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사

[스크랩] 고려1대 태조실록

똥하 2008. 11. 19. 19:54

1대 태조실록

1.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877~943년, 재위기간:918년 6월~943년 5월, 25년)

태조 왕건은 송악 호족 왕륭과 그의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스무 살 되던 896년에 궁예 휘하에 들어가 후고구려의 장수가 되었다. 전장에서의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던 그는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의 지위에 오르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918년에 궁예가 독단과 전횡을 일삼으로 호족들과 대립하면서 의심이 많아져 그의 목숨을 위협하자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등의 장수들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창업 후에는 당시 최대의 라이벌이던 견훤과 세력을 다투며 쟁패를 거듭하였고, 그 과정에서 죽을 뻔한 위기도 여러 번 넘겼으나, 935년에 견훤이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룩하였다(『후삼국실록) 참조).

신라의 통일이 당나라의 외세를 빌려 이룬 것이라면 고려의 통일은 민족 대 화합적 차원의 자주적 민주 통일이었다. 이 민족통일의 주도 세력은 왕건을 중심으로 한 고려 건국 세력이었다.

하지만 통일 전쟁이 지속되면서 926년에 거란에게 멸망 당한 발해 유민이 합세했고, 도한 신라 왕실과 백성들과 이에 호응하여 연합군에 가담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까지 끌어안음으로써 명실공히 민족 대화합을 이룬 가운데 통일을 성사시켰다. 고려는 이처럼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적으로 일궈낸 최초의 통일 국가였다.

고려의 통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 단일문화를 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한반도의 문화 중심지도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개성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라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의미이자, 동시에 고구려 문화를 회복할 기회를 맞이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가 고구려의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꾸준히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것도 고려 건국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견훤을 몰아내고 후백제의 두 번째 왕이 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왕건은 외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해냈다. 이는 대외적으로 고려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내적으로는 대화합을 바탕으로 한 단일민족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국가를 이룬 왕건에게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첫째는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으로 결집시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고구려 고토회복 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비록 통일을 일궈내기는 했지만 통일국가 고려의 초기 형태는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게다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장수들 역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펼치고 있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 왕건은 정주의 유(柳)씨, 평주(평산)의 유(庾)씨, 경주의 김씨, 황주의 황보씨, 광주(廣州)의 왕씨, 충주의 유(劉)씨 등 지방 호족의 딸들과 혼인하여 그들을 왕후나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여기에다 통일 무렵에는 의성의 홍씨, 평산의 박씨, 신주(신천)의 강(康)씨 등이 더해져 왕건의 후비는 총 29명이 되었다.

왕권 안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이러한 혼인정책은 적어도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는 좋은 안전장치가 될 수 있었다. 확고한 지배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왕건은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호족의 힘을 국가조직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혼인정책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혼인정책은 그가 죽고 난 뒤 고려를 왕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제들을 전면에 내세운 호족들의 왕권 경쟁으로 고려 왕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 같은 미래상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혼인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혼인정책은 강력한 통치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그가 그나마 고려를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호족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혼인정책 이외에도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의제(擬制) 가족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왕건이 이처럼 호족들을 혈연과 성씨로 묶어놓으려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통일국가 고려의 정치적 안정이었고, 장기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통일 중심적인 정치이념과 유화적인 성격에 바탕 한 왕건의 일관된 화합정책을 고려를 하나의 단일민족국가로 유지시키는 구심체였다. 따라서 왕건의 혼인정책은 단순한 호족 달래기 차원의 정치적 수단을 넘어서서 민족 대화합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족 대화합책과 아울러 왕건이 추진한 또 하나의 숙원사업은 고구려 고토회복 운동이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만방에 천명한 만큼, 왕건에겐 고구려의 엤땅을 회복해야 할 대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를 위해 938년 3천 여 호를 데리고 귀순한 발해인 박승을 받아 들이는 등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 유치하고, 평양에 서경을 설치하여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왕건의 북진정책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요동 지역에는 강성해진 거란이 버티고 있었고, 거란과 고려 사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왕건은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기 위해 말년까지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추진했으나 만주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고려의 강력한 북진정책은 서쪽에서는 청천강, 동쪽에서는 영흥 이북까지 여진족을 몰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일부 지역만을 회복한 것이지만 호족연합체 성격이 짙은 당시 고려체제를 감안할 때 이는 획기적인 결과였다.

청천강에서 영흥을 경계로 그 이북 지역은 비록 넓은 영토였지만, 농토가 비좁고 지형이 거칠며 기후도 좋지 않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못한 곳이었다. 때문에 아직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고려로서는 여진과의 숱한 전쟁을 치르며 그곳까지 영토를 확대하는 것 보다는 청천강과 영흥 이남을 안전지대로 가꾸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또한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했는데, 924년 10월에 거란이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며 고려와 화진을 제의했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거란의 사신이 화친협약을 위해 고려에 당도하자 왕건은 “거란은 일찍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서 친선관계를 맺을 대상이 못 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라는 다리 아래서 굶겨 죽였다.

민족화합 정책과 북진정책에 매진하며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왕건은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신라 출신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에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 그래 12월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해에 신흥사를 증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하여 공신들의 모습을 그려 벽에 붙여놓고 무차대회(無遮大會, 승려·속인·남녀노소·귀천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널리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집행하는 법회)를 개최, 해마다 이 전통을 잇게 하였다.

왕건은 또한 관제의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왕건 집권기의 고려 관제는 태봉의 관제를 축으로 하여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고 지방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스스로 치안을 담당하게 하는 과도기적 형태였다.

태봉의 관제는 최고관부로서 광평성(廣平省)을 두고 재상 광치나(匡治奈, 고려 때의 시중) 휘하에 7부 5성 2단을 설치하여 국사를 각각 분담하게 했다. 그 밖에 삼림, 기물 등을 관리하는 부서를 두었으며, 군제는 장군, 정기대감, 성주장군, 대아찬장군, 파진찬 장군, 백선장군 등의 고위 관직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왕건은 태봉의 이러한 관제와 군제를 기본으로 중앙을 정비하고, 지방에는 호족자치제를 실시하여 호족들에게 호장, 부호장 등의 향직을 주고 그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도록 했다. 또한 호족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아 중앙에 머물게 하는 기인(其人)제도를 실시하여 지방의 반란에 대비하였다.

이처럼 고려의 안정을 위해 전력을 다하던 왕건은 943년 계묘년 4월 병석에 눕게 된다. 죽음을 예감한 왕건은 측근 세력인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訓要十條)’을 전한다.

‘훈요십조’는 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것으로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내린 일종의 왕실헌장이다. 여기에는 왕건의 정치이념과 사상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둘째,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셋째, 서열에 관계 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넷째, 중국 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다섯째, 서경(평양)에 1백 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여섯째,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일곱째,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여덟째,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금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아홉째,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열째,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왕건의 이 같은 ‘훈요십조’는 고려왕조의 통치이념과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불교를 웅성하게 하되 사찰의 난립과 승려의 권력을 억제하고 자주적인 풍습과 문화를 지키며, 덕을 갖춘 자로 하여금 왕을 잇게 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도록 하고, 참소보다는 간언에 귀를 기울여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보살펴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며, 후백제 멸망으로 인해 고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백제 지역 인사에게 관직을 주지 않음으로써 반란도모 가능성을 없애고, 관직에 있는 자를 공평하게 다스리며, 역사와 경전을 소홀히 말고 반성하는 자세로 국사에 임하라는 것이다(학계 일각에서는 ‘훈요십조’가 신라 출신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특히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 외곽, 즉 구 후백제 지역 출신에 관직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한 내용은 조작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한다).

죽음을 앞둔 시간에도 이처럼 고려의 안녕을 걱정하며 ‘훈요십조’를 내린 왕건은 943년 5월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왕건은 빙긋이 웃으면서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능은 현릉으로 그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

 

한편, 고려라는 명칭은 고려 건국 당시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고려는 어원적으로 볼 때 고구려와 다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그것은 쉽게 확인된다. ‘고(高)’는 한자어에서 높여서 부르거나 또는 미칭으로 덧붙일 때 쓰는 접두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뜻이 없다. 굳이 뜻을 붙이려고 한다면 ‘위대한’, ‘숭고한’, ‘고씨의’ 등의 형용사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구려(句麗)’는 고구려어로 성(城), 읍, 고을 등을 의미하는 ‘홀’·’골’·’구루’등을 음차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고씨의 고을’, ‘위대한 성읍’ 등으로 풀이되고, 고려는 고구려의 줄임말이거나 ‘구루’에 대한 한자식 표기로 볼 수 있다.

고려와 고구려가 고구려에 대한 같은 명칭이라는 사실은 고려 건국 이전의 일을 다루고 있는『편년통록』의 왕건 조상들에 얽힌 설화에서도 확인된다.

왕건의 조부 작제건(作帝建)이 배를 탔을 때 중국인들이 그를 향해 이미 ‘고려인’이라고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 역사서들도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연의『삼국유사』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볼 때 코리아(Korea)나 꼬레(Core) 등의 알파벳식 명칭도 고려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 시대에 이미 고구려는 고려라는 이름으로 인도나 티베트뿐만 아니라 중국 서쪽 세계에 알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이름으로 인식한 가운데 인도 계통 승려인 마라난타나 묵호자가 중국을 거쳐 불교를 전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하고 돌아간 사실을 통해서도 이는 증명된다. 또한 고려 성립 이전에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755년)가 사라센 군대를 맞아 싸울 때 그가 고려인(또는 고구려인)이라는 사실이 아라비아 세계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높다.

 

2. 왕건의 조상들과 그들에 얽힌 설화

『고려사』편자들은 김관의(고려 의종 때 문신)의『편년통록』에 실린 왕건 조상들에 얽힌 민담들을 함께 소개해놓았다. 편자들은 이 민담을 터무니 없는 것으로 일축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사실적인 부분들이 있는 만큼 분석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고려사』에 인용된  『편년통록』은 왕건의 조상을 당나라 왕실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자칭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부르며 백두산으로부터 전국 산천을 유람하고 다니던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국을 떠돌다가 부소산 왼편에 자리잡은 산골 마을에서 장가를 들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는 체격이 우람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활을 잘 쏘았고, 집안도 부유한 편이었다. 하지만 아들을 얻지 못해 사냥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함께 근처에 있는 평나산에 매를 잡으러 갔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돌아오지 못하고 굴속에서 잠을 청하게 됐는데, 그 굴로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 들어 입구를 막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들 중에 한 명의 목숨을 호랑이에게 바치기로 결심하고 각자의 모자를 던지기로 하였다.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모자의 주인이 희생양이 되기로 한 것이다.

열 사람이 일제히 모자를 던지자, 호랑이는 호경의 모자를 물었다. 그래서 호경은 약속대로 굴 밖으로 뛰쳐나가 호랑이와 싸울 채비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입구를 막고 있던 호랑이는 호경이 굴을 뛰쳐나가자 곧장 달아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등 뒤에서 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서야 호경은 호랑이가 자신들을 잡아먹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굴에서 구출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산을 내려온 호경은 평나군청에 가서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이 몰사한 사실을 알리고, 다시 산으로 올라가 그들 장사를 지내주었다. 장사를 지낼 때 산신(산귀신)에게도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 홀연히 산신이 호경 앞에 나타났다. 산신은 홀로 산을 주관하는 과부인데 다행히 성골장군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면서 부부의 인연을 맺을 것을 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호경은 산신과 부부가 되어 산의 대왕이 되었고 사람들은 더 이상 호경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호경이 산신과 결혼한 것을 안 평나군 사람들은 그를 대왕으로 섬기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아홉 사람이 함께 죽은 그곳 산 이름도 구룡산이라고 고쳤다. 하지만 그 후에도 호경은 옛처를 잊지 못하여 항상 처의 꿈에 나타나 그녀와 동침하였고, 그러던 중 처가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강충이라 하였다.

강충은 자태가 단정하고 재주가 비상하였다. 그는 (개성의) 서강 영안촌의 부잣집 딸 구치의에게 장가들어 오관산 마가갑에 살았다. 그 즈음 풍수에 능통한 신라의 감간(지방관) 팔월이라는 사람이 부소군을 방문하였다. 팔원은 부소산이 형세는 좋지만 나무가 없는 것이 흠이라면서 강충에게 부소군을 부소산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보이지 않도록 하면 삼한을 통일할 왕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부소군은 원래 산 북쪽에 있었는데, 강충은 팔원의 말을 믿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 남쪽으로 이사하여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지명을 송악군으로 고쳤다.

그 후 강충은 벼슬이 높아지고 재산도 많이 모였다. 그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을 이제건, 둘째 아들의 이름을 손호술이라 하였다.

손호술은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지리산으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으며, 이름을 보육으로 고쳤다.

보육은 후에 다시 평나산 북쪽 기슭으로 돌아와 살다가 다시 마가갑으로 옮겼는데,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곡령재에 올라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었더니 그 오줌이 온 땅에 가득 찻 산천이 은(銀) 바다로 변하였다.

이튿날 그는 형 이제건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였다. 동생의 꿈 이야기를 들은 이재건은 그 꿈이 비상한 인물을 낳을 태몽이라고 하면서 자기 딸 덕주를 동생의 아내로 주었다.

이렇게 하여 보육은 처를 거느린 거사중이 되어 마가갑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그때 신라 술사 한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말하길 그곳에서 살면 반드시 당나라 천자를 사위로 맞을 것이라고 했다.

보육은 두 딸을 낳았다. 둘째 딸의 이름은 진의였는데, 그녀는 얼굴이 곱고 재주와 지혜가 많은 여자였다.

진의가 성년이 되었을 무렵, 어느 날 그녀의 언니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언니는 꿈에서 오관산 마루턱에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 천하에 가득 차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진의는 언니에게 비단치마를 주고 꿈을 사기로 하였다.

당 현종 12년(753년)에 아직 왕자로 있던 당의 숙종이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패강(예성강) 강나루에 도착하였다. 그는 동방의 산천을 구경하다가 송악에 도착하여 한때 보육이 꿈속에서 올랐던 곡령재 위에 섰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방이 고요하고 위풍이 서려 있어 나라의 도읍으로 부족함이 없는 듯했다.

그날 당 숙종은 마가갑 양자동으로 와서 보육의 집에 묵게 되었다. 보육의 집에 묵게 된 그는 두 처녀를 보고 좋아하며 자기의 터진 옷을 꿰매다라고 하였다. 보육은 숙종을 보고 술사가 말한 중국의 귀인이라고 판단했고, 곧 자신의 큰딸을 그의 방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큰딸은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터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 둘째 딸 진의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숙종은 보육의 집에 머무른 지 한 달 만에 진의에게 태기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이 내용에 대하여 고려 충숙왕 때 민지가 쓴 『편년강목)에는 1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숙종은 당나라로 떠나야 했다. 그는 이별할 때 진의에게 자신이 당나라 귀족임을 밝히면서,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활과 화살을 전해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 진의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작제건이라고 하였다. 작제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맹이 있었다. 작제건은 다섯 살을 넘기자 어머니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진의는 남편의 이름을 몰랐으므로 단지 그의 아버지가 당나라 사람이라고만 대답했다.

작제건이 자라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진의는 아들에게 남편이 두고 간 활과 화살을 주었다. 그것을 받은 작제건은 기뻐하며 매일같이 활과 화살을 가까이 하여 신궁이 되었다.

어느 날 작제건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상선을 타고 당나라로 떠났다.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짙은 안개를 만나 배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뱃사람들은 점을 친 후 함께 탄 고려인을 내려놓고 가기로 결정했다.

뱃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작제건은 활과 와살을 몸에 지닌 채 바다로 뛰어내려야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안개가 걷히고 배는 나는 듯이 가볍게 가버렸다.

배가 가고 나자 작제건 앞에 용왕이 나타났다. 용왕은 매일 저녁 늙은 여우 한 마리가 부처의 형상을 하고는, 소라나팔을 불고 경을 읽어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하소연하면서 작제건에게 그 여우를 잡아줄 것을 간청했다.

작제건은 용왕의 청에 따라 관음보살로 변장한 늙은 여우를 죽이게 되었고, 용왕은 그 답례로 작제건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하였다. 용왕이 작제건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자 작제건은 동방의 왕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용왕은 동방의 왕이 되려면 세울 ‘건(建)’자가 붙은 이름으로 자손까지 3대를 거쳐야만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작제건은 아직 자신이 왕이 될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동방의 왕이 될 것을 포기하는 대신 용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였다. 작제건이 사위 되기를 청하자, 용왕은 장녀 처민의를 그에게 내주었다.

용왕의 사위가 된 작제건은 아내 용녀와 함께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다. 작제건은 송악 남쪽 기슭에 터전을 잡았는데, 그곳은 곧 옛날에 강충이 살던 곳 이었다.

작제건은 용녀에게서 네 아들을 얻었는데, 장남을 용건이라 하였다. 용건은 후에 이름을 융으로 고치고 자는 문명이라고 하였으니, 이가 고 왕건의 아버지이다.

용건은 어느 날 꿈에 한 미인을 만나 부부가 될 것을 약속했다. 꿈에서 깬 뒤 송악산 영안성으로 가는 길에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바로 꿈에서 본 여자였다. 그래서 용건은 그녀와 혼인하였다.

사람들은 용건이 꿈에서 보았다 하여 그녀를 몽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혹자는 말하길 그녀가 삼한의 어머니가 되었기에 성을 한씨라 했다고 한다. 그녀가 곧 왕건의 어머니 한씨이다.

 

3. 당 왕실과 혈연관계를 조작한 고려 왕실

앞의 민담은『편년통록』에 기록된 왕건 조상에 얽힌 이야기의 대략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는 왕륭(용건)이며, 할아버지는 작제건, 그리고 증조부는 당(唐) 나라의 숙종이다.

『고려사』의 편자들은『편년통록』이 왕건을 당 왕실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을 공민왕 대에 이제현이 쓴『국사』의 내용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김관의의 말에 의하면 의조(懿組, 작제건)가 당나라 사람인 자기 아버지가 남긴 활과 화살을 얻어 가지고 바다 건너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소원은 당연히 아버지를 만나는 것이어야 하는데, 용왕이 그에게 소원을 물었을 때 그는 동방의 왕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마도 이것은 의조가 한말은 아닐 것이다.”

이제현은 작제건의 아내 용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원록(聖源錄)』에는 의조의 처 용녀는 평주(황해도 평산) 사람 두은점 각간의 딸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김관의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이제현이 여기서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성원록』은 고려 중엽 이전에 저술 된 고려 왕실의 세계(世系)에 대한 기록이다. 『성원록』의 기록은 김관의의 것 보다 먼저 쓰여진 것으로, 결국 이제현의 말은『편년통록』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 이제현은 김관의가 언급한 왕건 조상들의 성과 이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다.

“내가『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보니 거기에는 국조의 성은 왕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태조 대에 와서 비로소 왕씨 성을 삼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이제현이 언급하고 있는『왕대종족기』역시『성원록』과 비슷한 시기에 저작된 것으로 고려 왕실의 족보책이다. 이 기록에 국조의 성이 왕씨였다고 했는데, 여기서 ‘국조’는 왕건의 증조부를 가리킨다. 따라서『왕대종족기』에 따르면 왕건 집안은 적어도 증조부 대에서부터 왕씨 성을 사용했다는 뜻이 된다.

이렇듯 이제현에 의하여 고려 왕실이 당 왕실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은 완전히 부정된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자신들의 조상이 당나라 숙종이라고 주장했다.

『고려사』에는 이에 얽힌 웃지 못할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잡혀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 한 사람이 왕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듣건대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 황제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말입니까?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을 나간 일이 없고, 안녹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겠습니까?”

충선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편년강목(編年綱目)』의 저자 민지가 대신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사에 잘못 쓰인 것입니다. 사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이었습니다.”

 

민지가 이처럼 선종이 숙종으로 잘못 기재되었다고 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당나라 역사에 밝지 못해 안녹산의 난이 숙종 대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당시 왕자였던 선종이 피난하여 도망했던 사실은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민지는 고려국사에 기록된 당나라 숙종을 선종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민지가 숙종을 선종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하자 그 한림학사는 선종은 오랫동안 외방에서 고생을 하였던 만큼 옥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수긍했다.

하지만 고려왕조의 선조가 선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제현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논박하고 있다. 즉, 선종이 비록 난리통에 동방으로 왔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민담에 불과할 뿐, 실록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제현의 주장대로라면 고려 왕실이 당의 왕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관의나 민지는 왜 고려 왕실을 당나라 왕족과 연관시키려 했던 것일까.

김관의나 민지의 주장을 고려 왕실에서도 받아 들이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해보면 그 의도는 좀더 분명해진다. 고려 왕실은 당 왕실과 자신들을 혈연으로 묶어 우선적으로 고려 왕실의 위신을 새롭게 하고, 다음으로 외교적으로 고려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고려 건국 당시의 중국 정세를 살펴보면 907년 당이 멸망하자 후당, 후량, 후진, 후한, 후주 등의 5대와 오, 오월, 남한, 초, 전촉, 민, 형남·남평, 후촉, 남당, 북한 등 10국이 난립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백성들은 3백 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뤘던 당나라를 동경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의 당에 대한 그리움은 송·원대에 가서도 지속되는데, 고려는 중국인의 이 같은 정서를 국내 정세의 안정과 중국 국가들과의 외교에 이용하려 했던 것 같다.

당이 멸망하자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했지만, 당의 문화와 전통은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이 당 왕실과 혈연관계에 있다는 것은 외교적 측면에서 유리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고려 왕실은 이러한 이점을 계산하고 의도적으로 당 왕실과의 혈연관계를 조작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김관의의『편년통록』과 민지의『편년강목』이 원나라 세력이 팽창된 이후에 저작된 사실을 고려한다면 고려 왕실과 당 왕실을 혈연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고려 말엽에 와서 이뤄진 일일 가능성이 크다. 원의 팽창으로 송의 입지가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송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려 왕실의 입지 역시 약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이에 따라 고려 왕실은 왕족의 권위를 세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고, 그 결과 당 왕실과의 혈연관계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려 중엽 당시에는 이러한 혈연 조작이 여러모로 쓸모 있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 대 이후 반원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고려는 더 이상 당 왕실과의 혈연 조작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고려 왕실과 당 왕실의 혈연 조작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관의와 민지의 주장에 대한 사실 여부에 상관 없이 그들의 기록은 왕건의 조상들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우선 왕건의 조상들은 송악산 아래에 터전을 잡은 호족으로, 증조모 진의의 사생아 작제건이 조부이며, 조모는 용녀라는 것과, 또한 왕건의 아버지의 이름이 용건(왕륭)이며, 어머니는 몽녀 한씨라는 사실이다. 하지만『고려사』는 고려『태조실록』에도 이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 후, 왕의 3대 조상들은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증조부는 원덕대왕, 증조모 진의를 정화왕후라 했고, 조부 작제건은 의조 경강대왕, 조모 용녀는 원창왕후에 봉했다. 그리고 아버지 용건은 세조 위무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몽녀는 위숙왕후에 봉하였다.

그런데 태조가 증조모의 아버지 보육을 국조라고 하면서 원덕대왕에 봉했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부계 혈통을 유지하던 관습에 비추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만약 보육이 자신의 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당시엔 족내혼이 성행했고 보육 역시 질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치면 딸을 아내로 삼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태조실록』에서 보육을 국조(증조부)로 하고, 그의 딸이자 증조모인 진의를 국조의 왕후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보육이 증조모 진의의 아버지이자 동시에 남편이었을 때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풍습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추론은 사실로 인정되기 힘들다. 오히려 보육의 딸 진의가 사생아를 낳자, 보육이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키웠을 가능성이 높다.

 

4. 태조 왕건의 가족들

왕건은 신혜왕후 유(柳)씨를 비롯해 총 29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25남 9녀를 얻었다. 29명의 부인들 중에서 제2비 장화왕후 오씨가 1남(혜종),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劉)씨가 정종과 광종을 비롯한 5남 2녀,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1남 1녀, 제5비 신성왕후 김씨 1남, 제6비 정덕왕후 유(柳)씨 4남 3녀, 헌목대부인 평씨 1남, 정목부인 왕씨 1녀, 동양원부인 유(庾)씨 2남, 숙목부인 1남, 천안부원부인 임씨 2남, 홍복원부인 홍씨 1남 1녀, 소광주원부인 왕씨 1남, 성무부인 박씨 4남 1녀, 의성부원부인 홍씨가 1남을 낳았다. 이 외에 정비 신혜왕후 유씨를 비롯하여 여섯 왕비와 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들 중 신혜왕후 유씨를 비롯한 여섯 왕비와 그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 중 후대 왕권 구도와 관련 있는 대종과 안종의 삶을 간략하게 싣고, 혜종, 정종, 광종 등은 각 왕의 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신혜왕후 유(柳)씨(생몰년 미상)

태조의 본부인 유씨는 경기도 정주(풍덕)에서 태어났으며, 삼중대광 유천궁의 딸이다.

유천궁은 경기 북부지역의 큰 부자였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의 집안을 일컬어 ‘어른댁(長者家)’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태조가 그녀를 만난 시기는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군대를 거느리고 각 지역을 정벌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궁예 휘하에 들어간 것이 896년이고, 왕건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으므로 장수로 활약할 만큼 성장한 때였다. 하지만 유천궁이 경기 지역의 유력가인 점을 고려한다면 아직 초적의 무리로 인식되고 있던 궁예 휘하의 장수에게 딸을 내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왕건이 유씨를 만난 시기는 궁예가 정식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901년 전후가 될 것이다.

이 때 유씨의 나이는 당시의 결혼 적령기인 열여덟 살쯤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산해 볼 때 유씨는 왕건보다 다섯에서 일곱 살 정도 아래였을 것이므로 882년에서 884년 사이에 태어났을 듯 싶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그녀를 늙은 버드나무 아래서 만났다고 되어 있다.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 땅을 지나가다가 말을 쉬게 하느라고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있다가 시냇가에 서 있는 유씨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넨 왕건은 그녀의 덕스러운 얼굴에 반해 그날 유천궁의 집에서 묵었다. 그리고 유천궁은 그날 밤 자신의 딸 유씨를 왕건과 동침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건이 버드나무 그늘 아래서 쉬다가 개천가에 서 있는 유씨를 발견했다는 말은 꾸며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의 일반적인 결혼 관념에 따르면 물 근처에서 여자를 만나는 것은 다산을 상징하고, 또한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치부했다. 따라서 왕건과 유씨의 이야기도 이런 일반적인 결혼 관념에 끼워 맞춘 흔적이 역력하다.

유천궁은 경기 지역이 대부호였다. 때문에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뛰어난 장수를 사위로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왕건 역시 경기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유천궁의 재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왕건이 유천궁의 사위가 된 것은『고려사』의 이야기처럼 우연히 이뤄진 일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어쨌든 유천궁은 자신의 딸을 왕건과 동침토록 했고, 왕건은 그의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떠났다. 왕건이 전장으로 떠난 뒤 소식이 없자 유씨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다가 오래 뒤에 왕건이 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데려와 부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유씨는 당찬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궁예의 독단적인 처사에 반발하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대사를 도모하자고 찾아왔을 때 왕건은 주저하였다. 이 때 유씨는 밖에서 엿듣고 있다가 왕건을 독려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고『고려사』는 전한다.

유씨의 고려 개국 공로에 대해서는 934년에 후당이 명조잉 태복경, 왕경 등을 보내 그녀를 ‘하동군부인’에 봉하는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글은 “국사 대책을 좋은 계책으로 보좌하였으며, 부인으로서 총애와 우대를 받았다.”고 그녀를 칭찬하며 “일반적 관례를 초월하여 특수한 명예를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고, 죽은 뒤 왕건의 묘 현릉에 합장되었다. 그녀의 사망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장화왕후 오씨(생몰년 미상)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목포 사람으로 부친은 오다련군이며 조부는 오부돈이다. 『고려사』는 그녀를 미미한 가문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지는 않다.

왕건이 오씨를 만난 때는 910년을 전후한 무렵이다. 이는 혜종이 912년 태생이라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이 때 오씨의 나이를 당시의 겨론 적령기인 17세 정도라고 추측해보면 그녀의 출생연대는 대략 893년에서 895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왕건과 오씨의 만남을『고려사』는 다소 신비화시키고 있다. 왕건이 나주에 진주하여 시냇가를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떠 있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가 시냇가에 다가가니 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어 동참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왕건과 오씨의 동침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그녀를 불러서 동침을 하였는데, 그녀의 가문이 한미한 탓으로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정액을 돗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가 그것을 즉시 흡수하였으므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는바 그가 곧 혜종이다.

 

『고려사』는 또 이 일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혜종의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주름살 임금’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씨의 신분이 미미한 탓에 혜종은 왕건의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 뻔했다. 왕건은 장남 무를 세자로 삼고 싶었지만 오씨의 신분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 때 대광을 맡고 있던 박술희의 도움으로 자신의 뜻대로 장남을 세자로 세우게 된다.

오씨는 혜종 이외에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신명순성왕후 유(劉)씨(생몰년 미상)

신명순성황후 유씨는 충주 사람으로 내사령 유긍달의 딸이다. 그녀는 태자 태, 정종, 광종,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등의 다섯 아들과 낙랑과 흥방 두 공주를 낳았다.

유씨는 다른 어떤 왕후보다도 많은 자식을 낳았고, 그녀 소생 중에 두 명이 왕이 되었으나『고려사』는 그녀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고 있다. 또 유씨 소생 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제56대 경순왕)와 혼인하여 왕건이 신라 세력을 포용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왕건이 유씨와 결혼한 시기는 92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태자 태의 출생연대가 정종과 광종이 두 살 터울임을 감안할 때 920년경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씨는 9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며, 왕건이 왕이 된 이후에 처음 맞이한 왕비였던 만큼 당시의 세력 판도와 관련된 정략 결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건의 ㅜ비 중에 충주 출신은 그녀 하나뿐이었는데, 이것은 곧 그녀의 아버지 유긍달이 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녀의 소생 광종이 954년 봄에 승선사를 창건하여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정왕후 황보씨(?~983년)

신정와후 황보씨는 왕주 사람으로 삼중대광 황보제공의 딸이다. 그녀 소생으로는 성종의 아버지 대종 왕욱과 광종의 비 대목왕후가 있다.

그녀가 제4비가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신명왕후보다는 늦게 결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녀 역시 신명왕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건이 호족 세력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취한 정략결혼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 건국 초기에 해당하는 920년경에 결혼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황보씨는 태조가 죽은 후 40년을 더 살았으며 사망 당시의 나이는 여든 살 가량이었다. 며느리 선의왕후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성종을 비롯한 손자들에 대해 많은 애정을 쏟았다. 효덕태자와 성종, 경장태자 등은 그녀가 직접 양육하였다.

태조의 부인 중에 황주 출신은 두 명이었는데, 그녀를 먼저 택한 것을 보면 황보제공이 황해도의 유력한 호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종조에 남긴 조문에 따르면 그녀는 덕이 많고 성격이 후덕했으며, 검소하고 슬기로워 백관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능은 수릉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고, 다만 개성 근처일 것으로 추측된다.

 

신성왕후 김씨(생몰년 미상)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이며 경순왕의 큰 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 김씨가 왕건의 제5비가 된 것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935년 직후이므로 936년 초가 될 것이다.

935년 11월 신라 56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왕건은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냈다. 고려 사신은 경순왕에게 왕건이 신라 종실과의 혼사를 원한다는 사실을 전했고, 이에 경순왕은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고려로 시집보낸다.

김씨 소생으로는 안종이 있는데, 그는 제5대 왕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여 제8대 왕 현종을 낳았다.(「경종실록)헌정왕후 황보씨 편 참조)

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정덕왕후 유(柳)씨(생몰년 미상)

정덕왕후 유씨는 경기도 정주(승천) 출신이며, 시중 유덕영의 딸이다.

그녀는 제6비였지만, 결혼은 제5비 신성왕후 김씨보다 아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 소생 선의왕후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과 결혼하고, 문혜왕후가 제3비 신명왕후 유씨 소생 문원대왕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그녀의 결혼 시기는 신정왕후 황보씨와 비슷한 시기인 920년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출생연대도 신정왕후와 비슷한 시기인 903년쯤일 것이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왕위군, 인애군, 원장태자, 조이군 드으이 네 왕자와 문혜왕후(문원대왕 비), 선의왕후(대종 비) 등이 있다.

 

대종 욱(旭)(?~969년)

대종 왕욱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이며, 제6대 왕 성종의 아버지이다. 그의 출생연대는 전하지 않으나, 광종 20년(969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욱은 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소생 선의왕후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효덕태자, 성종, 경장태자, 헌정왕후(경조 3비), 헌애왕후(경종 4비) 등을 두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태왕으로 추존되어 묘호를 대종이라 하고 능호를 태릉이라 하여, 대묘에 합사하였다.

 

안종 욱(郁)(?~997년)

안종 왕욱은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며, 제8대 왕 현종의 아버지이다. 981년에 경종이 죽자 그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가 사가로 나와 거처하였는데, 왕욱은 그녀와 정을 통하여 임신케 했다. 이 일이 발각되자 성종은 왕욱을 귀양 보냈으며, 그가 귀양 가던 날에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죽었다.

성종은 헌정왕후가 죽은 후 왕욱의 아이를 보모에게 맡겼는데, 아이가 두 살이 되자 아버지를 탖으므로 왕욱에게 보냈다. 왕욱은 귀양지에서 아이를 기르다가 죽음이 임박해오자 아들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이렇게 유언했다.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쪽 귀룡동에 매장하되, 시체를 엎어 묻어달라.”

유언을 남긴 왕욱은 성종 15년(997년)에 세상을 떴다. 그리고 그의 아들 현종이 1010년에 왕위에 오르자 효목대왕에 추존되고, 묘호를 안종이라 하였다.

현종의 1018년에 그의 능을 건릉에 옮겼으며, 1028년에 능호를 무릉으로 개칭했다.

 

5. 고려 개국공신 4인방

918년 6월,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네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기병대장들이었다.  말하자면 궁예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있는 야전사령관들이 셈이다. 태봉 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반기를 들었던 것은 날로 심해가는 궁예의 비정상적인 학정 때문이엇다.

궁예는 날로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져 측근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고, 백성들에게 가혹한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눈에 거슬리는 신하들은 한결같이 역모로 몰렸고, 가혹한 공포정치에 시달린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궁예의 공포정치가 지속되자 급기야 곳곳에서 반라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에 더 이상 궁예를 왕으로 섬길 수 없다고 판단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은 덕망이 높고 세력이 강한 왕건을 찾아가 군사를 일으킬 것을 종용한다. 왕건은 처음에 역모 제의를 거절하지만 이들 네 사람과 부인 유씨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결국 역모에 동의한다. 왕건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네 사람은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왕성으로 쳐들어가 궁예를 몰아내게 된다.

이들 개국공신 4명의 삶을 간단하게 기록하면서 개국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역할을 추적해본다.

 

홍유(?~936년)

홍유(洪儒)는 경상도 의성 사람으로 초명은 술이다. 무장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변과 논리가 뛰어났으며, 고려 건국 당시 왕건을 설득하여 왕으로 옹립한 장본인이다.

태봉 이전에 그도 한때 신라의 장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신라는 진성여왕의 퇴폐정치와 일부 권신들의 권력 남용으로 기강이 무너지고 혼란이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혼란이 계속되자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고, 산마다 도적들이 들끓었다. 그러자 각 지방 호족들이 봉기하여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 홍유 역시 신라에 반기를 든 세력에 가담하게 된다.

새로운 왕조가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홍유는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후 궁예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고구려, 마진 등으로 국호를 바꿔가며 태봉을 세웠다.

홍유는 17년 동안 궁예를 왕으로 섬기며 장수로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기마부대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격인 마군대장에 오른다. 하지만 궁예는 시간이 지날수록 왕으로서의 덕을 잃고 포악성을 드러내며 공포정치를 실시했고, 결국 홍유는 다시 한 번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복지겸, 신숭겸, 배현경 등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왕위에 오르자 홍유는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등과 함께 개국 1등  공신이 된다. 고려 개국 직후 왕건의 왕권 찬탈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홍유는 진압군 대장으로 출전한다. 청주 반란을 수습한 그는 이듬해 다시 경상 북부지방의 안정을 위해 예상 등지에 유민을 유치하는 일을 맡기도 했으며, 그 공적을 인정 받아 종1품 대상에 오른다.

홍유에 대한 왕건의 믿음은 두터웠던 모양이다. 왕건은 홍유를 경상 북부지역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의성의 호족장으로 대우하는 차원에서 그의 딸을 제26비로 맞아들인다. 그녀가 바로 의성부원군부인 홍씨로 왕건의 25번째 아들 의성부원대군의 어머니이다.

대상이라는 요직을 차지하고, 다시 왕건이 장인이 된 홍유는 명실공히 개국 1등 공신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936년 왕건이 연합군을 결성하여 후백제의 신검을 칠 때 출전하여 일리천 전투에서 다시 한 번 공을 세우지만, 결국 그 해에 천수를 다하고 말았다. 그가 죽자 태조는 그에게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현경(?~936년)

배현경(裵玄慶)은 경주 사람으로, 초명은 백옥삼이다. 그는 담력이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궁예 휘하에 있을 때 일개 병졸에서 마군장군까지 오른 대단한 인물이다.

고려 건국 이후에는 개국 1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승진하여 벼슬이 정1품 대광에 이르렀다.

과감하고 강직한 성격을 가진 그는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왕건 또한 그를 신뢰하고 있던 터라 그의 직언을 곧잘 수용하였다.

태조의 측근 중에 청주 출신의 현율이라는 사람이 잇었다. 태조가 그를 호족자치군을 관할하는 순군낭중(당시 정2품 벼슬)에 임명하려 하자 배현경은 결사적으로 반대하였다. 배현경은 현율을 야전권을 쥐고 있는 순군낭중에 임명할 경우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을 했다. 고려 개국 직후 청주 순군리 임춘길 등이 이미 반란을 획책한 적이 있기 때문에 다시 청주 출신에게 순군낭중을 내린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왕건은 배현경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이끼던 측근 현율을 관리직인 병부의 낭중으로 고쳐 임명하게 된다.

이처럼 배현경은 강직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려 개국 이후 통일 작업이 지속되면서 그는 때론 장수로서, 때로는 중앙의 감찰 관리로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가서는 재상격인 대광의 벼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도 홍유와 마찬가지로 고려가 통일을 이루던 그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배현경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간 왕건은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아, 천명이로구나. 하지만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 어찌 그대를 잊으리!”

왕건이 이렇게 말한 후 그의 손을 놓고 문을 나설 때 그는 숨을 거뒀다. 그가 숨을 거두자 왕건은 국비로 장례를 치르게 했으며 ‘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신숭겸(?~927년)

신숭겸(申嵩謙)은 광해주(춘천) 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그는 본래 전라도 곡성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으며,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남달랐던 그는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에 올랐고, 궁예의 학정이 계속되자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과 모의하여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 개국에 참여한다.

고려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이 된 그는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의 국력신당과 민족통일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927년 9월, 견훤은 군사를 이끌고 경상 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불현듯 회군하여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한다. 그리고 신라 55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를 왕으로 앉혔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왕건은 직접 군대를 통솔하고 경주로 향한다. 하지만 그때 견훤은 이미 경주에서 퇴각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왕건은 별수 없이 견훤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공산(팔공산)에 진을 쳤고, 여기서 견훤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백제군의 급습을 받아 완전히 궤멸되었든데, 신숭겸의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왕건도 목숨을 일었을 것이다. 신숭겸은 왕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왕의 투구와 갑주를 입고 어차에 올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고, 그 사이 왕건은 변복을 하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공산싸움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도성으로 올아온 왕건은 부하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신의 실수를 곱씹는다. 특히 개국공신 신숭겸의 죽음은 왕건에게 커다란 패배감을 안겨다 주었다.

왕건은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시호를 ‘장절’이라고 했으며, 그의 동생 능길, 아들 보락, 철 등을 등용하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넋을 위로했다.

 

복지겸(생몰년 미상)

복지겸(卜智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그가 개국 당시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과 함께 왕건을 옹립하여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는 것과, 면천 복씨의 시조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의 초명은 사귀 또는 사괴라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 개국 이후에는 주로 감찰 일을 맡아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개국 초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던 세력들을 일일이 색출하여 반란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는 환선길의 반란계획도 미리 알아내 왕건에게 전달했으며, 임춘길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을 때도 이를 차단하였다. 이처럼 복지겸은 주로 반란 세력을 색출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뚜렷한 벼슬을 하지 못한 점으로 미루어 일찍 죽었거나 아니면 권력다툼으로 관직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죽은 후 그에게는 ‘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성종 13년에 개국공산 네 명 모두에게 태사 벼슬이 추증 될 대 함께 받았고, 개국공신 자격으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6. 태조의 정략결혼과 고려 통일을 뒷받침한 주요 호족들

건국 당시의 고려는 호족연합체였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국호를 고려로 고친 후 왕위에 오르지만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철원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예의 잔존 세력과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고 있던 충청도와 경상 북부지역 세력이 만만치 않았던 까닭이다. 때문에 왕건은 어떤 방법으로든 이들과 공조해야 했고, 그 결과물이 호족연합체였다.

왕건의 지지기반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와 황주 중심의 황해도, 그리고 나주와 충주 지역이었다. 개성은 자신의 출신지였고, 황주와 나주, 충주는 정벌과정에서 형성한 주요 거점이었다.

그리고 이 네 지역은 그의 처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제1비 신혜왕후가 경기도 정주의 호족  유천궁의 딸이었고, 제2비 장화왕후가 전라도 나주의 오다련군의 딸이었으며, 제3비 신명순성왕후는 충주의 유력가 유긍달의 딸이었다. 또한 제4비 신정왕후는 황주를 대표하는 황보씨 가문 제공의 딸이었으며, 제6비 정덕왕후는 경기도 정주 호족 유덕영의 딸이었다.

이들 중 첫째 부인 신혜왕후와 둘째 부인 장화왕후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과 왕건이 결혼한 시기는 920년 이전이다. 이는 고려 건국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왕건이 이미 고려 건국 이전부터 꾸준히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예가 한때 왕건에게 역모 혐의를 두었던 이유도 바로 왕건의 이 같은 세력 팽창 노력 때문일 것이다.

이는 궁예가 쉽사리 왕건을 제거하지 못했던 것이 왕건 지지 세력의 반란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또한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자 궁예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왕건의 세력이 얼마나 커져 있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왕건의 세력은 경기도, 황해도, 나주, 청주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 건국 후 궁예의 잔존 세력과 독자적인 힘을 형성하고 있던 충청도, 경상 북부 호족들의 반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왕건은 철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궁예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흔암을 죽이고, 충청도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청주 성주 공직이 처남 경종과 무력 동원 능력이 있던 환선길 형제를 죽여 반발 세력의 기선을 제압한다.

왕건은 이처럼 강경책과 함께 유화책을 구사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른바 결혼정책이다. 각 지방의 유력 호족들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관계를 돈독히 하여 고려의 안정을 노리겠다는 계산이었다.

다행히도 왕건의 결혼정책은 지방 호족들을 안심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하지만 호족들은 여전히 자기 지방 치안권을 독자적으로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정책이 중앙집권화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왕건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호족연합체 국가뿐이었다.

호족연합체는 일종의 자방자치제 성격을 띠었다. 각 지역의 호족들이 자기 지방의 호장, 부호장이 되어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고, 중앙 정부는 그들 호족들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들 호족 세력은 고려 개국과 그 이후에 지속된 통일정책 과정에서 왕건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인척지간이 되었고, 그 결과 왕건은 전국 주요 지역에서 29명의 후비를 얻게 되었다.

후비들의 출신 지역은 황해도가 9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도 4명, 충청도 3명, 강원도 3명, 전라도 2명, 경상도 6명, 출신이 불분명한 나머지 2명 등이다.

황해도 출신 후비가 절대 다수였다는 것은 고려 건국에 황해도 호족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적으로 경기도 출신 후비가 적은 것은 왕건의 힘이 경기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황해도에 이어 경상도 출신 후비가 두 번째로 많은 것은 신라 세력에 대한 배려이자 동시에 견제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라도 출신 후비가 두 명 뿐이었던 것은 왕건이 일찍이 나주 지역을 고려에 귀속시켜 전라도의 인심을 얻었고, 또한 후백제를 몰락시키는 과정에서 견훤과 그의 사위 박영규의 동조를 얻어냈기 때문에 다른 호족과의 제휴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한편으론 전라도 지역이 완전히 견훤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내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후비를 배출한 각 지역의 주요 호족을 살펴보면 우선 황해도에는 제4비 신정왕후의 아버지 황보제공을 비롯하여 제25비, 27, 28비의 아버지 박수경과 제9비 동양원부인 유(庾)씨의 아버지 유검필이 있고, 경기도에는 제1비 신혜왕후의 아버지 유천궁과 제15, 16비의 아버지 왕규가 있다.

충청도에는 제3비 신명순성왕후의 아버지 유긍달, 강원도에는 제8비 정목부인의 아버지 왕경을 비롯하여 왕씨 성을 하사 받은 왕예와 왕유, 경상도에는 제5비 신성와우의 아버지이자 경순와의 백부 김억렴과 제26비 의성부원부인 홍씨의 아버지 홍유, 전라도에는 제2비 장화왕후의 아버지 오다련군과 견훤의 사위이자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의 아버지 박영규가 있다.

이들 중 왕후를 배출한 호족들을 제외하면 황해도에서는 박수경과 유금필, 경기도에서는 왕규, 강원도에서는 왕경, 경상도에서는 홍유, 전라도에서는 박영규 등이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이들 호족 세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황해도를 대표하는 박수경과 유금필은 통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무장 세력이다. 특히 박수경은 자신의 누이와 질녀, 그리고 딸을 각각 태조의 25비, 27비, 28비에 앉혀 한 집안에서 3명의 후비를 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경기도를 대표하는 왕규는 단 한 번도 전장에 출전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박수경이나 유금필과 달리 학식을 겸비한 문장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임종을 앞둔 태조를 보필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혜종 집권기에 서경파와 정권을 다퉜던 점으로 미뤄 경기 일대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원도의 왕씨 일가는 명주(강릉) 성주 왕순식의 친척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신라에 속했던 왕순식(원래 성은 김씨)은 태조 5년에 고려에 내응안 공로로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받고 대광에 오른 인물이다. 8비의 아버지 왕경과 14비의 아버지 왕예, 18비의 아버지 왕유(원래 성은 박씨)도 이 때 태조로부터 왕씨 성을 받은 인물일 것이다.

경상도의 홍유는 이미 언급했듯이 고려 개국 4대 공신 중 한 명으로 경상북부 지대의 유력가로 성장했다.

전라도의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로 호남 지역의 유력가였다. 박영규는 자신의 첫딸을 태조의 17비로 보내고, 다시 둘째, 셋째 딸을 왕자 시절 정종의 배필로 보냄으로써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인물이다.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체로 경애왕과 관련된 신라 왕족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태조시대의 세계 약사

 

태조시대의 중국은 당이 몰락하고(907년) 혼란이 가속화되면서 5대 10국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유럽은 동로마에서 콘스탄티누스 7세가 즉위하였고(913년), 동프랑크에서는 헨리 1세가 즉위하여 작센 왕조를 열었다(919년).

출처 : 운현 시조정가교실
글쓴이 : 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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