이 된 삶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부터 우리도 부처님 같이 수행 정진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 불교를 믿고 행하는 것은 결국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 같이 살고 싶은 우리들에게 부처님의 생애는 다시없는 인생의 귀중한 나침반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부터 약 2,600년 전, 인도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카필라(Kapila)국 사캬(Sakya:釋迦)족의 정반왕과 왕비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나고 성은 고타마(Gotama:최상의 소)였고, 출가하기전의 이름은 싯달타(Siddartha)이다.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석가모니(Sakyamuni)즉 釋迦族 出身의 聖者라고 불렀다.


불타는 시종일관 모든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올바로 수행·실천하여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설파하셨고, 그 모범을 보이셨다. 그러기에 우리 범부·중생은 불타의 행적과 그 언행을 그대로 배우고 스스로 수행·정진하여 깨치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 가장 소중하고 값진 것은 불타의 행적과 실천적 언행이다. 그러기에 불타 이래 그 제자들과 역대 조사들이 그 어른의 행적·언행을 엮어 모아서 불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전으로 받들어 배우는 모든 불경 내지 각국의 불서는 다 불타의 행적 그 자체로, 그에 대한 해설·부연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불타의 말씀은 경장이요, 그 실행은 율장이며, 이에 대한 해설·논의는 논장이 되어, 이른바 삼장이 성립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인도와 중국 내지 한국에 걸쳐, 이 삼장을 꿰뚫어 가장 훌륭한 불타의 생애, 탁이한 행적을 재편하여 그 어른의 완벽한 일대 전기로 완성한 것이 바로 '불타전기(佛陀傳記)'이다. 이를 요약하여 '불타(佛陀)'라 하거니와,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성한 것이 곧 '팔상(八相)'이라 하겠다. 이 팔상(八相) 중심의 불전(佛傳)을 가장 효율적으로 조직·표현한 것이 이른바 '불전문학(佛傳文學)'이다. 모든 불경이 다 빛나는 문학이라 하거니와, 그 중에서도 여기 불전문학이 가장 빼어난 분야라고 알려졌다. 그것은 세계 최대의 서사문학이요, 최상의 장편소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전문학은 달리 팔상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더 선명하리라 본다. 기실 불전은 팔상으로 구성·표현되었을 때 가장 정확하고 문학적이기 때문이다. 이 팔상은 확대되면 팔만대장경으로 통하지만, 요체만 잡으면 한자어 8귀로써 족하다. '도솔래의(兜率來儀)', '비람강생(毘藍降生)', '사문유관(四門遊觀)', '유성출가(逾城出家)', '설산수도(雪山修道)', '수하항마(樹下降魔)', '녹원전법(鹿苑傳法)', '쌍림열반(雙林涅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팔상은 그 기본구조가 완성·유형화된 이래, 각개 불교국의 불전인식과 그 사상·신앙의 권법·전통이 되어왔다. 그러기에 이 팔상문학은 능소능대하여 나라마다 각기 다른 경전·문학 형태로 찬성·전개되었으며, 인도의 ≪불소행찬(佛所行讚)≫이나 중국의 ≪석가보(釋迦譜)≫, 한국의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이 그 전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팔상문학은 너무도 찬란하고 아름다워 팔상계 미술, 음악, 무용, 연극 등으로 유통·연행되고, 나아가 팔상계 신앙·민속 등으로 전승·파급되기도 하였다. 이 팔상문학 중에서 가장 출중하고 의미 심증한 것이 바로 불타의 탄생신화이다. 이 탄생신화는 불타 전기의 출발점이요, 팔상문학의 중심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탄생신화는 팔상구조에서는 '비람강생(毘藍降生)'에 해당된다. 불타는 전생의 무한공덕으로 도솔천의 호명보살이 되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해서 중생을 제도하리라 서원을 세우고, 백상(白象)을 타고 하강하여 인도 정반왕의 마야 부인의 태중에 자리한다. 이미 부처의 경지에 이른 보살은 태중에서 수행·설법하며 태어날 때를 기다린다. 마침내 날달이 들어, 마야 부인이 비람원에 가서 무우수 가지를 잡고 산기를 느끼는 순간, 우협으로 탄생하니 4월 8일이다. 태자의 모습을 나투니, 연꽃이 솟아 그 꽃을 밟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는, 좌우수(左右手)로 천지를 가리키며, '천상천하에 나 홀로 높다.'고 사자후를 토한다. 이어 삼계가 다 고해니 이를 다 편안케 하리라고 인자한 서원을 세우니, 천지가 진동하고 삼천대천세계가 가장 밝아진다. 이에 구룡이 향수를 뿜어 씻기고, 제석 범왕이 천의를 입혔다.


탄생신화는 불전문학, 즉 팔상문학 중의 핵심부분으로서 신성·장엄한 종교성을 천명한다. 불교의 개창과 대승불교의 일체 종지를 인간 중심으로 선언한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문학·예술로 승화 표현됨으로써, 그 의미와 권능은 극대화된 것이라 하겠다. 해마다 부처님이 새롭게 거듭나시는 말에, 이 탄생신화의 선언적 권능을 통하여 부처님의 행적을 실천적으로 본받아 마침내 우리 스스로 성불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1. 도솔래의상 兜率來儀相(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 석가모니가 과거에 쌓은 공덕으로 도솔천왕으로 머물다 부처님이 되기 위해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요 부분을 보면, *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태자로 태어나기 전의 전생(前生)을 나타낸 부분으로 소구담(小瞿曇)의 시절에 도적으로 몰려 말뚝에 묶인 채 활을 맞는 장면.


*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여러 천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入胎) 장면.


* 마야부인의 꿈에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부인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장면.


* 마야부인이 정반왕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왕은 바라문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이때 바라문이 마야부인께서 성인(聖人)을 잉태했음을 알려주는 장면.등이 있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은《과거(過去) 현재인과경(現在因果經)》에 보이는 바와 같이 석가(釋迦)가 이미 보살육도(菩薩六度)의 행(行)을 마치고 도솔천상(兜率天上)에서 염부주하생(閻浮洲下生)의 시기가 왔음을 천인중(天人衆)에 고(告)하여 도솔천궁(兜率天宮)으로부터 백상(白象)을 타고 내강(來降),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몸에 입태(入胎)하는 내용(內容)이 공통(共通) 화제(畵題)로 되어 있다.



통도사(通度寺)의 팔상도(八相圖)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에서는 맨 위쪽 월륜(月輪)안에 백상(白像)을 타고 내강(來降)하는 보살상(菩薩像)과 이를 에워싸고 기악(伎樂)을 연주하며 시종(侍從)하는 모습의 천중상(天衆像)이 묘사(描寫)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단(下段) 좌측(左側)에 마야부인(摩耶夫人)이 여러 시녀(侍女)를 거느리고 잠든 모습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태몽(胎夢)을 묘사(描寫)한 것이다.


중간 우측(右側) 의자에 마주 앉아 있는 정반왕(淨飯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모습이 있고, 하단(下段) 오른쪽에는 2구(軀)의 신장(神將)이 성(城)을 외호(外護)하고 있다. 건물(建物)이나 수지(樹枝)의 표현기법(表現技法)은 1728년작(年作) 쌍계사(雙谿寺) 팔상도(八相圖)에서와 같이 간략한 표현이 아니라 세밀(細密)하고 색채(色彩)가 풍부한 표현(表現)이다.



2. 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통도사 팔상전) : 카필라국은 히말라야 남쪽 기슭의 초목 지대에 자리한 조그만 왕국으로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국이었다. 이웃에는 코살라와 마가다와 같은 큰 나라들이 있어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비교적 풍요롭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요 부분을 보면, * 출산을 위해 마야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태자가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난다. 이를 여러 천신들이 보호하고 있는 장면.


* 태자가 태어나자 하늘에서 아홉 마리 용(龍)이 물을 뿜어 씻기고 여러 천신들이 기뻐하는 장면. * 부처님께서 사방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왼손으로 하늘을,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라 외치는 장면.


* 아시타선인이 태자의 관상을 보고 장차 성장하여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거나 아니면 출가하여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장면 등이 있다.


카필라국의 정반왕은 석가 족의 후예로서 용감하고 지혜로운 왕이었으나, 부인인 마야 왕비가 늦도록 슬하에 왕자가 없자 걱정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왕비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커다란 흰 코끼리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데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지고 있었다. 흰 코끼리는 마야왕비에게 다가와 엎드려 절을 하고는 왕비의 옆구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당시의 많은 예언가들은 "성인이 태어나실 꿈이다. 왕자님이 태어나실 꿈이다.'라고 하였으며, 온 나라 백성들도 장차 태어날 왕자를 생각하면서 기뻐하였다.


마야 왕비는 태아를 위하여 더욱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졌다. 아이를 잉태한 후 마야 왕비의 신상에는 예전에 몰랐던 지식이나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되는 신통한 변화가 일어났다. 말을 하는데 막힘이 없고 논리가 정연해져서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어느덧 모든 백성들의 기대 속에 따스한 봄이 되고 왕비의 산달이 다가 왔다. 마야부인은 해산 일이 다가오자 당시의 관습에 따라 하산을 하기 위해 친정인 코올리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화창한 봄날, 왕비를 태운 가마 행렬이 룸비니 동산에 이르자, 때마침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며 왕비를 맞았다.


마야 왕비는 무우수(無憂樹)나무의 신비스런 향기에 끌리어 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갑자기 진통이 일면서 산기를 느꼈다. 왕비는 침착하게 장막을 치도록 시녀들에게 이른 뒤 오른손을 뻗어 무수우 나무의 동쪽 가지를 잡고 아기 왕자를 낳았다. 그 날이 바로 음력 사월 초파일이다.


인류의 스승이시며 중생의 어버이신, 거룩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렇게 이 세상에 오셨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일어나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사방을 둘러보며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토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고통 속에 잠겨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여기서 태자가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종종 독불장군이라는 식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본래 의미는 태자가 도솔천에서 내려온 일생보처보살로서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훌륭한 인간이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구하는 모든 중생 하나하나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지혜의 외침, 생명 존엄의 선언이다.


태자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나 오색의 감로수로 태자의 몸을 씻어 주었다. 땅은 은은히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천신들이 내려와 차례로 예배드리며 이 세상 가장 존귀한 분의 탄생을 축복하였다.

정반왕은 태자의 이름을 '고타마 싯달타'라고 지었다. 왕자의 앞날이 마음먹은 대로 만사 형통하라는 축원이 깃든 이름이었다. 태자가 태어나자 서른 두 가지의 서응(瑞應)이 생겨났는데 땅이 평평해지고, 길과 거리가 저절로 깨끗해졌으며, 마른나무에서 꽃과 잎이 피어나고, 저절로 기이하고 단 과일이 났으며, 땅 속에 묻혀 있던 보배들이 저절로 튀어나오고, 해와 달과 별이 모두 멈추고, 온갖 질병이 모두 나으니 이는 부처님의 탄생으로 인해 풍요롭고 맑은 세상이 이루어지고, 죽음의 존재가 생명을 회복하며, 감추어졌던 가치와 진리가 나타나고, 해와 달이 멈추고 같이 시간이 한계 즉, 무상을 초월하는 일대 전환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태자를 데리고 신묘에 참배를 하자 신묘의 여러 신상들이 모두 거꾸로 넘어지므로 모든 대중이 이에 놀라며 태자의 거룩한 덕에 천신들도 귀명한다고 하면서 태자를 '하늘 중의 하늘(天中天)'이라고 하였다. 이는 신들마저 조복을 받는 참된 인간 해방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태자가 태어난 지 닷새가 되자 히말라야로부터 당시 유명한 수도자였던 아시타 선인이 내려와 태자를 뵙고자 했다. 백 살이 넘은 아시타 선인은 백발의 흰 수염을 한 신선의 모습으로, 그의 눈은 지혜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시타 선인은 태자의 얼굴을 살펴보고난 후 슬피 우는 것이었다. 불길하게 생각한 정반왕이 연유를 묻자 아시타 선인은 태자의 앞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왕자님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훌륭한 상호(相好)를 갖추고 태어났습니다. 왕자님은 훗날 성장하셔서 전 인도를 통일하여 덕으로써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걸으시면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늙어 부처님의 출현을 뵐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정반왕은 싯달타 태자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길보다는 장차 자신의 왕위를 계승하여 훌륭한 왕이 되기를 바랐다. 훌륭한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의 일이었다. 태자를 낳은 지 7일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이 세상을 떠나니 어머니를 잃은 태자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이모인 마하파자파티의 양육을 받으면서 총명하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성장하였다. 그리고 정반왕은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딸라 아들이 출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태자의 성 밖 출입을 막고 호화로운 궁궐에서만 머물게 하였다.


3. 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 : 태자는 어느날 교외에 있는 동산으로 놀러가기 위해 마부에게 마차의 채비를 시켰다. 곧 보배수레를 타고 동산으로 향해 가는데, 길을 가던 중에 머리는 희고 이는 빠지고 얼굴은 주름지고 허리는 꼬부라져 지팡이를 짚고 힘없는 걸음으로 숨을 헐떡거리는 노인을 보았다.


이 같은 모습을 보고 태자는 갑자기 울적하고 슬퍼져 놀이에 갈 생각이 사라져 버려 궁중으로 돌아와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다.


“저러한 늙음의 괴로움은 내게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정반왕은 생각에만 잠겨있는 태자를 지켜보고는 더욱더 궁전안에서의 쾌락을 누리도록 하였으며, 그 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 후 태자는 다시 마부에게 명령하여 수레를 장식해서 성밖을 나갔다가 도중에 한 병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몹시 쇠약한 몸에 배가 부었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었는데 혼자 더러운 오물더미 위에 누워 있었으나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으며 심한 고통으로 못내 고통스러워 하며 말도 하지 못했다.


풍요롭고 화려한 성(城) 안에서만 자라던 태자가 성 밖으로 나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실상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기까지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요 부분을 보면,

* 동쪽문으로 나간 태자가 노인을 보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늙고 추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다.

* 남쪽문으로 나간 태자가 쓰러져 있는 병자(病者)를 보고 육신의 고통에 대해 깨닫는 장면이다.

* 서쪽문으로 나간 태자가 상여(喪輿)를 보고 삶의 허무함과 죽음에 대해 깨닫는 장면이다. * 북쪽문으로 나간 태자가 기품이 넘치는 수도자를 보고 출가(出家)를 결심하는 장면 등이 있다.


또 어느날 태자는 마부에게 명령하여 수레를 장식해서 타고 동산을 향해 놀러가다가 도중에 한명의 사문을 만났다. 그 사문은 법의를 입고 발우를 들고 오직 땅만 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태자는 마부에게 이 사람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마부는 “이 사람은 사문입니다” 대답하고는, 사문이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끊고 집을 떠나 도를 닦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감각기관을 잘 제어하며 바깥 욕망에 물들지 않고 자비스런 마음으로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잘 참는 것이 마치 대지와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태자의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이 길이야말로 내가 찾던 길이다. 이 길을 가기로 하자!”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궁전으로 돌아왔다. 이 같은 광경을 보고 성안으로 돌아 온 태자는 올바른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더욱 깊은 사색에 머물렀다.


정반왕은 온갖 방편을 써서 풍류로서 태자의 그 마음을 즐겁게 하여도 모두 헛된 수고로움이었다. 그럴수록 태자는 번뇌를 벗어버리고 맑고 깨끗하게 혼자 살면서 도를 구하려는 마음은 더욱 늘어만 갔다.


4. 유성출가상 踰城出家相(통도사 팔상전) : 성을 넘어 출가하시다.


수행자를 만난 후 태자의 인생관은 점차 변모되었고, 마침내 부왕에게 출가하여 수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정반왕은 크게 놀라 온갖 말로 희유를 하였지만 태자의 결심은 추호의 변동이 없었다. 결국 부왕은 태자에게 왕위를 이을 왕손을 얻기 전에는 출가할 수 없다는 조건을 내세워 같은 석가족인 이웃나라 콜리성의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을 시켰다. 결혼을 하면 마음이 돌아설 것


이라는 부왕의 생각도 해탈의 길을 찾으려는 태자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자 태자는 모든 사람이 잠든 한밤중에 마부 찬다카를 깨워 애마 칸타카를 타고 카필라의 성벽을 뛰어넘어 동쪽 

을 향하여 어둠을 뚫고 달렸다.


"나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많은 중생이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 있지 아니한가.


나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집을 나가는 것이니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오분율>


왕궁이 멀어지자 태자는 말과 마부를 돌려보내고 값비싼 옷을 벗어 사냥꾼의 낡은 옷과 바꾸어 입고 스스로 머리와 수염을 깎은 위 당시의 유명한 수행자들을 찾아 외롭고 힘든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왕위의 자리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 야쇼다라와 아들 라훌라마저 뒤로 한 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 이 날이 태자 나이 29세 되던 해 음력 2월 8일이었다.


싯달타 태자는 결코 일시적인 감정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고심한 끝에 이 출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병듦의 고통이 없고, 늙음의 고통이 없고, 온갖 구속과 장애에서 벗어나 근심과 걱정과 번뇌가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구현할 수 있는 진리를 찾아서 출가한 것이다. 이 때부터 싯달타 태자는 수행자 고타마라고 불렸다.


수행자 고타마는 당시의 유명한 수도자들을 찾아 인도 남쪽의 신흥 공업국가인 마가다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훌륭한 종교가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던 알라라 칼라마의 문하에서 그가 가르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라는 수행을 배웠는데 곧 스승의 경지에 도달해 버렸다. 다시 그는 다른 스승인 웃다카 라마풋타에게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을 배웠지만 그 경지 역시 곧 도달해 버렸다. 수행자 고타마는 스승에게서 배운 선정을 통해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 곁을 떠나 독자적인 수행을 시작하였다.


5, 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 : 태자가 출가해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궁궐로 돌아오라는 청을 거절한 채 설산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요 부분을 보면, * 태자가 출가 후 화려한 옷을 벗어 놓고 스스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자 제석천이 가사를 받치는 장면.* 머리를 깎고 풀방석에 앉아 수행하고 있는 태자를 신하들이 찾아와 궁궐로 돌아 갈 것을 간청하고 있다. *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틀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태자에게 천녀들이 공양을 하고 있다. * 출가 후 6년간의 고행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태자가 중도(中道)의 진리를 깨닫고 강에 들어가 몸을 씻은 후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먹는 장면. 등이 있다.


6. 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선정(禪定)에 들자 부처님의 성도(成道)에 위협을 느낀 마왕 파순이 여러 가지 비술로 방해하는 모습과 석가모니가 마군들을 항복시키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주요 부분을 보면, * 선정 중인 부처님께 마군들이 금강보좌에서 내려가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병 움직이기 내기를 하는 모습이다. 병을 움직이기 위해 마군들의 힘쓰는 모습이 매우 익살스럽게 표현되었다. *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하기 위해 마왕이 열비(悅妃), 희심(喜心), 다미(多媚)의 세 미녀를 보내 노래와 춤으로 유혹하였으나 부처님이 명상에서 깨어나 한번 웃으니 세 미녀가 갑자기 추한 노파로 변해버린 장면. * 세 미녀의 유혹에 실패한 마왕이 1억 8천의 마군을 이끌고 가서 폭력으로 부처님을 항복시키려는 장면이다. 마왕은 보검을 들고 코끼리가 끄는 수레 안에 앉아 있다.


* 마군의 방해를 물리치고 정각을 이룬 부처님이 선정(禪定)한 손을 풀어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지신(地神)에게 증명토록하는 모습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으로 나타내었다. 옆에는 항복한 마군들이 엎드려 빌고 있는 장면 등이 있다.


7. 녹원전법상 鹿苑轉法相(통도사 팔상전) : 진리를 설하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후 한동안 보리수 아래 머물며 삼매에 들어 있었다. 삼매에 든 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를 주저하셨다. 이 때 최고의 신인 범천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중생을 위해 설법해 주실 것을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고 한다. 당시 부처님의 심정은 이렇게 전해진다.


녹원전법상(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장면) :* 무상전각을 이루신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최초로 불법을 설하시는 장면들이 상·하단으로 묘사되고 있다. * 상단에는 노사나불의 모습을 보이신 석가삼존이 처음으로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 하단에는 세존께서 녹야원에 이르러 교진여 등 5인의 비구에게 고·집·멸·도의 사제법문을 설교하는 장면,


* 수달다 장자가 아사세 태자의 동산을 사서 기원정사를 건립하고자 하는 장면,


* 흙장난을 하고 놀던 어린이들이 부처님께 흙을 쌀로 생각하고 보시하자 부처님이 이것을 탑으로 바꾸는 장면 등이 그려지는 것이 보통이다.


"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또 남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상응부경전》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에게 진리를 깨우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로 한다. 범천의 간청에 따라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하고 이렇게 알린다.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려라."


첫 설법은 이렇게 중도와 사성제 등을 설하여 연기의 이치를 가르치셨다. 이것을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한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다섯 수행자 가운데 교진여가 맨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고 곧 나머지 수행자 모두 그 가르침을 이해하여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들이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로 비구(比丘)의 시초이다.


"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라.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잡아함경> 이것을 전도(傳道)선언이라 한다.



10대 제자의 한 분인 사리불과 목련이 제자 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과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 지 몇 년 후에 고향인 가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역시 10대 제자가 된 아난과 라훌라, 아나율, 우팔리 등의 제자를 출가시켰다. 십대제자란 《유마경》에 언급되는 말로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수승한 능력을 가진 열분의 제자를 말하는데 지혜제일 사리불(舍利弗), 신통제일 목건련(目 連), 두타제일 마하가섭(摩訶迦葉), 천안제일 아나율(阿那律), 해공제일 수보리(須菩提), 설법제일 부루나(富樓那), 논의제일 가전연(迦 延), 지계제일 우팔리(優婆離), 밀행제일 라훌라(羅 羅), 다문제일 아난다(阿難陀)등의 열 분의 제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 열 분의 제자들은 불법의 홍포와 전수는 물론 교단의 유지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분들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깨달으신 뒤부터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중인도 지방을 유랑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수행자와 재가자, 귀족과 평민, 노에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셨다.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깨달음에는 빈부귀천이 없기 때문이었다.


8.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 쿠시나가라 니련선하(泥蓮禪河) 사라쌍수(娑羅雙樹) 아래서 80세의 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든 모습을 그린 장면이다.

* 사라쌍수 아래에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서쪽을 향해 오른팔을 베고 누운 후 열반에 든 부처님을 나타내었다. 열반상을 중심으로 여러 제자·보살·신중들이 둘러싸고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 다비일(茶毘日)에 부처님의 관에 불을 붙였으나 전혀 타지 않다가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뒤늦게 도착한 가섭이 관 옆에서 비통해 하자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생사불이(生死不二)의 실상을 보이는 모습이다.


* 가섭의 예배가 끝난 후 화장을 하자 불이 타오르며 불사리(佛舍利)가 수없이 떨어져 이를 받아 모으는 장면. * 다비에 참석한 각국의 국왕들이 불사리를 서로 가져가려 다투자 성연(性烟)바라문과 돌로나(突路拏)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를 여덟 등분하는 장면이다.


(이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탑을 세웠는데 이를 근본팔탑이라하며, 나중에 인도 아쇼카왕에 의해 다시 팔만사천탑(八萬四千塔)으로 건립된다.) 등이 있다.




맺는 말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부처님은 단순히 이 세상에 한 번 왔다 가신분이 아니다. 모든 중생을 깨치고자 서원을 세우고 수억 겁을 거듭나며 수행을 닦은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의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나 오늘을 사는 발심수행자! 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기위해 천상의 영화를 버리고 이 땅으로 내려 오셨다. 그 분이 태어난 곳은 호화찬란한 궁중대궐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길가의 동산 이다. 그래서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가신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부처님의 탄생은 그 자체가 중생의 삶에서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불자들은 중생을 위해 일생동안 헌신하신 부처님을 기리고 그 삶을 본받아야 한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쉼 없이 정진하는 것,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닮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의 그늘진 곳,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곳에 동참하여 대비수고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불자의 자세이다. ................................정법 합장



팔상성도의 해설


-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전각 벽면에는 주로 불·보살상을 비롯하여

석존(釋尊)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성도, 심우도, 경전변상도 등

교화적인 내용과 장식적인 그림 등이 그려진다.

이러한 벽화들은 사찰이나 전각의 성격을 나타내 주기도 하고

동시에 신행자들의 신심을 더욱 불러 일으켜 준다.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과 같은 사찰의 주된 전각 외벽에 가장 많이 그려지는 벽화는

팔상성도와 심우도인데 먼저 팔상성도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팔상성도는 부처님의 일대기로, 태어나서 열반하실 때까지의 중요한 행적(行蹟)을

여덟 단계의 그림으로 표현하였기에 팔상(八相)이라 한 것이다.


부처님의 행적 자체가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은

절대 경계의 보리를 실현한 것이므로 이를 통하여

미혹에 빠진 중생들도 다함께 큰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하나 살펴가보자.

도판은 팔상성도 가운데 첫번째인 ‘도솔래의상’이다.

"본생경(本生經)"에 의하면, 석존께서 인도 카필라라는 나라에 탄생하시기 전에

도솔천에 계셨는데 이름을 호명 보살(護明菩薩)이라고 하였다.


오랜 선정 끝에 호명 보살은 자기가 태어날 시간, 땅, 가계(가문).

심지어 자기를 회임할 어머니까지 결정한다.

호명 보살은 석가족(釋迦族)이 살고 있는

카필라국의 정반왕(淨飯王)과 마야(Maya) 왕비를 부모로 정하고

이제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겪을 모든 시련을 극복할 마음의 준비를 끝낸다.


그리하여 중생들이 기다리는 ‘법(法)’을 가르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했으므로 호명 보살은 도솔천의 신들을

‘가르치고, 깨우치고, 기쁘게 하고, 위로하기’위해

법문(法門)을 설한 후 도솔천을 떠난다.


그렇게 해서 이제 역사적 석존의 전기가 시작된다.

카필라는 인도의 히말라야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로 날씨가 따뜻하고 땅도 기름졌으며 사람들은 착하고 순했다.


어질고 훌륭한 정반왕과 착한 백성들은 근심 걱정없이 평화롭게 살았으나

마야 왕비가 40세가 넘도록 태자를 낳지 못한 것이 한 가지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마야 왕비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눈부시게 흰 코끼리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왕비의 옆구리를 통해 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왕비가 이 꿈을 정반왕에게 이야기했더니 왕은 “그 꿈이 보통 꿈은 아닌 것 같다”고 기뻐하며

다음날 정반왕은 유명한 점술가들을 불러 왕비의 꿈을 풀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점술가들은 “왕자님을 낳으실 꿈입니다.

태어날 아기는 전륜성왕(轉輪聖王;고대 인도의 이상적 제왕)이 되거나

만약 출가한다면 만 중생을 구제하는 붓다가 될 꿈이라고 해몽하였다.


마야 왕비의 꿈이 자신의 뒤를 이어줄 왕자의 잉태를 알리는

좋은 징조라는 말을들은 정반왕과 마야왕비는 매우 기뻐하였다.


위의 몇 가지 내용 가운데 일반적으로 벽화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은

마야 왕비의 꿈에 흰 코끼리를 탄 호명 보살이 나타나 마야 왕비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도판 역시 마야궁의 마야 왕비에게 흰 코끼리를 탄 호명 보살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장면으로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벽화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필자의 의도를 밝히고자 한다.

즉 전 호까지는 도상명을 밝히기 위해서 선묘(線描)로 도해한 도판을 곁들여 설명하였으나

팔상성도 등의 벽화는 그리 복잡하지 않으므로 굳이 선묘 도판까지 곁들인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이렇게 선묘한 도판을 같이 싣는 이유는

사불(寫佛)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밑그림 삼아 신행의 방편으로 삼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 본 벽화 초본을 확대 복사를 하여 요즘 행사를 통해서도 소개되는 '부처님 그리기(寫佛)의

소재로 활용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부처님 일생을 그린 벽화 팔상성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림을 보자.

대웅전이나 극락전 등의 본당 외부 벽화에서 왼쪽의(오른쪽으로 그려 지기도 한다.) 두 번째가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세 번째가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이다.

먼저 비람강생상에 그려지는 내용을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7세기 경,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에 석가족(釋迦族)이 살고 있는 카필라 국이 있었다. 지금의 북부 네팔에 위치한 카필라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업국이었다.

카필라국의 정반왕(淨飯王)은 왕비가 40세가 넘도록 태자를 낳지 못한 것을 늘 걱정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난 후 태기가 있었다. 해산할 때가 가까워지자 왕비는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친정에 가서 아기를 낳으려고 콜리야족(Koliya 族)이 살고 있는 데바다하(Devadaha)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룸비니(Lumbimi) 동산에 이르러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무우수(無憂樹)나무 아래에서

팔 가까이로 늘어진 무우수 나무의 가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바른편 옆구리로 태자가 탄생하였다.


룸비니 동산에는 서기광명(瑞氣光明)이 비추어 덮이고

사천왕(四天王)들은 공경히 태자를 모시려 할 때 태자께서 사방으로 각각 일곱 걸음을 걸으시니

사색(四色) 연화(蓮花)가 솟아올라 태자의 발을 받드는지라

태자는 즉시 오른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쪽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에서나 하늘 아래에서 나 홀로 존귀하네.

온 세상이 모두 고통 속에 헤매이니 내가 마땅히 모두를 편안케 하리라.” 하셨다.


이때에 허공 중에서는 오색채운(五色彩雲)이 일어나고 그 가운데로 아홉 용이 각각 머리를 들어

깨끗한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시키고 하늘 사람들은 공중으로 비단옷을 내려 태자를 입혔다.

왕은 태자의 이름을 싯다르타(Siddhartha;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뜻)라고 지었으며 성(姓)은 가우타마(Gautama)였다.


화계사 대웅전 벽화. 사문유관상 본 벽화 도판 역시 위와 같은 내용을 그리는 일반적인 경우로서, 마야 왕비가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 가지를 붙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잉태하는 모습과 탄생게를 하는 연화 위의 태자를 아홉 용이 물을 토하여 씻기는 모습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다음은 태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문유관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싯다르타는 궁중의 안락과 사치 속에서 성장했다.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슬픔으로부터 격리되어 왔던 태자는

어느 날 성문 밖에서 늙어서 쇠약한 사람, 병들어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죽은 사람을 싣고 가는 상여의 행렬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태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궁중 생활의 허무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후 태자가 곧잘 사색에 빠지자 정반왕은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 등은 일체 태자의 눈에 띄지 않게 하였고, 궁중에 갖가지 향락을 베풀어 아름다운 시녀들과 함께 재미있는 놀이로 즐거운 생활만을 하게 하였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성의 북문으로 나갔다가 세속을 떠난 수행자를 만나게 되었다.

평온한 수행자의 모습을 보고 그는 수행 생활만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어 자신과 야쇼다라(Yasodhara) 사이에 라훌라(Rahula;걸림, 장애)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출가를 결심한다.


이러한 사문유관의 내용을 벽화로 그릴 때는 한 화면에 다 그리기도 하고 또는 도판과 같이, 싯다르타 태자는 시종 찬타카와 흰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막 성문을 나서고 있고 그 주위에 죽은 자의 모습과 좀 더 멀리 나무 아래의 수행자 모습만으로 줄여서 그리기도 한다.


-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벽화의 네 번째는 유성출가상이고, 다섯 번째는 설산수도상이다.

유성출가상의 그림을 보면 태자가 종마 칸타카를 타고 시종 찬다카는 칸타카를 잡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태자가 북문을 나섰을 때 출가 사문의 평온한 모습을 보고 수행 생활만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한 후 부왕에게 아뢰었을 때, 물론 부왕으로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태자로부터 출가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달래고 타일렀지만

이미 반석같이 굳어진 태자의 결심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야쇼다라는 아들을 낳았다.

태자 싯다르타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라훌라(rahula, 장애, 속박이라는 뜻)”하고 한탄하였다.


부모나 부부의 은애(恩愛)도 차마 뿌리치기 어려운 고통인데 이제 또 아들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그 정을 끊기가 비할 데 없이 어려움을 혼자 고백한 말이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이미 결정된 태자는 발길을 돌려 시종 찬다카를 불러 성의 모든 권속이나 일체의 석가족들이 알지 못하게 종마 칸타카를 끌고 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는 시종 찬다카가 데려온 종마 칸타카에 올라 타고 성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카필라 성을 바라보면서 사자처럼 외쳤다.


“나는 이제 차라리 스스로 절벽 위에서

이 몸을 던져 큰 바위에 떨어질지언정,

모든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을지언정,

또한 스스로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않아 죽을지언정,

만약 내가 마음에 다짐한 대로 중생들을 고통의 바다에서 해탈시키지 못한다면 결코 카필라 성에 다시 돌아가지 않으리라” 하였다.


이러한 출가의 장면을 출가의 의미로 상징화하여 성을 뛰어 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수도상은 그야말로 눈덮인 설산의 수하(樹下)에서 혹독한 수행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역시 『불본행집경』이나『과거현재인과경』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표현된 것이다.

즉, 싯다르타 태자는 숲 속으로 들어가 알맞은 곳을 찾아 그 곳에 가부좌를 하고 명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싯다르타는 목이 마르고 몹시 배가 고파왔다.


화계사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에 빛나는 얼굴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황혼이 밀려 오고 이내 차고 어두운 밤이 되어도 싯다르타는 그 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먹고 자는 것을 잊은 혹독한 고행을 훗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음을『남전대장경』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무덤 사이에 죽어 있는 사람의 옷을 벗겨 내 몸을 덮었다.

몸은 쇠약해져 뼈가 드러났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겨 가죽과 살이 절로 떨어졌다.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깊은 물 속에 별이 나타나듯 내 눈은 그러하였고, 내 엉덩이는 낙타 다리 같았다.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닿았다.

낡은 수레가 허물어지듯 내 몸은 모두 허물어져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6년 동안 고행하였으나 그 거룩한 진리를 얻지 못하였다.

그 때 나는 생각했다.

‘이런 쇠약한 몸으로는 진리를 구할 수가 없다. 약간의 음식을 먹고 기운을 되살려야겠다.


’싯다르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네란자라 강으로 가서 몸을 씻고

수자타라는 소녀가 주는 우유죽을 먹고 길상초(吉祥草)를 얻어 깔고는 결가부좌하여 앉았다.


“내 만일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이와 같이 홀로 맹세한 다음 싯다르타는 최후의 좌선에 들어갔다.


설산수도상은 다소 원기를 회복한 싯다르타가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마지막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을 소재로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팔상성도 벽화의 여섯 번째는 수하항마상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불퇴전의 다짐을 하면서 목숨을 건 수행에 들어갔을 때,『과거현재인과경』과『방광대장엄경』의 내용과 같이 갑자기 마왕의 세계가 크게 흔들렸다.


마왕 파피야스(papiyas)는 욕계에 속하는 천상 중에서 최고의 것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왕으로 파순(波旬)이라고 음역한다.

이 마왕 파순이 사바세계를 훑어보니까 보리수 밑에서 사문이 정진을 하고 있는데 그 정진의 힘이 대단히 강해서 마왕의 세계 전체가 흔들린 것이다.


파순은 벌벌 떨면서 그의 대신들과 일천 명의 아들과 모든 권속을 불러 모아놓고서 말하였다.

“세간에 있는 사문 고오타마가 지금 보리좌에 앉아 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여 나의 세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 그의 도가 이루어지기 전에 달려가서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쳐부수어 반드시 그를 항복시켜라.”


이에 마왕 파순은 요염하고 교태로운 아름다움이 모든 천녀들 가운데 으뜸인 세 딸을 보내 유혹하기도 하고, 온갖 마군의 무리를 동원하여 모든 방법으로 사문 고오타마를 향해 공격하였다. 마왕은 아홉 가지 이변(異變)을 일으켜 성도(成道)를 방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벽화의 내용으로 주로 등장하는 장면은, 마왕이 세 딸을 보내 유혹하는 장면과 지신(地神)이 땅으로부터 솟아 증명하는 장면, 그리고 도판과 같이 태자가 마군의 무리에게 “앞에 있는 병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가 너에게 항복할 것이고 만약 움직이지 못하면 너희가 반역을 깨달아 나에게 항복할지니라.” 하니 파순의 대중이 달려들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결국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 등을 그려서 항마를 상징한다.


싯다르타 태자는 일체의 마군을 항복받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자 오직 청정한 한마음으로 경계의 벽을 허물고 덮이었던 세계를 꿰뚫어 모든 것이 조화롭게 드러나는 생명의 참모습(諸法實相)을 여실히 보게 되었다.


그때에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밝은 새벽별을 보는 순간 무상정등정각을 완성하고 큰 소리로 사자후하였다.

“이제 어둠의 세계는 타파되었다.

내 이제 다시는 고통의 수레에 말려들지 않으리.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며 이제 여래의 세계를 선포하노라.”

그래서 수하항마상을 항마성도상(降魔成道相)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녹원전법상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7·7일 동안

삼매의 힘으로 계속 계시면서 해탈락에 머무시다

제석천과 대범천왕의 지극하고도 간절한 권청을 받고

권청하였던 여러 범천과 세상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방광대장엄경』에 보면, “내 이제 그대들의 원을 받아 마땅히 법비를 내려 감로의 문을 열리라. 청정한 믿음으로 귀를 기울이라, 기꺼이 법을 설하리라.”


부처님께서 대범천왕의 간청을 받고 교화할 중생을 낱낱이 관찰하셨다. 옛날 스승이었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가 생각났다.


그러나 천안으로 살펴보니 그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전에 동료였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진리를 설하기로 마음을 정하셨다.

이때의 정황을 [불본행집경] 제33권「범천권청품」을 통해서 보면,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셨다.

다섯 수행자가 있으니 그 다섯 수행자들은 전날 나에게

큰 이익을 주었으며 내가 고행할 때 나를 받들어 섬겼도다.

그들 다섯 수행자는 모두 청정하고 지혜가 날카로워 나의 최초의 법바퀴를 굴리며 설하는 바, 묘법을 받들 만하여 나를 어기지 않으리니 나는 이제 그 다섯 수행자들에게 가서 처음으로 설법하리라.


이때 부처님은 청정한 천안(天眼)으로 그 다섯 수행자들이

현재 저 바라나시 성(城) 녹야원에서 수행하는 것을 보셨다.

그때 부처님은 보리수에 얼마쯤 머무시다가 바라나시 성으로 향하셨다.


”녹원전법상은 이렇게 녹야원(鹿野苑:사슴동산)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법을 처음으로 설하시는 장면을 그리는 것으로 거의 모든 벽화가 구도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으나 내용은 동일하다.


설법하시는 부처님과 법을 듣는 다섯 수행자, 그리고 설법 장소가 녹야원임을 상징하는 사슴이 아름다운 배경과 함께 그려지는 것이다.



-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이번에는 팔상도 벽화 중 마지막인 쌍림열반상이다. 쌍림열반상은 열반적정상(涅槃寂靜相)이라고도 한다. 이는 열반이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그 뜻이 ‘불어서 끈다.’ 즉 번뇌의 불꽃을 끈다는 적멸(寂滅)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열반은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으로 나누어 이야기 한다. 유여열반은 일체를 극복하고 초월하였으나 육신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육체의 고통은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육신은 죽음을 통해 무상의 진리를 자각케 하기 위한 가르침으로 사용하신다.

이 육신의 고통 또한 모두 여읜 부처님의 죽음을 무여열반이라 한다.

이는 육신의 허망함을 보이고 존재의 본원으로 돌아가는 구원의 실상이므로 곧 삶의 완성이다.


일대사인연으로 사바세계에 화신으로 나투시고 이렇게 육신의 한계를 버림으로써 진리의 법신으로 온 중생에게 크나큰 광명의 빛으로 가피를 주시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마가다국의 우루벨라 마을에 있는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한 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법륜을 굴리신 이래 45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으시고 중생의 고통을 해결하여 주셨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은 왕사성에서 시작된다.

80세가 되던 해, 왕사성의 영취산을 뒤로 하고 북쪽으로 길을 정했다. 나란다에서 잠시 머문 후 바이샬리에서 여름 안거(安居)를 보내고 쿠시나가라로 향했다. 그 동안 곳곳에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셨다. 부처님은 바이샬리를 떠나면서 아난에게

“이로써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되리라.”고 하였음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나온다.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 이르러 사라(沙羅)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난에게 자리를 깔도록 한 후 머리를 북으로 두고 서쪽으로 향해 사자처럼 누워서 정념(正念), 정지(正智)에 머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가르친 법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되리라. 비구들아, 나의 가르침에 의문이 있으면 물으라.” 모두 묵묵히 있었다. 그 때 아난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조금도 의문이 없습니다.”

“비구들아 너희들에게 말하리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 간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

그리고는 조용히 무여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이 반열반에 드심은 하나의 완성으로, 시작이 없고, 변화가 없고, 소멸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상태이다.

이는 논리나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고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유해는 다비장으로 운구되어 화장용 장작에 불을 붙였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그 때 상수제자 가섭 존자가 마갈제국에 있다가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부처님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관 속에서 두 발을 내어 보이신 후 장작에 스스로 불이 붙었다.


팔상전(八相殿 또는 靈山殿)에 모셔지는 팔상탱화의 쌍림열반상에는 쿠시나가라 성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서 열반 하시는 장면,

다비 후 사리를 나누는 장면, 가섭 존자에게 관 속에서 양발을 내어 

보이는 모습, 마야 부인이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도솔천에서 하강하여 부처님의 열반 체험에 대한 설법을 듣는 장면,

스스로 화광삼매에 드시어 관을 태우시는 장면 등이 도설(圖說)되어 있다. 그러나 외벽에 그려지는 쌍림열반상 벽화는 그 가운데 가섭 존자에게 발을 내보임으로써 삼처전심(三處傳心)을 완성하는 모습을 소재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나라에 팔상도가 언제부터 그려졌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조선 후기에 그려진 팔상도가 웬만한 전통사찰이면

모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오래 전부터 예배 공양을 목적으로,

또는 교화의 목적으로 팔상도가 성히 그려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론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따마 붓다의 일생을 파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고따마 붓다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은 경전들 여기저기에 부분적으로 흩어져 전해지는데다가 더욱이 역사적인 사실과 설화가 뒤섞여 있고, 후대의 전적일수록 역사적 존재로서 붓다의 모습보다는 신화적인 모습들이 더욱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따마 붓다의 전기를 읽을 때, 저자에 따라 붓다가 다양한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어떤 자료를 어떤 시간에서 선택하느냐에 따른 결과라 하겠다. 우리 주변에는 고따마 붓다를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신심이 부족한 것처럼 보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적 존재인 고따마 붓다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게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신심을 정립하는 것이요, 바른 신행의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은 역사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누구의 삶도 사회의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 고따마 붓다의 삶도 그가 태어난 역사와 사회를 배경으로 펼쳐지고, 그의 삶을 반영하는 가르침 역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라는 구체적ㅇ니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가  어떠한 변동기에 있었으며, 고따마 붓다와 교우했던 이들과 그들이 처한 환경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본론 


#붓다는 신이 아닌 '길을 가리키는 사람'

고따마 붓다가 태어난 시대는 봉건적 세습 군주국가에 의해 공화정을 펼치던 부족국가가 정복되어가는 정치적 격변기였으며, 제2의 계급에 속했던 캇띠 아들이 바라문들의 명목상 권위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 시기였다. 또한 강가강 중류 지역에서 점차 농업과 상공업의 발달로 제3의 계급에 속했던 평민들 가운데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이들이 사회적 실력자로 부상하는 시대였으며, 고대 인도의 사상계가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갈라져 극한적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혼돈의 시대였다.


이처럼 고따마 붓다는 마치 혁명이라도 일어날 듯한 격변의 시대에 태어났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조차 없는 격변과 혼란의 한 복판에 태어난 붓다는 이미 극한 대립을 조절하고 화해시켜야 할 역사적 사명을 떠안고 온 셈이다. 붓다가 말한 중도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이 땅의 대부분 불자들이 가지고 있는 불교신행은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 고따마 붓다가 가르친 삶의 방식을 체험을 통해 자기화 하기 보다는 신격화되고 초인화된 붓다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마디로 불교학이라기보다 불교신학의 성향이 짙다. 고따마 붓다에 대한 신학적 접근 방식은 신앙심에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교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불러왔다. 불교의 신학화야말로 불교 타락의 그치라 하겠다.


고따마 붓다를 직접 만난 사람들에게는 고따마가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각자로서 위대한 스승이요, 출가한 이들의 단체인 상가의 창설자요, 상가의 후원자들인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를 조직한 지도자였다. 당시의 불교도에게는 우상숭배도 없었고, 출가자에게는 사제의 역할도 없었다. 붓다는 선각자로서 '길은 가리키는 사람일 뿐' 신이 아니었다.


라자가하에서는 시자 우빠와나에게

내가 지금 풍으로 척추가 아프니, 너는 지금 성으로 들어가 따뜻한 꿀물을 조금 구해오라'고 했고, 아난다에게

'지금 나는 늙어빠진 노인이라 머지않아 갈 것이다. 나는 인생행로의 끝에 도착했고, 생의 한계를 맞고 있다. 내 나이 80을 넘지 않았느냐, 나는 이제 쉬고 싶을 뿐'이라 했듯이 붓다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제자 왓깔리가

'나는 오랫동안 부처님을 가까이서 뵙고 싶었는데 몸에 병이 들어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자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육신을 보아서 무엇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볼 것' 이라 하여 오직 붓다가 깨달은 법을 터득하는 것이 붓다를 만나는 유일한 길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붓다를 신처럼 보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인도 대륙 남쪽 앗싸까국에서 멀리 마가다의 라자가하까지 찾아왔던 16명의 수행자들이



'저 분은 혹시 신이 아닐까?'라고 의심했었고, 꼬살라국의 웃깟타에서 세따비아로 가는 길에 만났던 바라문 도나도

'당신은 신이 되셨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붓다는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이

'붓다는 금강신이라 하던데 늙고 병들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진리의 체현자인 나에게도 늙고 병들며 죽은 일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지금 나 역시 사람일 뿐이다. 아버지는 숫도다나요, 어머니는 마야시며, 캇띠야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일 뿐'이라 했다.


붓다 그분을 신처럼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붓다 자신이 말했듯이 인간일 뿐이라고 볼 것인가. 붓다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더 이상 번민하지 않으면서 대자유의 삶을 누리는 지혜를 성취한 인간이기를 원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중생들의 마음은 지상의 인간이 아닌 신으로 그리려고 했다. 붓다에 대한 존경심이 그려내는 아름다움이겠지만 붓다에 대한 실체적 접근에는 큰 장벽이 된다. 


 #붓다의 인간적인 삶이 더욱 위대하다

붓다가 위대하다는 것은 누구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위대함은 오히려 붓다에 대한 시기질투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붓다에 대한 시기질투는 붓다를 모함하고 살해하려는 사악한 행위까지 불러왔다. 반대세력의 모함은 붓다가 겪게 되는 아픈 시련이었는데, 사람들은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는데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붓다는 정말 위대한 존재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져볼 수도 있지만 그의 삶을 지켜보면 붓다의 위대성에 더 이상 의심의 눈초리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업보 자체를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라 할지라도 인과의 이치를 초월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자신이 행한 업에 대한 대가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인과의 필연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인과응보를 강조함으로써 어떤 사람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말하게 된다.

용수는 붓다가 인과의 굴레를 넘지 못하고 겪어야만 했던 고통스러웠던 일 아홉 가지를 들고 있는데

1. 순다리 변사사건 (외도들이 죽여 놓고 붓다에게 뒤집어 씌우려 함)

2. 찐짜마나위까의 거짓 임신 사건 (사람들 앞에서 붓다가 임신시켰다고 외치다가 옷베 등으로 배를 부르게 했던 것이 드러나  임신하지 않았으며 외도들이 시켜서 했다고 고백함)

3. 데와닷따에 의해 발에 상처받은 사건(사촌 형인 붓다를 살해하고 자신이 교주가 되려고 산에서 돌을 굴렸는데 그 파편이 날아와 다침 발등을)

4. 걸식하다가 나뭇 가지에 발이 찔린 사건(나만큼이나 주의가 부족한 면도 있으셔 ㅋㅋㅋ)

5. 위두다바의 샤까족 몰살 사건(첩인 종에게 난 딸을 이웃 나라 왕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앙심 풀이)

6. 웨란자에서 말먹이를 먹어야 했던 사건

7. 찬바람으로 척추를 앓았던 일

8. 성도전의 6년 고행

9. 빤짜살라 마을에서 걸식하지 못한 일

10. 웨살리의 고따마까 쩨띠야에서 동지 전후 8일 밤을 세벌의 가사로 추위를 견뎠던 일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역사 속의 붓다는 실화 속의 붓다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불교를 믿으면서 '부처가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불교의 위기는 교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 따라서 '고따마 붓다, 그는 진정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불교의 교주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구도와 자비실천의 일생 본받아야

고따마 붓다의 80평생을 간단히 말하면 깨달음을 얻기 전의 구도의 과정과 깨달음을 얻은 후의 자비 실천의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가 되기까지의 삶, 즉 구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숫도다나의 아들로 태어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다가 29살에 출가하여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존재의 실상을 눈뜨기까지의 삶은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구도의 길에 나섰는가를 말해준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볼 때, '엄연한 사실은 있는 그대로 직관하기 위해 욕망을 떨쳐내는 과정'이었으니,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었고, 지혜를 완성하는 길이었다. 한마디로 욕망에 가득찬 기대감을 떨쳐버리는 비움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붓다가 깨달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말 자체가 무엇인가 없었던 것을 있도록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있었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이요, 그것은 '있는 사실 그대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여실지견이 바로 붓다의 깨달음을 번역한 말이다. 그 '알고 보는' 깨달음이 보편성과 타당성을 가졌기에 등정각이라 하고, 정변지라 했다.


 #깨달음은 '있는 사실 그대로 알게 되었다' 는 뜻  

 붓다가 말하기를 '붓다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이 법은 상주하는 현상계에 존속하는 이치이며, 현상계의 근원적인 원리로서 붓다인 내가 스스로 깨닫고 알아서 보편타당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했던 것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사실 그대로'가 현상계요, 현상계는 고정되어 있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 수시로 바뀌고 변하는 역동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어떻게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여)'고 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을 때의 마음 상태를 멸진정이라 했는데, 그것은 몸뚱이의 상태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느끼는 감각적 느낌(수)이나 그 감각적 느낌을 가지고 지각하는 것(상)을 모두 떨쳐 없애 버린 무념무상의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무심이다. 그러니까 붓다가 깨달았다는 것은 무심으로 보고 무심으로 알았다는 것인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을 말하고, '안다'는 것은 사고가 만들어 내는 이름과 문자의 세계(명)를 말한다. 그러니까 고따마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과정은 결국 5온에서 말하는 수와 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고따마 붓다가 깨달았다는 것은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내 목전에 펼쳐지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직관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통해 세상을 보거나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붓다는 그 선입견을 '욕망에 가득찬 기대감'이라 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는 말이다.


 #붓다는 생사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

붓다는 어떤 분인가? 이제 인도인들은 그토록 고대했던 붓다라는 이가 어떤 분인지를 고따마 붓다의 입을 통해 알아보자.

한 바라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붓다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바라문아, 중생의 길고 긴 역사를 관찰해 보니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직면하는 고뇌는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객관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 내면적으로 망상에 매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독화살과 같은 번뇌를 없애버렸으니 생과 사의 문제에서 초래되는 갈등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대서 나를 붓다라고 말한다."



붓다란 어떤 존재인가를 붓다 자신의 말을 통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붓다는 분명 역사 내적 존재이지 초월적 존재가 아니었다. 초월적 존재로 보려는 것은 신앙심의 발로이겠지만 그러한 마음만으로는 붓다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다음의 삶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다. 구도의 길에 들어선 싯닷타의 삶이 천둥번개가 치고 폭포수가 내리쏟는 듯한 치열한 투쟁의 삶이었다면 정각한 후의 붓다의 삶은 잔잔하고 평온한 자애가 흘러넘치는 성자의 삶이었다. 전반부는 오직 지혜를 완성하는 길이었다면 후반부는 성자의 잔잔하면서도 그칠줄 모르는 사랑의 실천과정이다.


 #정각 후의 삶은 사랑의 실천 과정

성자로서 붓다의 삶은 자비심에 충만한 인간애의 분출이었다. 그의 인간애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깨달음을 얻은 이의 양심의 발로이자 새로운 시대적 사명에 눈뜬 것이다. 붓다로서의 그의 삶은 무지와 맹목의 굴레에 갇혀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였으며,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은 오직 지적 성숙뿐임을 알아 그칠 줄 모르는 가르침으로 나타났다.


여든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임종의 날을 향해 천리 길을 걸으면서 자비에 가득찬 말씀을 나누었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자신을 뵙고자 하는 이면 그가 누구이던 가리지 않고 가르침을 주었다. 29살에 출가하고, 6년간 수행해서 35살에 성불한 붓다는 만 8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45년간 오로지 전법의 길 위에 서 있었다. 80평생 중 가장 긴 기간 동안 전법을 한 것이다. 이러한 전법을 통해서 불교는 새로운 인도사회의 사회운동, 정신운동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한 점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에서도 중요하지만, 그 분이 깨달음을 얻고 평생 노구를 이끌고 설법의 길에 나섰다는 점이다.


붓다는 와라나시에서 60명의 제자들은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비구들아, 나는 신들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도 역시 신들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법을 전하러 가자. 다른 마을로 갈 때,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이치에 맞게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전하라. 원만 무결하게 청정한 범행을 설하라. 중생들 가운데는 번뇌가 적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하면 악에 떨어질 것이나 법을 들음으로 성숙해질 것이다. 비구들아 나도 법을 전하기 위하여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서 설법하리라."


 이 전도선언은 불교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여기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붓다와 비구들은 동일한 자격으로 전도에 나선다는 것이요.

둘째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번민에 빠져있는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나선다는 것이며

셋째는 한 사람씩 흩어져 가라고 했으니 불법을 전파하고자 하는 길에는 저항이나 박해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넷째는 감정에 호소하여 절규하는 예언자적 태도나 권위를 앞세워 맹목적으로 따르게 할 것이 아니라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섯째는 출가 희망자가 있을 때는 현지에서 입문시키라는 것이며

여섯째는 붓다 자신도 홀로 전도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붓다의 전도선언이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당시 바라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법으로 전수에 온데 비하여 붓다는 자신의 깨달음을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붓다 이후 불교역사의 전개는 바로 이 전도선언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고따마 붓다가 이 세상에서 법음을 전하다가 최후를 마친 것은 서력 기원전 486년의 일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일 뿐이고,그 분의 역사적 존재의미는 기원전 486년의 사건과는 관계없다. 오늘의 불교도들의 마음에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붓다는 우리 앞에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지만 불교도들이 붓다의 정신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분은 벌써 죽어버린 것이다.


 #출가정신 없다면 수행자 아닌 사제

불교도는 붓다의 부활을 희구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구현하기를 바랄 뿐이다. 고따마 붓다가 중생의 현실에 살아 있느냐 죽어버렸느냐는 기원전 486년의 사건에 달린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불교도들의 마음자세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붓다가 오늘의 불교도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려면 그 분의 삶을 생생하게 조명하고, 그 분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우고 있는가를 늘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만 한다.


우리가 알아야할 붓다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따마 붓다이다. 붓다는 자신의 시대가 안고 있는 온갖 모순과 불합리를 깊이 통찰하고 그것을 일깨우고 개선하는데 앞장섰던 역사적인 존재였다. 교리적으로 말하는 붓다는 초역사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초역사적인 존재로서 붓다에게는 생로병사도 없고 깨달음의 극적인 순간도 없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초역사적인 존재로서 붓다를 생각한다면 그의 불교는 이미 역사를 벗어나게 된다. 역사를 벗어난 불교는 신학화된 불교에 지나지 않는다. 신학화된 불교에서는 승려는 고따마 붓다의 뒤를 잇는 수행자가 아니라 사제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이 땅의 많은 출가자들이 사제의 역할에 매달려 있을 뿐 붓다의 정신으로 살려는 몸짓은 적어 보인다. 바로 이것이 한국불교의 위기이다.


사찰의 수가 적고 규모가 작아서 불교가 중흥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아무리 사찰이 허름하고 작더라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출가자의 정신이 살아 있다면 불교는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 사찰의 규모는 거창하고 화려한데 그곳에 살고 있는 출가자들의 정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존경해 마지 않는 고따마 붓다 역시 죽어버린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불교를 중생의 역사에서 생동하는 삶의 가치로 되살려 내려면 신학화된 불타관에서 벗어나 인간 고타마 붓다의 진면목을 읽어내야만 한다.


 #붓다와 만남은 현재 진행형이어야

우리가 찾는 붓다는 불전에 안치된 우람한 불상도 아니요, 우상화되고 신격화된 붓다도 아니다. 자신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인간 고따마 붓다이다. 붓다의 삶은 붓다 자신의 존재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붓다의 삶은 붓다가 살았던 구체적인 역사 상황을 통해서 읽어야 한다. 다시말해 고따마 붓다와 오늘 우리의 만남은 항상 새롭고 신선미가 넘치는 현재 진행형이어야 하고, 글과 머리로 만나는 건조함이 아니라 삶과 가슴으로 만나는 온전함이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삶도 그가 놓인 구체적 상황에서 전개되는 활동일 뿐 정형화된 어떤 패턴이나 모델이 있을 수 없다. 패턴을 짜놓고 거기에 맞추려고 한다면 역동적인 생생한 삶이 아니라 관념화되고 박제화된 죽은 삶이되고 만다. 고따마 붓다의 삶을 생생하게 읽어내고, 그를 본받고자 하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사는 것이 불자다운 삶인가 모색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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