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간
(1) 깨달음의 공통 기반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동시에 부처가 되는 길을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부처란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고 잘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현저하게 다른 인본주의적 종교가 된다. 부처는 신 또는 초인적 존재가 아니라, 지상에서 태어나 지상에서 그 육신을 소진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된다. 이렇게 부처가 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처가 되는 길을 가르친 것이 불교이다.그러므로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최대의 관건은 바로 그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최대의 관건이라면, 이 깨달음을 단번에 쉽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깨달음을 이해하기란 요원한 일이라고 속단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단번에 쉽게 얻지 못할 바에는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지나친 욕심의 발로이다.
본격적으로 수행에만 전념하는 경우라면, 깨달음을 얻는 데 반드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어떠한 경우든 깨달음의 핵심이 되는 공통의 기반을 건너뛰고서는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거나 실천할 수는 없다. 이 기반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서 곧장 깨달음 자체로 접근하고자 할 때, 불교의 교리가 명쾌하게 이해되기보다는 더욱 모호해지거나 난해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불교의 기초 교리는 깨달음의 공통 기반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중급 또는 고급 교리를 별도로 제시한 경우라도 이것들은 그 공통 기반에서 벗어나지는 않고, 연관된 문제를 확장하여 더욱 치밀하게 탐구하여 설명한다.
깨달음의 공통 기반이란 깨달음의 기본 주제를 가리킨다. 기본 주제인 만큼 이것을 이해하는 데도 간명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느끼듯이 ‘깨달음’이라는 말은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라고 한정하여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관념의 중압감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이 불교의 목표로 설정된 탓으로 그 의미를 한정하여 말하기 곤란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깨달음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막연한 관념으로 설정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적어도 개념상으로는 명료하게 설정되어 있다. 부처를 ‘깨달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단어 설명일 뿐이다. 부처가 도달한 깨달음의 상태를 지시할 때, 부처는 ‘고통을 극복한 자’ 혹은 ‘고통을 여읜 자’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부처의 깨달음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이며, 부처의 삶이란 ‘고통을 여읜 삶’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행복이나 안락의 불교적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깨달음의 기본 주제는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고통은 물론 인간의 고통이고, 부처가 되기 이전에 석가모니라는 인간이 겪은 고통이며,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겪는 고통이다. 불교는 결국 인간의 고통이 왜, 어디서, 어떻게 유래하는지를 관찰하여, 그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하게 사는 길을 제시한다. 이처럼 고통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서 불교가 출발했다는 것은, 불교가 인간학으로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고통의 실상을 파악하는 일은 곧 인간 자체를 이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깨달음의 일차적인 대상이며, 이에 대한 이해가 깨달음의 공통 기반이다.
깨달음의 일차적인 대상은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의문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인간과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으로 연장된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을 하나로 묶으면, 인간은 세계라는 주변 환경과 어떠한 관계로 살아가는가 하는 의문이 된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는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흔히 사회로 불리는 인간 공동체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사는 터전으로서 자연으로 불리는 환경 세계이다. 흔히 세계라고 말할 때는 이 중에서 후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제 깨달음의 주제는 인간, 사회, 세계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와 세계라는 주제도 인간이라는 주제에 귀속된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사회와 세계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는 것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불교에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같다. 불교는 인간을 설명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의 행동을 가르친다. 이 설명과 가르침에서는 신과 같은 초인적 존재를 내세워 무작정 따르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반성을 통해 각성할 수 있는 경험을 내세워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불교가 인간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교를 인간학으로 이해하는 시각에서는 먼저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라고 묻고, 이에 대한 답을 불교에서 찾는다. 여기서는 초세간적인 세계를 앞세우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이는 세속의 인간에 대한 배려가 불교의 시발이라는 사실을 유념하기 때문이다.
인간학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의 전체 역사에서 전개된 교리와 사상을 모두 끌어낼 필요는 없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불교의 가치를 인식하고 지향하여 일상 생활에서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불교 입문이 될 것이다. 이 같은 불교 입문에서는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실천 원리를 제시하는 데 중요한 교리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2) 불교 인간관의 기본 시각
세계의 여러 종교 중에 불교만큼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는 없다.
불교는 인간의 현실과 본질을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의지로써 설명하지 않으며, 운명으로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로 살고 있다는 시각은 어느 종교나 일치한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이유와 이의 극복 방안을 인간 자체에서 찾고 있는 종교가 불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인간관과 비교해 보면, 기독교는 인간을 ‘원죄의 존재’라는 일관된 입장에서 취급하는 반면, 불교는 인간을 무명(無明) 즉 무지의 존재로 파악하고 오직 인간 스스로 그 무지를 제거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정의와 진리를 배반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물주인 여호와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여기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신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죄악에 떨어진 사실을 가리켜 ‘원죄’로 일컫는다. 그리고 이후의 인류는 모두 필연적으로 조상이 저지른 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규정한다. 이것은 일종의 숙명론적인 인간관이다. 이러한 인간관에서는 오로지 참회하고 신의 은총을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이에 대해 불교에서 말하는 무지는 기독교의 원죄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대비되기는 하지만, 숙명론적인 순응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과 세계의 실상에 대한 자각을 유도한다. 무지란 탐욕이나 증오와 같은 그릇된 감정의 폐단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것에 빠져 있는 망상이다.
인간이 무지의 상태에 있다는 점은, 우리가 현실을 냉철하게 응시하고 반성함으로써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무지는 인간이 스스로 짊어진 멍에이며, 자신의 수행을 통해 자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바로 여기에 불교 특유의 인간관이 있다. 이로부터 불교는 크게 세 가지 시각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첫째, 인간은 의지적 존재이다. 불교는 외도(外道)의 숙명론적 인간관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고 강조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신이나 운명에 의해서 또는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서 초래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불교는 이 자유 의지에 따른 삶의 다양성을 업과 윤회로 설명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편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한다. 이런 본능적 욕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극복하려는 의지에 선행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유혹이나 강압에 쉽게 무너지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하기 일쑤이다. 난관을 스스로 극복할 역량과 의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통으로 덧없이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대승 불교의 정토 신앙은 이처럼 나약한 인간을 배려하여 쉬운 구제의 방도로 전개되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고통이 결국 자기 자신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궁극적 원인이 무지라고 깨달을 때,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 능력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깨닫는 데서 발휘된다. 대승 불교는 인간이 지닌 이 능력을 불성 또는 여래장으로 파악한다. 불성이나 여래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지를 극복하는 본래의 능력’이다.
이상의 시각 중에서 둘째는 인간의 현실을 직시한 것이고, 첫째는 그 현실을 초래하는 원리를 직시한 것이며, 셋째는 현실 타개의 근원을 직시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순수한 본성, 즉 능력을 의지적으로 개발함으로써 고통을 해소하는 존재이다.
후대의 중국 선종에서 자신의 본성을 바르게 직관하는 것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중시된 것도 이 같은 인간관의 귀결이다. 선종에서 말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는 매우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 취지는 부처나 조사의 경지가 나를 벗어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을 초월한 어떤 절대자 또는 부처가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내가 본래부터 부처라는 인간 본위의 자각과 기개를 강조하는 것이다.
(2) 불교 인간관의 기본 시각
세계의 여러 종교 중에 불교만큼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는 없다.
불교는 인간의 현실과 본질을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의지로써 설명하지 않으며, 운명으로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로 살고 있다는 시각은 어느 종교나 일치한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이유와 이의 극복 방안을 인간 자체에서 찾고 있는 종교가 불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인간관과 비교해 보면, 기독교는 인간을 ‘원죄의 존재’라는 일관된 입장에서 취급하는 반면, 불교는 인간을 무명(無明) 즉 무지의 존재로 파악하고 오직 인간 스스로 그 무지를 제거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정의와 진리를 배반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물주인 여호와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여기서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신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죄악에 떨어진 사실을 가리켜 ‘원죄’로 일컫는다. 그리고 이후의 인류는 모두 필연적으로 조상이 저지른 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고 규정한다. 이것은 일종의 숙명론적인 인간관이다. 이러한 인간관에서는 오로지 참회하고 신의 은총을 믿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이에 대해 불교에서 말하는 무지는 기독교의 원죄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대비되기는 하지만, 숙명론적인 순응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과 세계의 실상에 대한 자각을 유도한다. 무지란 탐욕이나 증오와 같은 그릇된 감정의 폐단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것에 빠져 있는 망상이다.
인간이 무지의 상태에 있다는 점은, 우리가 현실을 냉철하게 응시하고 반성함으로써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무지는 인간이 스스로 짊어진 멍에이며, 자신의 수행을 통해 자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바로 여기에 불교 특유의 인간관이 있다. 이로부터 불교는 크게 세 가지 시각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첫째, 인간은 의지적 존재이다. 불교는 외도(外道)의 숙명론적 인간관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고 강조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신이나 운명에 의해서 또는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서 초래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불교는 이 자유 의지에 따른 삶의 다양성을 업과 윤회로 설명하는 것이다.
둘째,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편하고 즐거운 것을 추구한다. 이런 본능적 욕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극복하려는 의지에 선행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유혹이나 강압에 쉽게 무너지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하기 일쑤이다. 난관을 스스로 극복할 역량과 의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통으로 덧없이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대승 불교의 정토 신앙은 이처럼 나약한 인간을 배려하여 쉬운 구제의 방도로 전개되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구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고통이 결국 자기 자신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궁극적 원인이 무지라고 깨달을 때,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이 능력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깨닫는 데서 발휘된다. 대승 불교는 인간이 지닌 이 능력을 불성 또는 여래장으로 파악한다. 불성이나 여래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지를 극복하는 본래의 능력’이다.
이상의 시각 중에서 둘째는 인간의 현실을 직시한 것이고, 첫째는 그 현실을 초래하는 원리를 직시한 것이며, 셋째는 현실 타개의 근원을 직시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순수한 본성, 즉 능력을 의지적으로 개발함으로써 고통을 해소하는 존재이다.
후대의 중국 선종에서 자신의 본성을 바르게 직관하는 것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중시된 것도 이 같은 인간관의 귀결이다. 선종에서 말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는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는 매우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 취지는 부처나 조사의 경지가 나를 벗어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을 초월한 어떤 절대자 또는 부처가 자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내가 본래부터 부처라는 인간 본위의 자각과 기개를 강조하는 것이다.
(3) 인간의 조건
부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자마자 “하늘의 위에서든 아래에서든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 하고 말했다는 것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제일이라는 오만함을 드러낸 것처럼 들리기 쉬운 이 말을 교리 해설가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천명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어떻게 이런 설명이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갓 태어난 부처님이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전기 작가가 부처님 탄생의 의의를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 존귀한 ‘나’란 부처님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 부처님이 태어난 것이므로, 그 분은 홀로 존귀하다. 그런데 그 분은 처음부터 부처님인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평범한 중생으로만 살게 될 것이라면, 그 탄생을 존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부처가 될 것이므로 그 탄생은 존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부처가 될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다.
이 같은 부처님 탄생의 의의를 모든 인간에게 적용한 데서 인간의 존엄성은 성립된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태어난 점에서 존귀하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상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가능성을 최초로 실현하여 증명하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그 가능성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여 항상 더 나은 상태로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능력으로 발휘된다.
불교에서 설정한 여러 가지 윤회의 양태로 보면, 인간이 최고의 위치에 있지는 않다. 6도(道) 또는 6취(趣)로 불리는 윤회의 여섯 가지 양태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天)이라는 중생 세계이다. 처음에는 이 중에서 아수라를 제외하여 5도 또는 5취라고 불렀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배열한 이 양태에서 인간은 천보다 낮은 단계에 위치한다. 천이란 천상 세계에 사는 신과 같은 존재이며, 해탈하지 못한 인간, 즉 부처가 되지 못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이다. 이러한 윤회의 양태로 보면, 중생은 인간으로 태어나서야 천상 세계로 가거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인간이 존귀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큰 행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에서는 인간이야말로 최고의 생명체라는 생각을 애써 내세우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받기는 어렵다.”라고 말하여,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매우 희귀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경전에서는 예를 들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우둠바라 꽃, 즉 우담화(優曇華)가 3,000년에 한 번 피어나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이보다 더 실감 나게 인간으로 태어나는 인연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맹구부목(盲龜浮木)이라는 비유가 있다.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궤짝이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고, 100년이 지나서야 겨우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눈먼 거북이가 있다. 그런데 그 거북이가 바다 위로 떠오를 때, 마침 거기를 떠다니고 있는 궤짝의 구멍 속으로 올라와 쉴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은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희귀한 우연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눈먼 거북이가 궤짝의 구멍 속으로 떠오르는 것만큼 희귀한 일이라는 것이 맹구부목의 비유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처럼 희귀한 행운이지만, 이 행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데에는 인연이 있으며, 이 인연을 조성하는 것은 선한 업이다. 여러 불전들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업을 보통 열 가지로 제시하는데, 이것을 10선업이라고 한다. 10선업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① 생물을 살상하는 살생(殺生). ② 타인의 소유물을 훔치는 투도(偸盜). ③ 간음으로 남녀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사음(邪婬). ④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망어(妄語). ⑤ 실없고 잡된 말을 하는 기어(綺語). ⑥ 말로써 욕하거나 멸시하는 악구(惡口). ⑦ 이간질하는 양설(兩舌). ⑧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탐욕(貪欲). ⑨ 노여움으로 증오나 혐오에 빠지는 진에(瞋恚). ⑩ 그릇된 견해에 빠지는 사견(邪見) 또는 우치(愚癡).
이상의 10악업은 10불선업으로도 불린다. 이것들은 몸과 말과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해치고 인간 사회를 어지럽히는 악행의 근본이다. 앞의 셋(살생, 투도, 사음)은 몸으로 짓는 신업이고, 중간의 넷(망어, 기어, 악구, 양설)은 말로 짓는 구업 또는 어업이며, 뒤의 셋(탐욕, 진에, 사견)은 생각으로 짓는 의업이다. 이 10악업은 인간 세계를 파탄시키는 원인이다. 따라서 10악업을 저지른 중생이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할 것임은 당연할 것이므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은 10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10선업이란 이 10악업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37에 의하면, 최소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10선업이다. 여기서는 10불선업을 저지르면 지옥에 태어나고, 설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온갖 고난을 받으며, 10선업을 준수하면 천상에 태어나고, 설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온갖 고난을 면한다고 설한다. 즉 10선업은 안락한 인간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 조건이며, 천상에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다른 경전에도 이 같은 법문이 있다. 부처님이 수가 장자에게 업보를 차별하여 설한 경전, 즉 불위수가장자설업보차별경(佛爲首迦長者說業報差別經)에 의하면, 10선업을 준수하였으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보를 얻는다. 즉 10선업을 실천하면, 번뇌가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 경전의 취지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 생활에서 10선업을 고스란히 준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5계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점에서 보면 5계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 될 것이다. 10선업을 지키면 천상에 태어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설하는 경전의 취지도 5계를 중시하는 데 있다. 후대에 중국의 법림(法琳) 스님은 변정론(辯正論) 제1에서 이 취지를 잘 파악하여, 5계를 지키면 인간의 몸을 받고 10선을 실천하면 천계의 과보를 얻는다고 설명했다.
결국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의 조건은 5계와 10선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둘을 구분하자면, 5계는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인 데 비해, 10선업은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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