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려3대 정종실록
1.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과 왕요의 등극 혜종이 집권한 이후부터 고려 조정은 왕위 계승을 노린 정치적 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권력 기반이 약한 혜종이 즉위하자 호시탐탐 정권 장악을 노리고 있던 충주 유씨 세력과 셔경파는 왕요 형제를 앞세워 혜종을 몰아내기 위한 총력전에 돌입한다. 이 같은 왕요 세력의 팽창은 즉위 이듬해 혜종이 병을 얻자 더욱 가속화된다. 왕요 세력은 종실을 대표하는 왕식렴과 평산 박씨를 대표하는 박수경이 중심이 된 서경파, 왕요의 장인 박영규, 충주 유씨 가문 출신의 관료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충주 유씨는 왕건이 왕위에 오른 후 첫 왕후를 배출한 호족이다. 당시 왕건은 이미 두 명의 왕후를 두고 있었지만 제1비 신혜왕후 유씨는 출가하여 오랫동안 비구니로 머물렀기 때문에 자식이 없는 상태였고, 제2비 장화왕후 오씨는 출신 가문이 한미하여 왕건의 왕권 강화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이들 두 왕후는 왕건이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에 혼인한 사이 만큼 권력 구도와는 큰 관계가 없었다. 그렇지만 충주 유씨 신명순성왕후는 왕권 구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유력한 호족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제3비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비였다. 신명순성왕후의 힘이 막강했다는 것은 왕건 자손들의 출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장화왕후 오씨가 혜종 한 명만을 생산한 데 비하여 신명순성왕후는 5남 2녀를 생산했다. 이는 왕건이 즉위 이에는 장화왕후와 거의 동침하지 안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왕건은 즉위 이후에 호족 출신 왕후를 세 명 받아들이고, 신라왕조에서 한 명의 왕후를 받아들였다. 이 중에서 신라왕조와의 혼인관계는 권력 구도와는 무관한 의례적인 것이었겠지만, 나머지 세 왕후와의 결혼은 호족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즉위 후 첫 번째 왕후를 충주 유씨 가문에서 얻었다는 사실은 당시 충주 유씨가 가장 강력한 ㅗ족 세력이었음을 대변하고 있다. 충주 유씨 다음으로 황주의 황보씨, 정주 유씨 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경기 주변 세력으로 왕건의 세력권 내에 있었다. 따라서 황주의 황보씨나 정주의 유씨는 왕건이 충주 유씨를 견제하기 위해 내세운 호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호족도 충주 유씨의 힘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왕건의 견제정책이 있자 충주 유씨 역시 평산 박씨 등과 제휴하고, 종실 세력까지 끌어들여 여전히 조정 제1 세력으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충주 유씨는 이 같은 강력한 세력을 과시하며 자신들의 외손 중에서 다음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왕건이 이미 그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박술희와 왕규의 힘을 빌려 장화왕후 오씨 소생 무를 태자로 책봉해둔 상태였다. 적어도 왕건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러한 권력 구도는 팽팽한 대립 상태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막상 왕건이 죽자 힘은 충주 유씨 세력에게로 쏠렸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된 충주 유씨는 혜종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되고, 그들의 힘에 밀려 시름에 잠겨 있던 혜종이 병을 얻게 되자 외손 왕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세력을 집중한다. 왕건이 죽은 943년, 당시 왕요의 나이는 21세였다. 혈기왕성한 나이었던 만큼 그 역시 왕위에 대한 욕망은 강했다. 왕요가 본격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서자, 종실에서도 그를 밀기 시작했다. 종실측은 왕요가 집권하는 것이 조정을 가장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종실 세력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왕식렴이었다. 그는 왕건의 사촌동생으로 서경 세력의 핵심이었다. 서경 세력은 왕건이 고려 건국 지구부터 평양을 서경으로, 개성을 수도로 삼아 양경(兩京) 정책을 실시한 이후 형성되었다. 왕건은 평양을 서경으로 할 것을 정하면서 완전히 황폐해진 평양성을 복원하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키고, 사촌동생 왕식렴과 광평시랑 열평(평산 박씨로 추측됨)을 보내 평양을 수비하게 한다. 당시 평양엔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왕건은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몰아내고 북진정책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 같은 왕건의 평양 복원계획은 고구려의 고토회복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임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정책으로서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충청 이북 지방민들은 통일신라 통치하에서도 고구려를 동경하였고,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을 땐 이것이 고구려 고토회복의 열기로 되살아났다. 궁예가 처음에 나라를 세웠을 때 국호를 후고구려(또는 후고려)라고 하였던 것도 고구려 유민들의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궁예는 자신의 권력이 강화되자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태봉이란 이름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궁예는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왕건이 다시 고구려의 후계임을 자처하며 고려를 세웠던 것이다. 따라서 왕건은 비록 개경에 왕성을 건설했지만 평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는 평양이 변방인 점을 감안하여 많은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자신이 몸소 평양을 시찰하여 919년 10월에 드디어 평양성 복원을 완료하였다. 왕건은 평양성이 복원된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이곳을 방문하였으며, ‘훈요십조’에서도 후대의 왕들이 반드시 해마다 일정 기간 동안 평양성에 머무를 것을 당부하고 있다. 왕건의 양경정책은 고구려 고토회복의 측면에서는 좋은 성과를 거뒀지만, 한편으론 고려 조정을 둘로 갈라놓는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혜종이 집권하자 박술희, 왕규 등의 개경파와 왕식렴, 평산 박씨 등의 서경파가 서로 대립하여 세력 다툼을 본격화하였고, 여기에 왕요를 앞세운 충주 유씨 세력이 왕위 계승권을 모교로 서경파에 가세하자 힘은 완전히 서경파 쪽으로 기울었다. 혜종은 개경파의 지지 속에 왕이 되었기 때문에 개경파를 중용하고 서경파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박술희를 대광에 앉혀 문무백관을 통솔케 하고 왕규를 요직에 앉혀 서경 세력을 견제하였다. 이에 따라 왕요 일파 및 서경파는 이 두 사람을 제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양쪽은 상대방 세력을 모함하며 정권다툼을 일삼았고 고려 조정은 신하의 거의 절반을 잃는 결과를 초래한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대립은 날로 심해지고, 이 틈바구니 속에서 가까스로 왕위를 유지하고 있던 혜종은 설상가상으로 병마에 시달리게 된다. 혜종이 병상에 눕자 자연스럽게 개경파의 힘은 약화되고, 이 때문에 개경파를 지원하던 청주 김씨 등의 중립 세력이 서경파로 발을 돌린다. 중립 세력을 흡수한 서경파는 마침내 개경파의 거두 박술희를 역적으로 몰아 귀양 보내고 죽이기에 이른다. 박술희가 살해당하자 왕규를 중심으로 한 개경파는 총력전에 돌입하지만 이미 힘이 너무 약화된 탓에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러던 차에 혜종이 임종하자 서경파는 무력으로 개경파를 제압하고, 개경파의 거두 왕규를 귀양 보내 죽이는데 성공한다. 혜종은 임종을 앞두고도 왕요를 휴계자로 지목하지 않았다. 이는 혜종이 왕요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 흥화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혜종은 누차에 걸쳐 흥화군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겠지만, 그때마다 서경파는 흥화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흥화군보다는 왕요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 조정의 안정을 위한 길이라고 역설했을 것이다. 하지만 혜종은 박술희, 왕규 등 개경파의 도움으로 서경파의 압력을 이겨낸다. 이 때문에 서경파는 박술희와 왕규를 제거하지 않고는 왕요의 왕위 옹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를 미리 눈치 챈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를 제거할 것을 건의하지만 힘이 없던 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혜종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왕요는 별수 없이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한 이후에 서경파에 의한 추대 형식으로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고려 제3대 왕 정종(定宗)이다. 2. 정종의 짧은 치세와 서경 천도계획 (923~949년, 재위기간:945년 9월~949년 3월, 3년 6개월)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 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도 계획은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다준다. 정종은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으로 이름은 요(堯)는, 자는 천의(天義)이다. 923년에 태어난 그는 신명순성왕후의 두 번째 소생이며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신명순성황후의 첫 번째 소생인 태가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그가 차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태조의 차남이었지만 그는 장남 혜종 보다는 지지기반이 튼튼하였다. 강력한 호족 세력인 충주 유씨가 그의 외가였기 때문이다. 지지기반이 튼튼한 덕분에 그는 왕규에 의해 역모자로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혜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945년 9월 측근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정종은 강인하고 고집스러운 성품이면서 한편으로는 불심이 깊고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서경(평양) 천도를 천명했다. 개국 초기부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개성의 지기(地氣)가 나빠졌고, 고구려의 고토회복을 위해서도 평양이 유리하다는 것이 천도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왕성을 옮기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즉위 과정에서 개경파와 지나치게 대립한 데다가 즉위 이후에는 개경 세력을 거의 모두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개경 백성들의 민심이 그로부터 등을 돌린 것이 천도 계획의 본질적인 이유였다. 서경 천도가 조정의 공론으로 확정되자 정종은 시종 권직을 앞세워 궁궐 공사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궁궐 공사는 947년 봄부터 본격화되었다. 개경 백성들을 뽑아서 부역에 동원하고, 엄청난 자재와 식량이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졌지만 정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경 천도계획과 더불어 정종은 거란군의 내침을 대비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하였다. 정종은 광군 30만을 조직하겠다고 마음먹게 된 동기는 최광윤의 거란 내침에 관한 보고 때문이었다. 최광균은 후진에 유학을 갔다가 거란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재주를 인정 받아 벼슬을 하고 있던 중, 거란의 사신으로 오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거란이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광군은 호족군 연합체였다. 30만이라는 대군을 형성했던 것을 보면 일종의 예비군이었다. 당시 중앙정부는 30만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을 뿐 아니라 정규군으로 이러게 많은 숫자를 유지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종은 광군을 통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을 가졌다. 호족들을 광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광군사를 두어 그들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체제를 구상했다. 그러나 정종의 이러한 계획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정종은 겉으로는 강한 처가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이 등을 돌릴까 봐 마음을 졸였고, 또 한편으로는 즉위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을 죽인 것에 대해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즉위하자 곧 손수 불사리를 받들고 10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개국사에 봉안하기도 했고, 곡식 7만 석을 풀어 각 사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어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 불교진행책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948년 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 lf과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 때 손수 이 물건들을 검열하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우레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었다. 949년 정월, 병상에서 그는 왕식렴의 부고를 접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 달 후인 3월에 병이 더욱 위독해져 동북아우 왕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이 때 그의 재위 연수는 4년이요, 향수는 27세였다. 그가 죽자 서경 천도계획은 취소되었고, 왕성 건립도 중지되었다.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접하면서 부역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환호했다고 한다. 성종 대의 최승로는 ‘시무 28조’와 함께 올린 ‘5조 치적평’을 통하여 서경 천도계획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종은 도참을 그릇되게 믿고 왕성을 옮길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천성이 강한 반면에 고집을 꺾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난포가게 끌어 모아 공사를 일으켜 사람들을 고생시켰습니다. 그래서 비록 임금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옳다고 하는 일도 백성들의 마음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원성이 일어났고, 재앙이 그림자처럼 빨리 나타나서 미처 서경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영영 왕위를 떠났습니다.” 정종은 문공왕후 박씨, 문성왕후 박씨, 청주남원부인 김씨 등 3명의 부인을 두었고, 문성왕후 박씨에게서 경춘원군과 공주 1명을 얻었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친자매로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딸이다. 이들은 또한 태조의 제17비 동산원부인 박씨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이러한 삼중결혼은 고려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하는데, 태조의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다. 이는 후백제 세력을 달래는 데 박영규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보여준다. 청주 남원부인 김씨는 원보 김긍률의 딸이며 혜종의 제3비 청주원부인 김씨의 친동생이다. 청주 호족 김긍률은 당시 충주 유씨와 더불어 유력한 호족 중의 하나였는데, 원래는 태조 생존 시 혜종에게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혜종의 세력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힘의 균형이 깨지고 서경파와 왕요에게 힘이 집중되자 정종에게도 둘째 딸을 후궁으로 보냈다. 말하자면 청주 남원부인 김씨는 김긍률의 호신책이었던 것이다. | |