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15대 숙종실록

똥하 2008. 11. 19. 20:01

 1.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1054~1105년, 재위기간:1095년 10월~1105년 10월, 10년)


   나이 어린 헌종이 밀려나고 숙종(肅宗)이 즉위함으로써 고려 조정은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휘말리지만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여진족의 성장으로 변방이 불안해짐에 따라 이교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그 때문에 군사제도의 개편이 단행되는 등 고려 사회는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자 안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이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희(熙)였으나, 거란의 9대 왕 천조제와 이름의 발음이 같다 하여 천조제 즉위년인 1101년 3월에 옹(顒)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천상(天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강하여 매사에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경자사(五經子史) 등 많은 서적을 읽어 학문에 밝았고, 이 때문에 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문종은 어린 그에게 “후일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아마도 네가 될 것 같구나.”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으며, 1065년 그를 계림후에 책봉했다. 1077년에는 계림공으로 승진되었으며, 선종 3년(1086년)에는 수태보 벼슬을 받았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상서령에 올랐고, 이듬해 소태보와 왕국모의 도움으로 외척 이자의 세력을 몰아낸 다음에는 중서령에 올라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측근 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고려 제15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불혹을 넘긴 42세였다.

   숙종은 왕건을 장악하자 곧 반대 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이자의의 누이동생 원신궁주 이씨와 그녀의 아들 한산후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까지 모두 경원군으로 귀양을 보냈다. 숙종은 이처럼 처음부터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며 측근 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숙종은 조정 개편을 단행하여 이자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가장 공이 컸던 소태보를 문하시중에 앉히고, 김상기와 임개를 각각 문하시랑평장사와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하였다. 또한 상장군 왕국모를 수사도로, 유석을 수사공으로 삼고 손관, 최사추, 김선석 등 측근 세력들을 모두 요직에 앉힘으로써 먼저 왕권을 안정시켰다.

   이렇게 하여 숙종 대 초반기는 매우 안정된 정치가 이러진다. 하지만 후반기에 가면서 여진족이 성장하고 거란의 힘이 약해짐에 따라 변방이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점차 전쟁을 염려하며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숙종은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다. 가장 총애하여 상서령으로 삼았던 둘째 아들 필이 어린 나이로 횡사하고, 이복동생 부여후 왕수가 세력을 키운다는 소문이 무성하여 1099년 그를 역모 죄로 경산부(경북 성ㅈ) 약목군에 귀양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부여후 왕수의 역모사건에 대하여『고려사』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이미 숙종이 마흔이 넘은 나이였기 때문에 형제계승 전례에 따라 부여후가 차기 왕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숙종에게는 이미 17세나 된 장남 왕우가 있었기 때문에 부여후가 왕위를 잇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수는 왕위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한 탓에 결국 역모혐의를 쓰고 귀양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왕수가 귀양길에 오른 지 두 달 만인 1100년 정월, 숙종은 자신의 맏아들 왕우를 태자로 책봉하여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그는 양주 땅의 남경(한성)을 새롭게 건설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다.

   그래서 1101년 9얼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최사추, 어사대부 임의, 지주사 윤관 등에게 명령하여 궁궐 조성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최사추 등은 그해 10월 을미일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한다.

   “저희들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지에 가서 산수를 살펴본즉 도읍을 정하기에 할당하지 않고, 오직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사누 형세가 옛 문헌의 기록에 부합되오니 청컨대 삼각산 주룡의 중심 지점인 남향관에 그 지형대로 도읍을 건설하소서.”

   최사추의 보고에 따라 숙종은 남경 건설 사유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이듬해 3얼 직접 왕궁 지를 순행한 다음 궁궐 축성을 명령한다.

   이 무렵 전국에 송충이 피해가 극심하여 삼림 훼손이 심해지고 농작물에도 막대한 피해가 초래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또한 동북 면에서는 북방의 여진족이 더욱 강성해져 변방이 위태롭다는 보고를 올렸고, 숙종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1102년 4월 동여진의 추장 영가가 보낸 사절을 맞아들인다. 그리고 그해 11월에는 동여진에서 사절을 보내 은그릇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들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하였으며, 1103년 7월에는 여진에 붙잡혀 있다 풀려난 고려인 의원의 보고에 따라 여진의 국력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인식하고 정식으로 사절을 교환하며 국교를 맺는다. 하지만 여진이ㅡ 내정이 불안한 탓으로 변방에선 계속 전운이 감돌았고, 결국 1104년 정월 동여진의 추장 오아속 부대가 내전을 치르면서 정주 관문 밖에 군사를 집결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고려 조정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문하시랑 평장사 임간을 동북 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여진 군을 물리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간은 여진 군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기마병 중심의 여진 군을 이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 조정은 임간을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탄핵하고, 다시금 윤관을 동북 면 행영병마도통으로 임명하여 다시 여진과 대적하게 하였다. 그러나 윤관 역시 여진 군과 싸워 많은 군사를 잃고 그들과 화의조약을 맺는 것으로 일단 전운을 잠재웠다.

   숙종 대의 정치ㆍ외교는 이렇듯 전반기에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여진족의 국력 강화에 따라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 대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안정궤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덕택으로 주목할 만한 문화적 성과들을 남긴다.

   1096년에는 6촌 이내의 혼인을 금지하게 되는데, 이는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왕실은 광종 이후 지속적으로 성골 왕족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6촌 이내의 족내혼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유학을 숭상하던 유림들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리를 중시하고 족외혼을 가족제도의 기본 요건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숙종 대에 6촌 이내의 결혼이 금지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림들의 힘이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는 족외혼을 권장하던 송나라의 입김도 한껏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6촌 이내 금혼령은 백성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별로 지켜지지 않음으로써 이 법은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다만 이 때부터 우리 민족이 조금씩 족내혼을 금기시하는 풍조가 생겼을 뿐이다.

   1097년에는 주전관을 두고 w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인 해동통보 1만 5천관을 주조하여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하였다.

   1101년 3월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여 인판사업을 확대하였으며, 같은 해 4얼에는 61명의 선비와 21명의 현인들을 문선왕(공자)의 묘에 배향함으로써 유학의 이상을 더욱 높였다. 그리고 1102년에는 은나라의 성인 기자의 분묘를 찾아 사당을 세우고 능을 조성했다.

   이 같은 유학 진흥책과 함께 원효와 의상을 국사로 추증하고 그들의 공덕을 새겨 동방의 성인으로 높임으로써 불교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1103년에는 송나라의 의관 모개 등에게 흥성궁을 사관으로 내주고 의사를 양성하도록 했으며, 1101년부터 시작된 남경의 궁궐 조성작업이 1104년 5월에 완결되자 같은 해 8월에 왕이 직접 남경으로 내려가 누각과 원림을 유람하고 연흥전에서 반야경 도량을 베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화적 업적 이외에 군사적으로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대항하기 위해 별무반을 조직하게 된다. 윤관의 주장으로 설치된 별무반은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이 있었으며 고려는 이들 별무반을 통하여 여진 정벌을 준비한다.

   숙종 대는 이와 같은 정치, 외교적으로 전환기에 놓였기 때문에 한편으론 안정되고, 또 한편으론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숙종은 이런 정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1105년 고구려 동명왕의 묘역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었다. 그리하여 결국 환궁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는 노상의 수레 안에서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재위 만 10년 만의 일이었다.

   숙종의 능은 개경 송림현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영릉이다.


   2. 숙종의 가족들


   숙종의 부인은 명의 왕후 유(柳)씨 1명이었으며, 그녀에게서 예종을 비롯한 7남 4녀가 태어났다. 이들 가족 중 명의왕후 유씨와 예종을 제외한 여섯 아들들의 삶을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명의왕후 유씨(?~1112년)

   명의왕후 유씨는 정주 사람으로 문하시중 유흥의 딸이다. 정주 유씨는 태조 왕건의 첫 부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광종 이후에는 왕비를 배출하지 못하다가 숙종 대에 비로소 다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나 숙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정주 유씨 집안에서 왕비를 내는 것에 대해 조정의 반대가 심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씨는 숙종 4년에야 가까스로 왕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는 문종 대 이후 계속해서 왕비를 배출했던 인주 이씨 집안과 여타 외척들의 반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숙종이 계림후로 있던 시절에 시집왔으며, 숙종 즉이 후 칭호를 명복궁주라고 하였다. 이후 다시 연덕궁주로 개칭되었다가 1099년 3월에 비로소 왕비에 책봉되었다.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태후에 책봉되었으며, 이 때 그녀가 거처하는 궁을 천화전이라고 개칭하였다. 그리고 1112년 병으로 죽으니 승릉에 장사 지냈다.

   그녀 소생으로는 예종을 비롯한 상당후 필, 원명국사 징엄, 대방공 보, 대원공 효, 제안공 서, 통의후 교 등의 7남과 대령, 홍수, 안수, 복녕 네 궁주가 있다.


   상당후 왕필(?~1099년)

   상당후 왕필은 숙종의 둘째 아들로 부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1098년(숙종 3년)에 수인보덕 좌리 공신 칭호와 개부 의동삼사 검교태보 수태위 겸 상서령 관직과 상주국 훈위를 받고 상당후 작이와 식읍 2천 호에 실봉 3백 호를 받았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1099년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시호는 순상이ㅏ.


   원명국사 왕징엄(?~1141년)

   왕징엄은 숙종의 셋째 아들로 1098년에 출가하여 대각국사 의천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1101년 의천이 죽자 그를 이어 승통이 되었으며, 1141년에 사망하였다. 사망 후 인종은 그에게 원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대방공 왕보(?~1128년)

   왕보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 1102년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예종 원년에 추충광의공신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수사도 겸 상서령 관직, 그리고 상주국 훈이와 대방후 작위를 받고 식읍 2천 호에 실봉 3백 호를 받았다. 이후 1109년에 작위가 공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후에 이자겸의 모함으로 경산부로 내쫓겼다가 그곳에서 1128년에 사망했다. 이 때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한 후 그를 개경으로 소환하려 했으나 이미 병마에 찌든 그는 사망한 뒤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종은 그에게 중서령 관직과 대방공 작위를 추증하고 식읍 5천 호에 실봉 5백 호를 내렸다. 그에게는 아들 왕유가 있었다.

   예종의 책문에는 그의 성격과 인품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의와 충신은 이른바 하늘이 내리는 것인데 그대는 배우지 않고도 이를 알았으며, 시서와 예약은 인간의 문화인바 그대는 이를 학습하는 데 민첩했다. 이욕에 관계되는 일은 말하지 않았고, 음험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때는 반드시 지성으로 수양하였고, 행동할 때면 모두 절도에 맞았다. 종실에 대해서는 화목하고 우애하는 도의가 장하였고 어머니를 모실 때에는 공경하고 친애하는 뜻이 깊었다.”


   대원공 왕효(?~1170년)

   왕효는 숙종의 다섯째 아들로 1102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다. 예종 즉위 후에는 봉의동덕공신 칭호와 개부의동삼사, 겸교태사, 수사도 겸 상서령 관직과 상주국 훈위가 내려지고 대원후에 봉해졌다. 또한 이 때 식읍 2천 호에 실봉 3백 호가 주어졌다.

   그 후 1112년에 작위가 공으로 올랐으며, 식읍도 3천 5백호에 실봉 350호로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이자겸의 모함으로 귀양 갔다가 1130년에 소환되었다. 이 때 인종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그대는 당세의 큰 촉망을 받고 있으며, 누대의 종친이다. 영남에 귀양 보낸 것은 나의 본의가 아니다. 이제 왕성으로 소환하고 조카로서 은정(恩情)을 표하기 위하여 주택을 내리고 겸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니 더욱 충성을 다하여 내가 돌보는 심정을 체득하라.”

   왕효는 기양에서 풀려나 40년을 더 살다가 1170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함이 있었다.


   제안공 왕서(?~1131년)

   왕서는 숙종의 여섯 째 아들로 1103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맏형인 예종이 즉위하자 제안후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이후 1122년에 제안공에 봉해졌다. 인종 즉위 후에 이자겸에 의해 왕숙들이 모두 모함을 당하자 이를 모면하기 위해 스스로 호위병을 철거하고 문을 닫고 손님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항상 술에 빠져 스스로를 감춘 덕에 귀양길을 면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하고 1131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는 아들 왕장이 있었는데, 의종 때 역모혐의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화병으로 횡사하였다.


   통의후 왕교(1096~1119년)

   왕교는 숙종의 일곱 째 아들로 1103년에 처음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예종 즉위 후에 총의후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에 실봉 2백 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생명이 길지 못하여 1119년에 23세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예종의 책문은 그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의 아우인 그대 교는 나면서부터 영특하고 착한 자질을 가졌고, 어려서부터 장중하여 엄연히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안에서는 효도와 우애의 덕행이 있고, 밖에서는 준수하고 걸출하다는 명성이 전파되었다. 선군은 어린 그대를 가장 가긍히 여기며 사랑하셨고, 모후는 그대의 고독함을 어여삐 여겨 극진히 자애하셨다.”


   3. ‘숙종실록’ 편찬 관련사항


   ‘숙종실록’은 예종 대에 문신 이덕우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숙종 5년(1100년)에 우습유에 올랐고, 예종 3년(1108년)에 천흥절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으로 요나라에 간 적이 있으며 예종의 어머니 명의태후가 죽었을 때는 고애사로 다시 요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후 ‘숙종실록’을 편찬한 공으로 벼슬이 호부시랑에 올랐다가 상서우복야에 이르러 죽었다.

   그는 일찍이 김인존, 박승중, 최선, 이재 등과 함께 음양지리서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올린 바 있으며, 이 책은 왕으로부터『해동비록』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또 박승중, 이재 박경장, 김황원, 최선 등과 함께 상정관이 되어 예의에 관한 것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 숙종 시대의 세계 약사


숙종 시대 10년 동안 중국에서는 여진족이 점차 흥기하여 거란을 압박하였으며 송은 몇 차례에 걸쳐 서하(西夏)의 침입을 받고 통교를 허락한다. 그 결과 중국은 4파전의 양상을 띠며 패권이 분리되고 점차 거란과 송의 힘이 약해지는 경향을 띤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이 건국되고,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098년 셀주크투르크와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다. 이 때 유럽 전역에서는 기사문학이 성행하고, 프랑스 남부에서는 음유시가 유행한다.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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